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 어쩌나(3)
살면서 이렇게 커다란 호랑이를 볼 줄은 몰랐다.
근엄한 얼굴을 한 호랑이라니.
어쩐지 시큰둥한 얼굴을 한 포잉이 떠올랐다.
“어…. 혹시 포잉 할아버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을 정도로 포잉이 떠오르는 이상한 호랑이.
- 종이 다르지 않으냐, 아이야.
내 말을 들은 호랑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역시.
이 호랑이도 포잉과 같은 소원 요정인 듯했다.
그때, 평소 포잉이 툴툴거리며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네, 뭐. 그렇긴 한데 갑자기 그렇게 떠올라서요. 혹시 포포 어르신? 장로님? 맞나요?”
- 음? 어찌 아느냐.
잔뜩 근엄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평소 포잉이 툴툴거리며 했던 말들이 떠올라 이유 없이 친근했다.
혼자 내적 친밀도를 높이며 방긋 웃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잉한테 들었죠. 여러모로 포잉을 살펴주신다고 했어요. 감사해요. 저 때문에 포잉이 여러 번 곤란했을 텐데.”
가능하다면 한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 놀라지 않는구나.
“네, 포잉과 같이 산 지도 이제 일 년이 넘었잖아요.”
- 포잉이 요정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더냐.
“아뇨. 음…. 옥사라는 동기 얘기랑 장로님 이야기만 했어요. 성함이 포포 님 맞으시죠?”
포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포잉처럼 고양이나 작은 곰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냥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척 귀여웠으니까.
물론 곰은 사람을 종잇장처럼 찢을 수 있다지만, 보통은 사람들에게 귀여운 이미지로 남아있다.
물론 내게도.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호랑이 요정은 무척 커다랬다.
경환 형과 찬이가 같이 올라타도 거뜬할 것 같은 크기에 근엄한 표정.
상상보다 더 크고 어딘가 신비롭고 신성한 느낌까지 폴폴 풍겨서 기분이 이상하다.
장로라던 이 요정님이 무언가 확인하는 것처럼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통에 조금 멋쩍어졌다.
혼자 너무 친한 척했나?
하지만 내 걱정이 기우라는 듯, 내내 근엄한 얼굴을 했던 장로 요정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저분도 좋은 거 못 숨기는 타입이구나.
게다가 슬며시 꼬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포잉이랑 똑 닮았을까.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으니, 포포님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 …아이야, 너 어디 아픈 게냐?
그 물음이 어떤 뜻인지 너무 잘 알았지만, 좋은 걸 어떡하겠어.
“그냥 포잉한테 말로만 듣다가 직접 뵈니까 좋아서요.”
포포는 미심쩍은 듯 슬며시 고개를 내려 나를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 그래, 멀쩡하다니 다행이다마는.
떨떠름한 시선이 사라지고 다시 근엄한 얼굴로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이미 그거 망한 것 같다고 말해주려다 꾹 참았다.
할아버지 격인데 그렇게 말하면 속상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 몇 가지 물을 것이 있어서 왔단다.
“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말씀드릴게요.”
포포는 앞발을 들어 턱을 몇 번 긁적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대략의 상황은 포잉을 통해 전해 들은 것으로 안다.
“네.”
무슨 말을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성실하게 답해주려 했다.
-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네 도움이 필요하다 한다면, 도와줄 수 있느냐.
“위험한가요?”
- 위험하지 않도록 우리가 지킬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더구나.
포포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차마 내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과 깊은 회한이 느껴지는 목소리.
“많이 위험한 일은 안돼요. 포잉한테 혼나요. 저희 누나랑 멤버들도 그렇고. 미움받고 싶지 않거든요.”
아마 예전의 나라면 별다른 고민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된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서 내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무척 속상해할 것이고, 많이 아파할 것을 안다.
“저는 제 몸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 그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냐.
포포는 묵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내 마음은 변함없었다.
