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BEcause(3)
솜사탕이 절로 떠오르는, 요즘 경환 형이 한창 꽂혀있는 그런 색의 책이었다.
“베이비 핑큰가, 그런 이름이었지.”
경환 형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의 옷이 온통 검은색과 분홍색으로 물들어 두려울 지경이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왔다.
최근에 막내들이 옷 정리한다고 한바탕 뒤집긴 했지만.
나는 손에 든 책을 살펴보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이런 꿈을 꾸는 거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덩그러니 놓인 책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책은 공책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두터웠고, 표지인듯한 겉면이 두툼했다.
아주 오래된 것이라 하기에는 겉면의 색이 생생했지만, 슬쩍 확인한 안쪽 종이는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제목이 적히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일단은 책을 집어 들었다.
촛불 앞에 자리 잡고 앉으니 그제야 몸의 형태도 제대로 보였다.
“휴….”
나른하고 피곤했던 정신이 조금 깨는 듯했다.
“어디 한번 볼까….”
책을 펼치자, 가장 첫 장에는 정갈하고 단정한 필체로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비밀로 할 것…?”
인쇄된 글자가 아닌 직접 적은 듯한 문장이었다.
무엇을 비밀로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어 고개가 절로 갸우뚱했다.
“뭐…. 일단 노력은 해볼게요.”
누가 듣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대답은 착실히 했다.
그렇게 펼친 책인지 노트인지 알 수 없는 책은 목차도 없이 바로 본론부터 나왔다.
“어?”
거기에는 나에 대해 적혀있었다.
정확히는 전생의 나에 관해.
뇌는 판단을 보류했지만, 눈은 착실히 글자를 읽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 안에는 비교적 짧게 정리된 내 삶이 담겨있었다.
누나나 부모님이 말해주셔서 인식만 하고 있었던 유치원에서의 생활.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학생이랑 크게 싸워 울고 돌아왔던 일.
그때 화난 누나가 학교까지 달려와서 깽판 쳤던 일.
잊고 있었던 여러 일이 차분한 어조로 적혀있었다.
그건 몹시도 생경하고, 무섭고,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 내 삶을 관찰하고 책으로 남긴다면. 사건 당시, 그때 느꼈을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다면.
아마 대부분은 무서워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만큼 호기심이 차올랐다.
정신없이 읽다 보니 전생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지환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차를 바라봤다. 그 직후 지환의 몸과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는 허공으로 치솟았고, 그만큼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끔찍한 통증은 다행히도 잠시였고, 따뜻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몸을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사라졌다.]
“잠시였지만, 잊을 수는 없지.”
조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지켜본 그 사고가 이런 몇 마디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
문장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의 짧은 충격과 기억이 잊힐 것 같지는 않았다.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통증.
누군가 내 몸을 쇠꼬챙이로 쑤셔 구멍을 만든 것 같았다.
꼭 내 몸 안에서 얌전히 흘러야 할 피를 강탈당하는 듯했다.
이 몸으로 겪은 일이 아니면서도 그때를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 책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지환에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전 삶은 거기까지 적혀있었다.
여전히 나는 살아있지만, 마치 선을 긋는 듯 단호한 태도라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책은 아직 두께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도대체….”
갑자기 목이 타는 기분이라 간신히 침을 삼키며, 처음보다 배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뒷장을 펼쳤다.
“아….”
거기에는 또 다른 지환의 삶이 적혀있었다.
이 몸으로 살았을 지환의, 고단하고 힘겨웠을 삶이.
[밤새 눈물을 쏟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는 또 이렇게 떠오르는 데 왜 내 삶에는 영원한 밤만 존재하는 걸까. 지환은 원망스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공지환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 얼마 전의 어느 날이었다.
모든 기억을 넘겨받은 덕분일까.
당시 지환이 느꼈을 좌절과 억울함으로 심장이 뻐근하게 아파졌다.
