447. 어디서 뭐해(2)
포잉은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숙소에 오자마자 씻더니 버릇처럼 죄다 러그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고 뒹굴었다.
그래도 함께한 지 일 년이 넘었다.
이 아이들이 왜 그랬는지 이제는 이해하기에 중간중간 계약자를 타박하면서 아이들을 지켜봤다.
여전히 전쟁처럼 밥을 먹는 힘찬이나, 빠르고 정확한 속도로 순식간에 비우는 경환.
차분하고 정갈한 젓가락질을 보이는 영빈과 하준.
세빈은 느릿느릿하지만 비교적 깨끗한 손길로 젓가락을 사용했다.
처음 밥 먹을 때만 해도 꼬물거리는 아깽이 같던 것이 일 년 사이에 제법 속도가 빨라졌다.
서로 반찬을 뺏어 먹지는 않지만, 식습관이 힘찬을 닮아가는 건 조금 걱정이라고 지환이 종종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지환은 먹는 것도 느리고 밥 먹는 것에 집중하질 못한다.
멤버들 먹는 걸 챙기느라 자기 밥은 늘 제일 늦게 먹는 바보 같은 계약자.
이제는 그것을 멤버들도 알아서 지환의 앞에는 늘 멤버들이 쌓아둔 반찬이 놓여있다.
그렇게 신나게 밥을 먹고 나니 노곤해진 건지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뒹굴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는 한가지로 고정되지 않았다.
늘 온갖 주제로 대화가 널을 뛰었다.
그러다 오늘은 다 같이 자자는 지환의 말에 나란히 러그 위에 누웠다.
포잉은 지환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고 있다.
멤버들은 큰일 전후로 늘 저렇게 다 같이 누웠다.
좁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쪼르르 누워있는 멤버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환이 가운데 누웠다.
평소에는 투덜거렸을 지환이 오늘은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얌전히 누웠다.
조그맣게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던 아이들도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들이 금방 잠든 것은 포잉이 손을 쓴 탓이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대화하는 와중에 누구도 사고를 언급하지 않았다.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을 포잉도 이제는 안다.
굳이 두려웠던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덮으려 한다는 것도.
그런 아이들이 안타까워서 포잉은 조금 손을 쓰기로 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애들이지 않은가.
소원 요정들과 얽히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런 흉흉한 것을 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제는 어엿한 중급 요정이 된 덕분에 포잉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포잉의 앞발이 허공을 한번 휘적이자 멤버들의 몸 위로 꾸고 있는 꿈이 보였다.
하준은 불이 난 회사에서 사람들을 찾느라 헤매고 다니고 있었다.
영빈은 그 병원에서 홀로 헤매고 있었다.
중간중간 그 범인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 영빈을 공격하기도 하는 꿈.
경환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새까만 불이 다가오는데, 건너편에서 멤버들이 애타게 부르는데.
몸은 자꾸만 늪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힘찬은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 쫓기고 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열심히 골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세빈은 불이 난 병실을 꿈에서 보고 있었다.
불이 난 병실 안쪽의 멤버들을 보며, 세빈은 병실 밖에 서서 어떻게 해도 꺼지지 않는 불에 소리 지르며 울고 있었다.
포잉은 그 꿈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알 수 있었다.
“조그만 것들이….”
깊은 한숨을 내쉰 포잉은 다시 앞발을 휘적였다.
촉촉한 흙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새싹의 색을 빌려온 걸까.
포잉이 능력을 쓸 때마다 봄 냄새가 날 것 같은 연둣빛이 방울방울 피어났다.
방울방울 피어난 능력은 하나씩 멤버들의 머리에 닿아 녹아들었다.
최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우고,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도록.
잔뜩 일그러졌던 멤버들의 얼굴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끙끙거리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해가는 사이, 포잉은 계약자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지환의 꿈은 온통 새까만 색이었다.
지환은 어딘지도 모를 새까만 공간을 헤매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속상했다.
다른 멤버들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포잉은 지환의 몸 위에 올라앉아 심장에 자신의 머리를 뉘었다.
좁아서 이 장소에서 함께 자는 건 선호하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서비스해주기로 했다.
