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 어디서 뭐해(1)
신나게 형들에게 혼나고, 막내들에게 치이며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에야 사정을 대충 알 수 있었다.
방화 사건으로 포장된 ‘각얼음’의 만행.
직접 이 일을 겪어야 했던 회사와 새벽 형들은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인간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새벽 형들에게는 비밀로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회사에서는 형들에게도 내용을 알렸다고 했다.
아무래도 최근에 생긴 모든 일을 설명하기가 까다로워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일에 사람이 엮여있다는 걸 아는 나도 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이미 이치카는 세상에서 사라졌으니까.
그 사람의 가족이나 이후 상황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더불어 범행을 저질렀던 사람은 정신을 놓아버렸고, 배후를 캐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터.
그건 경찰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종합 검진은 다음에 받기로 하고 하루를 병원에서 묵은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고, 쉬더라도 마음이 편한 곳에서 쉬고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애들도, 새벽 형들도.
새벽 형들은 또 어딘가로 도망치려던 다진 형의 뒷덜미를 쥐고서는 숙소로 돌아갔다.
다진 형은 병원에 입원해놓고도 답답하다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갔었다고 했다.
그 덕에 무서운 꼴을 안 봤으니 다행이긴 한데, 저 성격을 받아줘야 하는 세비 형이 걱정이었다.
키스 형의 미간이 깊이 파여있던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숙소 가서 한바탕 할 것 같았다.
그저 그 네 명 중 가영 형만 해맑게 웃고 있어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은 것처럼 마주 웃어줄 뿐.
“집이다, 드디어 집이야….”
“아이고….”
힘들게 집에 도착한 맏형들은 벌써 골골거리고 있었다.
겉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초반이거늘, 사건 사고에 치인 우리 형들은 더 나이 들어 버린 듯했다.
“나부터 씻을래!”
“가위바위보 해야지 무슨 소리야.”
“러그에 올라가지 말고!”
찬이는 당장 씻고 드러눕고 싶은 듯했고, 경환 형은 은근슬쩍 러그에 누우려다 내 호통에 발을 뺐다.
“얘들아, 씻고 쉬는 건 좋은데 밥 안 먹어?”
숙소에 데려다준 종범 형은 말라비틀어진 파 뿌리처럼 시들시들하던 우리가 살아나는 모습에 혀를 찼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됐잖아요, 형.
“저희가 적당히 배달시켜 먹든가 할게요. 형도 가서 쉬어야죠.”
“맞아, 형들이 제일 크게 다치고 놀랐을 텐데. 얼른 가서 쉬어요.”
우진 형은 소현 팀장님과 돌아다니며 상황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정윤 실장님은 휴대폰에 불이 날 지경이라고 했고.
자연스럽게 우리를 챙겨주게 된 종범 형.
형도 우진 형과 앞장서서 불을 끄려다 화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나태하게 늘어지려던 멤버들은 금세 미어캣처럼 종범 형을 둘러싸고 모였다.
“제발, 너희 그렇게 쳐다보지 좀 마라….”
우리가 형을 둘러싸고 눈빛을 보내자, 슬그머니 현관문 쪽으로 도망치는 종범 형.
형은 우리가 신나서 달려들고 치근덕댈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듯 도망치곤 했다.
애들이 이렇게 치대는 데 면역이 없다면서 우진 형에게 신세 한탄을 했다고 들었다.
다들 애라고 불리기에는 나이도, 덩치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형들 보기에는 우리가 마냥 애 같은가보다.
“그래. 밥은 거르지 말고 꼭 먹고 내일도 형이 데리러 올게. 늦게 올 거니까 푹 자. 학교에도 연락해놨어.”
“고마워요, 형도 꼭 치료 잘 받고요.”
흐느적거리던 준이 형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대신해 인사했다.
그렇게 종범 형까지 보내고 온전히 우리만 남자, 모두가 러그 밖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부터 신성한 대결을 진행하도록 하지.”
“어차피 꼴찌는 찬이 형인데 뭐.”
엄숙한 얼굴로 가위바위보를 제안한 찬이는 세빈이 핀잔에 금방 불퉁한 얼굴이 됐다.
“너는 진짜!”
“그만하고 얼른 씻자.”
영빈 형의 중재에 진지한 얼굴로 가위바위보가 이루어졌고, 슬프게도 세빈이 예언처럼 찬이가 꼴찌였다.