그 후에 다시 지금의 내 삶이 적혀있었다.
이번 방화 사건 후 내가 잠들었다는 구절까지 적혀있던 페이지 뒤에는 준이 형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번엔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에 책을 덮어버렸다.
나는 멤버들이 알려준 각자의 삶을, 또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겪은 모습을 이미 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여태까지 내가 몰랐던 모습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을 수 없었다.
인생을 훔쳐보다니.
전생과 또 다른 지환의 삶이야 내 것이니 괜찮다.
하지만 그 외에 사람들에게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적어도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다.
타인의 시선으로 써 내려간 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 읽는다 생각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니까.
책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복잡해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뭐 어쩌라고….”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무척 고약하다.
포잉과 함께 살아가는 덕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책에서만 보던 마법도 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보란 듯이 꿈까지 찾아와서 이러는 건 무슨 심보람?
짜증이 치솟아서 옆에 있던 초로 책을 태워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초와 책을 번갈아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자 갑자기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시스템 관리자가 접촉을 요구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평소 상태창이나 스킬창을 볼 때와 같은 상이었다.
“네.”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책을 만든 건지, 왜 갑자기 만나려고 하는 건지 묻고 싶은 건 나도 많으니까.
그 직후 허공에 나타난 건 이모티콘이었다.
“…?”
핸드폰에서 기본으로 제공되는 그 노란 콩나물 대가리 같은 이모티콘.
그걸 주먹만 하게 확대한 듯한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기괴하고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었다.
[반갑습니다, 관리잡니다.]
웃는 이모티콘 위에 메시지가 떠 올랐다.
왜 포포가 제작자 겸 관리자를 ‘망종’이라고 칭했는지 찰떡같이 이해됐다.
[더불어 불 지르는 건 참아주세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니, 권장하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불 사용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하….”
살면서 보통 사람보다 이상하고 희한한 일을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놀랄 일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타긴 탄다는 말이네요?”
웃던 이모티콘 옆에 땀이 한 방울 생겼다.
[해당 내용은 제삼자에게 제공되지 않습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저한테는 왜 보여준 건데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 것도 있던데.”
놀라서 덮어버렸지만, 책의 두께로 보아 멤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내용도 있을 것 같았다.
보기 시작하면 전부 다 보고 나서야 멈출 것 같아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뿐.
질문에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초 쪽으로 손을 슬쩍 뻗었다.
여차하면 불을 지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자 곧바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 사용자에게 보상으로 제공되었으나 불필요하다면 변경할 수 있습니다.]
어딘지 다급함이 느껴지는 메시지에 씩 웃었다.
“왜 보상을 지급하는 거죠?”
여태까지 포잉과 둘이서 시스템이라는 기능을 얼마나 욕했던가.
그런데 갑자기 보상이란 걸 준다고?
내가 겪은 시스템은 불친절했다.
설명에 설명서가 필요한 그런 느낌.
그런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과연 상냥한 성격일까?
“아니, 그보다 대화할 거면 숨지 말고 나오세요. 자꾸 대화가 끊기잖아요.”
울상을 지은 이모티콘이 떠오른다.
“제가 뭐 잡아먹어요?”
[본 관리자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입니다.]
“저도요.”
동그란 눈동자에 일자 입을 가진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뭐요. 왜, 뭐요?”
이모티콘을 상대하는 데도 떨떠름해 하는 게 느껴졌다.
이모티콘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집었다.
간혹 찬이가 건들거릴 때 짓는 표정과 행동을 따라 해봤다.
이럴 때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거든.
[관리자가 현현합니다.]
짧은 안내 메시지와 함께 희미한 불빛만 있던 공간에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내 허리춤 정도까지 오는 작은 아이가 나타났다.
“…?”
발그레한 뺨과 치렁치렁한 옷자락에 파묻힌 작은 손, 내 허리를 조금 넘는 작은 키.
누가 봐도 어린아이였다.