포잉의 작은 머리가 지환의 가슴 위에 닿는 순간.
포잉의 몸에서 넘실거리던 연둣빛 기운이 지환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포잉도 함께 깊은 잠에 빠지자 허공에서 포포가 나타났다.
현재 요정들은 이 일로 불이익을 겪은 인간들을 하나씩 다 쫓아다니며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조치 중이었다.
멤버들은 포잉이 알아서 하리라 믿었지만, 그래도 걱정되어 찾아온 것.
‘다 컸구만.’
포잉이 아이들의 부정적인 기운을 씻어냈다는 걸 확인하고 포포는 만족스레 웃었다.
이 인간들의 상태는 포잉에게 맡겨두어도 괜찮을 듯했다.
여자의 집은 히노가 명계 사자들을 살뜰히 부려가며 깨끗하게 정화했다.
그 여자의 본가에서는 갑자기 사라진 여자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꽤 커다란 사업을 운영하던 여자였으니.
하지만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소원 요정이 개입할 일은 아니다.
포포는 아이들의 몸에 작은 축복을 내려주었다.
몸도 마음도 조금 더 튼튼해질 수 있도록.
쉬이 삿된 것들과 어두운 기운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부디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자라길 빌어주고는 포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이상하게 몸이 가뿐하지?”
“응. 어제는 푹 잤어. 역시 집이 최고야.”
연습실에 모인 우리는 몸을 쭉쭉 풀면서 평소보다 잘 잤다고 히죽거리고 있었다.
나는 포잉이 무언가 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씩 웃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포잉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버렸지만.
그게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는 걸 알기에 아무런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
우리 포잉의 귀여움은 저런 츤데레적인 모습에서 더 배가 되는 거니까.
빨리 짬을 내서 실체화한 포잉과 놀고 싶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접었다.
“에구구….”
“형, 할아버지 같아요.”
“너도 내 나이 되면 다 알게 된다.”
“같이 나이 먹어가는 처지면서.”
“그런 대화를 하기엔 너희는 아직 청소년이다만.”
앓는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하는 내게 세빈이가 핀잔을 주었다.
이 몸에 적응했다 쳐도, 아직 전생의 나이를 기억하고 있기에 종종 이렇게 몸이 절로 찌뿌드드했다.
그런 우리를 보던 준이 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우리에게 한마디 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몸을 푼 우리는 자연스럽게 회의실에 모였다.
중요한 이야기는 회사 오자마자 팀장님과 나눴지만, 이번에 나눌 이야기는 그보다 조금 더 중요한 사항이었다.
우리는 회사에 오자마자 연습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공식 계정에 올렸다.
우리가 정말 괜찮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졸이고 있었을 솜뭉치들을 달래기 부족하다.
회의실에 모인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궁리했다.
평소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솜뭉치들이 좋아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여러 의견이 오갔다.
GIVE 앱을 하는 건 어떻냐는 말부터 각자 편지를 써서 올려주는 건 어떤지 등.
그러나 라이브 방송이야 틈나는 대로 하고 있고, 편지도 공식 카페에 툭하면 가서 쓰고 있었다.
조금 더 좋아할 만한 것들을 궁리하던 우리는 결국 우리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가수니까.
우리 노래를, 무대를 사랑해주는 팬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역시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갑자기 결정된 라이브를 위해 노래를 고르고 회사 지하의 작은 무대를 정돈하고.
“근데 왜 다 같이 안 하고 이렇게 나눠서 해요?”
찬이가 가사를 다시 외우다 말고 준이 형에게 물었다.
우리는 연습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각자 고른 노래 가사를 외우고 있었다.
“다 같이 부르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우리 목소리를 조금 더 많이 들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답은 내가 했다.
다른 팬들도 그럴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간혹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 곡에 모두 담기에는 우리 애들 목소리가 너무 좋다고.
그래서 간혹 내주는 솔로곡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언래블의 정체성이 담긴 단체곡은 단체곡대로 좋았고, 각자의 색이 묻어나는 솔로곡은 개인을 더 깊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이야 모든 멤버가 솔로곡을 가진 것은 아니니 자기 노래로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선물이라고 건넬 노래라면 최대한 목소리를 많이 들려주고 싶었다.