“이건 사기야!”
“조용히 해요, 패배자.”
“얼른 씻으러 가기나 해, 이것들아!”
다섯 번째 차례가 된 경환 형은 시무룩하니 쪼그려 앉았고, 그 광경을 뒤로하고 나는 욕실로 향했다.
‘너는 왜 이런 운만 좋음?’
‘이거라도 좋아야지. 안 그러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거야.’
유유히 씻으러 가는 내 모습에 포잉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그렇게 포잉과 단둘이 있게 된 욕실.
‘왜 그렇게 오래 잤음?’
‘꿈에서 관리자를 만났어.’
겨우 편하게 씻을 수 있게 된 나는 샤워기 헤드에서 쏟아지는 온수를 맞으며 천천히 포잉에게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익숙한 바디워시 향에 내내 무거웠던 몸이 이완되는 것 같았다.
꿈에서 봤던 책, 관리자와의 대화를 하나씩 포잉에게 털어놨다.
포잉에게는 되도록 비밀 같은 건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키 커지게 해달라고 했다고?’
‘응. 난 그게 제일 중요해.’
‘이, 이 미친놈이! 아니, 왜 너는 그런, 하.’
포잉은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른 놈들은 하다못해 돈을 달라거나 더 많은 능력을 원한다던데 네놈은 고작 키?’
‘어차피 다른 능력은 필요 없고, 돈은 벌고 있잖아?’
‘예시가 그렇다는 거지!’
‘고민해보고 말해달라고 했으니까 포잉도 생각해봐. 근데 난 키 크는 게 정말 중요한데….’
살도 잘 붙지 않고, 근육도 안 붙는 몸.
키도 거의 변함이 없다.
아예 나는 성장이라는 게 멈춰버린 것처럼.
분명 머리카락은 자라고 손톱, 발톱도 자란다.
하지만 그 외에 부분에서는 거의 변함이 없다.
체중도 큰 폭의 변동은 없어서 체중 감량해야 할 시기가 와도 난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저 멤버들과 달리 혼자 잘 먹으면 미안하니까 비슷하게 맞춰 먹을 뿐.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지내지만, 처음에는 이것도 새로운 몸에 온 여파인가 싶어서 아리송했다.
포잉도 원인을 잘 모르겠다고 해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생각해봐, 포잉. 우리가 그동안 이 시스템이라는 거 때문에 얼마나 머리 싸맸어.’
‘그건 그렇지.’
나는 얼토당토않은 보상을 말했다고 혼내던 포잉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양손 가득 거품을 들고 장난치는 나를 포잉은 한없이 하찮다는 듯 봤지만, 일단 나는 진지했다.
‘내가 어떤 보상을 말한다고 한들, 저 제작자는 뭔가 폭탄을 숨겨놓을 것 같단 말이야.’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포잉 안의 내가 얼마나 생각 없는 인간인지 잘 알겠고요….’
삐진 척 뚱하니 바라보자 포잉은 금방 그런 게 아니라며 나를 달랬다.
가끔 이런 포잉의 모습을 보는 게 삶의 낙 중 하나다.
‘그래서 차라리 엉뚱한 보상을 말한 것도 있어. 몸을 바꿔준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일단 사람은 아니다만 그건 네 말이 맞음. 신뢰할 수 없는 존재지.’
나와 포잉에게 그 제작자 겸 관리자는 도저히 못 믿을 존재다.
더불어 아이의 그 투명하다 못해 나조차 비추지 않는 눈동자가 무섭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이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게 되었다.
하다못해 소원 요정인 포잉의 눈동자에도 내가 비친다.
‘조금 시간을 들여 차분하게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포잉의 의견도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고.’
‘…네놈치고는 꽤 잘한 선택이긴 한데.’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는 포잉.
하지만 나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야, 인마! 언제 나와!”
포잉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껏 따뜻한 물을 즐기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곧 나가!”
꼴찌인 찬이가 욕실 앞에서 항의 아닌 항의를 쏟아내고 있었다.
‘쯧, 저놈은 언제쯤 철이 들는지.’
‘그래도 이번에 꽤 기특했어.’
포잉은 찬이가 날뛸 때마다 한숨을 푹푹 내쉰다.
이제는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애들을 아껴주어서 기쁘다.
이번에 불길 앞에서도 멤버들은 여전히 서로를 지켰고, 아꼈다.