알이 큰 안경이 떨어질 듯 말 듯 콧등에 얹어있는 것을 빼면 무척 귀여운 아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포잉을 만나면서 생긴 것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있다는 걸 경험했다.
“관리자?”
[긍정합니다.]
아이의 머리 위에 다시 문구가 떠올랐다.
“일단….”
시스템을 만든 놈을 만나면 멱살을 잡아줄 거라던 다짐이 파사삭하고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속이 어떻든 간에 겉모습이 아이인데, 어린애한테 못되게 굴만큼 썩은 놈은 아니니까.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뒤죽박죽된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자신을 관리자라고 소개한 아이는 분홍색 책을 슬쩍 집어서 옷소매 속에 넣었다.
헛웃음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하늘하늘한 옷자락 속에 두꺼운 책을 넣었는데 천이 늘어지거나 바뀌는 것 없이 그대로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 만나서 반갑습니다, 관리자님. 앉아서 이야기하죠.”
바닥을 툭툭 치자 긴장한 듯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았는데….”
[듣겠습니다.]
다시 아이의 머리 위에 메시지가 떠 오른다.
아, 모르겠다.
“첫 번째로 무엇에 대한 보상인지, 왜 그 책이었는지 궁금해요.”
어린애고 뭐고 일단은 내가 얻어갈 건 얻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생긴 거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건 내가 몸담은 연예계에서도 익히 배운 데다가, 포잉은 날 그리 호락호락하게 키우지 않았다.
늘 혀끝에 칼이라도 단 것처럼 단호하고 매섭게 나를 몰아쳤던 포잉.
[시스템의 판단이 부적절하여 사용에 애로사항을 겪었다는 민원이 접수되었습니다.]
관리자라는 아이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흔한 고객센터도 없는 시스템 주제에 민원이라니.
아무래도 포포가 힘을 써준 것 같았다.
당시 포포에게 시스템에 관해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았으니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용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로 판단하였으나, 사용자가 불만을 제기하여 재판단합니다.]
“정보 제공이요? 무슨 성장기 수준으로 적혀있던 책이….”
[사용자는 ‘덕질’이라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판단, 비슷한 수준의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덕질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무슨 저를 스토커나 사생처럼 보시네.”
이해하지 못한 듯 관리자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 올랐다.
이래서 머글들이란.
나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덕질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이루어지는지 설명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 하고 속마음도 다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고요. 뭐가 좋은지 싫은지 알고 싶은 건 맞는데 이런 식은 아니에요.”
이전의 덕질의 가장 밑바탕은 동경이었다.
저렇게 되고 싶다, 저들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약간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내 덕질은 그랬다.
나보다 어린애들이 고생하면서 울기도 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기도 하고.
고심해서 만든 노래를 들려주며 팬들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하기도하고.
무엇보다 그저 언래블 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 내게 고맙다고 말해주었고, 내가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언래블이 된 지금은 그때 우리 애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서로에 대해 잘 몰라도 괜찮아요. 그럴 땐 대화하면 되니까요.”
팬들은 늘 내 별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팬레터를 쓰고, 팬미팅을 가고, 노래를 듣거나 연기를 보고 정보를 모은다.
보통 사람들이 서로 친해지기 위해 대화를 하는 것처럼,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그렇게 대화한다고 생각한다.
노래로, 연기로 연예인이 대화를 시도하고, 그 대화에 호기심이 생긴 사람이 대상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러면서 위안을 얻기도 하고, 목표로 삼기도 하며, 점차 각자의 삶에 상대방을 포함한다.
물론 상대방은 나를 모르겠지만, 가끔은 모르기 때문에 더 좋은 것도 있는 법.
물론 ‘이게 덕질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관리자에게 최대한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전했다.
스토커처럼 이상한 책 같은 거 만들지 말고, 제대로 된 보상을 내놓아라, 이놈아.
내 신성한 덕질 방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