하준 형은 찬이와, 영빈 형은 경환 형과 부르고 세빈이는 나와 부르기로 했다.
이왕이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드는 곡으로 들려주고 싶어서 고르느라 애를 먹었다.
“다음 앨범에는 꼭 부드러운 곡을 많이 넣읍시다.”
“우리는 왜 노래가 다….”
그믐달 만들 때부터 느낀 건데 우리는 몽글몽글한 곡과는 거리가 좀 있는 듯했다.
처음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나온 노래가 그랬으니까.
차분한 분위기의 곡은 몇 곡 있지만, 밝고 상큼한 곡은 전멸이었다.
이러니 우리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도 도저히 불러줄 노래가 없었다.
이미 전에 악플러 사건 때 Pluto를 불러주었으니 다른 곡을 불러주고 싶었다.
점멸은 영빈 형이 콘서트 때 불렀고.
“이게 다 형들이 어둠의 자식이라는 증거야!”
“앞으로 네 파트가 어떻게 바뀌는지 잘 구경해.”
“찬이가 고음이 그렇게 힘들다고 했지?”
열심히 가사 외우던 찬이가 괜히 투정 부렸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침몰하고 있었다.
그러게 왜 곡을 담당하는 사람한테 대들어….
준이 형과 경환 형의 한마디를 듣고서야 잘못했다고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재롱떨었지만, 글쎄.
아무래도 형들이 좀 삐진 것 같으니 다음 앨범 때 찬이가 고생을 좀 할 것 같다.
“대충 외웠지?”
“일단은.”
“넵.”
“그럼 각자 맞춰보고 시간 되면 모이자.”
준이 형의 정리에 각자 짝꿍이랑 사이좋게 흩어졌다.
“형, 여기 감정 잡기가 쪼금 힘들어요.”
막내랑 단둘이 노래를 불러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어쩐지 설렜다.
둘이 각자 파트를 소화하며 키를 맞추기도 하고, 느낀 점을 나누기도 하고.
세빈이 질문에 답해주며 괜히 기분이 폭신폭신해져서 자꾸 웃게 됐다.
처음에는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몰랐던 내가 이제는 우리 막내를 가르칠 정도가 됐다.
진지한 얼굴로 어설픈 내 조언을 들어주는 우리 막둥이.
“왜 그렇게 봐요, 형?”
감개무량한 기분에 취해 세빈이를 한참 쳐다봤더니 우리 막내는 민망했나 보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을 막내가 이제는 새초롬하게 물었다.
이제 자기도 다 컸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귀여워서 한마디 얹어줬다.
“우리 막둥이 너무 기특해서?”
“아, 진짜.”
언제 새침하게 물었냐는 듯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칭찬받는 걸 무척 좋아하는 우리 세빈이를 위해 노래가 많이 늘었다고 폭풍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영빈 형이랑 특훈한다더니 진짜 이제 형보다 잘하는 거 같은데?”
“말도 안 돼, 아직 멀었죠.”
“진짜야. 형도 세빈이한테 뒤처지지 않으려면 더 연습해야겠다.”
방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상기된 뺨을 꾹꾹 누르던 세빈이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찬이나 세빈이가 노래에 부쩍 자신 없어 하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연습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실력이 느는 데는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줄 선생님과 본인의 노력이 전부라고 말했던 미연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본인을 가리키며 올바른 선생님은 있으니 네 노력만 남았다며 장난스럽게 웃으셨었다.
최근 선생님이 바쁘셔서 연기 수업은 잠시 쉬고 있었다.
물론 혼자 연습하는 건 쭉 하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이 기사로 나자마자 어김없이 많은 분이 연락해주셨다.
소현 팀장님이 진우 형이나 선생님은 당장 뛰어올 것처럼 연락해서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우리는 무척 사랑받는 것 같아. 그렇지 세빈아?”
세빈이도 아버지와 원만하게 대화를 했다고 들었다.
비록 우리가 별일을 다 겪었다고는 하지만, 한결같이 걱정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
게다가 그런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한 듯 세빈이는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저도 더 많이 사랑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꽃처럼 피어난 우리 세빈이 미소가 이제는 낯설지 않아 더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