덜덜 떠는 세빈이를 꽉 움켜쥐고 품에 단단히 안은 찬이를 잊을 수 없다.
세빈이는 그런 찬이를 붙잡고 돌발행동하지 않도록 단단한 자물쇠가 되어주었다.
경환 형이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나를 붙들고 있었던 것도.
맏형들이 가장 앞에서 우리를 보호하려고 한 것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이후 소방대원들의 도움으로 창밖으로 빠져나오면서도 세빈이 먼저 내보냈다.
먼저 나간 세빈이는 의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예전 같으면 이미 한바탕 울어서 기력을 다 소모했을 애가 이렇게 단단해졌다.
멤버들을 떠올리자 여태까지 고민이 아무렴 어떤가 싶어졌다.
키가 크든 말든, 몸이 자라든 말든.
내가 어떤 모습이든 우리 애들은 여전히 나를 나로 대해 줄 텐데.
* * *
“역시 집이 최고야.”
“집에서 퍼져있는 게 최고지?”
“정답!”
모두 말끔하게 씻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나, 둘 러그 위에 옹기종기 보였다.
준이 형 무릎은 세빈이가 차지하고 있었고, 경환 형 배는 찬이 차지였다.
맏형들 무릎을 막내가 차지하는 건 늘 있어 온 일이지만, 이제 슬슬 버겁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때 세빈이랑 지금 세빈이는 다른 세빈인걸.
저러다 나중에 형들보다 훨씬 더 덩치가 커져도 저러고 있을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물로 몸도 마음도 달래고 난 우리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준이 형.
형은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지. 너희가 한 명도 안 다치고 무사할 수 있어서.”
준이 형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전부 입을 다물고 형을 바라봤다.
“우진 형이나 종범 형이 조금 다쳐서 그게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큰일이 안 생겨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것 같아.”
현장에 있던 사람 중, 유일하게 두 형만 다쳤다.
큰 부상이 아니라고는 하나 우리 모두 마음의 짐이 생겼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말을 쓰기 어려웠는데 준이 형이 스타트를 끊어줬다.
“…한동안은 또 별 얘기가 다 돌아다닐 거야.”
준이 형은 잠시 고민하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전에 그랬듯이 우리에게 생긴 일을 누군가는 제멋대로 떠들 거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형은 우리를 믿는다고 조용히 웃었다.
“우리 이쯤 되면 불사조라는 별명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지?”
“불사조 멋있네.”
경환 형이 피식거리며 영빈 형의 말을 받자 다른 멤버들도 겨우 웃기 시작했다.
“남들은 평생 살면서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우리는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다 겪은 거 같아요.”
“그만큼 이후에는 평화로울 거라고 생각하자.”
세빈이가 푸념처럼 중얼거리며 러그 위를 데구르 굴렀다.
그 모습이 제법 웃겼는지 준이 형은 슬며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찍었다.
“아, 형!”
“괜찮아. 형만 볼게. 귀여워서 그래.”
“왜 그런 걸 찍고 그래요!”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진 세빈이가 투덜거렸지만, 찬이한테 하듯 달려들진 않았다.
찬이가 저랬으면 진작 달려들어서 핸드폰 뺏고 난리 났을 텐데.
“솜뭉치들도 많이 걱정했을 텐데.”
“우리 촬영한 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두가 무사하고 안전한 공간에 있다는 생각에 잔뜩 경직되었던 마음도 풀어졌다.
그제야 슬그머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생각난 멤버들이 준이 형을 바라보았다.
이미 촬영했던 여행 프로그램의 방송 일정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지, 앨범과 해외 투어는 어떻게 될지.
거기에 더해 하겸 형과 기획 중인 콜라보 앨범은 또 어떻게 될지 등.
안 그래도 이런저런 사건으로 앨범 발매가 미뤄지고 회사에 잡음이 많다고 들었다.
“어이고, 너희도 다 컸네. 이제 그런 것도 걱정할 줄 알고.”
“자세한 건 내일 회사에서 얘기 들으면 되고, 너희가 걱정할만한 일은 없어. 괜찮아.”
이미 회사와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건지, 준이 형과 영빈 형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럼 이제 제일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해보죠!”
어느 정도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던 그때, 찬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응? 뭐?”
“밥이요, 우리 뭐 먹어요?”
활짝 웃는 찬이.
방금까지 다정하게 웃음 짓던 준이 형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뽀각’하고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환 형, 고개 끄덕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