여태까지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실수가 그런 마음들이었으니까.
“네.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기만하는 거라고 했어요. 적어도 제 사람들은 그렇대요.”
포포는 한참 동안 다른 말 없이 나를 지켜보다 피식 웃었다.
아, 동물들 표정을 알아보게 된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 다른 동물들 표정도 알아보게 되면 너무 웃길 것 같은데.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포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 다행히 포잉이 제대로 가르친 모양이구나.
“테스트였나요?”
- 늙은 요정의 노파심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
포포는 한결 인자해진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우리는 여러 번 실수했고,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잖아요. 살면서 실수 한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요정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혀가 제법 매끄러운 아이로구나.
“포잉이 저한테 물에 빠지면 입만 뜰 거라고 화내긴 했죠.”
포포는 근엄한 척하려던 것은 포기한 건지 피식거리고 있었다.
- 우리는 너희가 우리의 실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포잉도 너도 힘껏 지금 생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단다.
다른 요정들은 나와 포잉이 타락한 요정과 그 계약자처럼 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저나 포잉이 실수한다면, 그건 저희 실수인 거예요. 아무도 저희를 대신할 수도, 강제할 수도 없어요.”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겠지만, 이건 아니다.
“다른 장로님들은 제가 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함부로 저희를 여러분들의 실수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저나 포잉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요.”
조금 화가 난다.
설령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 해도 그건 우리 선택이다.
“…아이가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부모의 책임이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한 모든 선택까지 부모가 질 필요는 없어요.”
전생의 내 부모님은 본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를 키워주셨다.
그럼에도 부족한 사람으로 자란 건 내가 겁쟁이여서이지, 부모님의 실수가 아니다.
그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뿐.
내가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회피를 골랐다.
그런 부족한 나조차 보듬어주려 애써주신 아버지, 어머니.
“그러니 아무리 포잉이 소중하더라도 묻지도 않고 당사자가 바란 적도 없는 책임을 지려 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쏘아붙이고 말았다.
포잉이 씩씩거리며 요정계 간다고 할 때마다 높은 분한테 그러지 말라고 걱정해놓고!
울컥해서 다 쏟아내고 나니,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대뜸 화내서 죄송해요. 그래도 조금 전 말씀은 좀 그래요.”
아무리 봐도 엄청나게 나이 많을 것 같은데 어르신에게 내가 너무 심했다.
쭈뼛거리며 사과했는데도 한동안 포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화난 건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할 무렵.
포포는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괜히 조금 무서웠다.
웃는 호랑이라니.
- 그래, 내 사과하마. 이래서 늘 말을 조심해야 하거늘.
포포는 어딘지 모르게 우진 형이 떠오르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 우리는 너희를 믿는다. 하지만 믿는다는 말을 핑계 삼아, 너희를 방관한 것이 될까 걱정했다.
포포가 나와 포잉에게서 타락하기 직전 그들을 떠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포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신이 막았어야 한다고 오랜 시간 동안 후회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막지 못해서 이런 결과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
어쩌면, 조금 더 신경 썼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낡고 오래된 질문이 너덜너덜해지고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릴 만큼 계속 곱씹어온 것이다.
“전생에 누나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해줬었어요.”
- 음?
“고민은 적당히 해야 한다고요.”
- 어째서?
“한가지 생각을 너무 오래도록 되새기면, 그 생각은 본래의 형태를 잃는대요.”
현생의 누나가 아닌 전생의 누나가 해줬던 말이었다.
성격 나쁘고 입이 험하지만, 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남겨준 우리 누나.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고 고민하다 보면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든다고요. 안 좋은 생각을 곱씹을수록 벌어지지 않은 일까지 현실처럼 느껴진다고 했어요.”
[니가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뇌에까지 곰팡이가 피어서 그 지X이지.]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뇌에 곰팡이 폈으면 진즉 뒈졌겠지’하고 말대꾸했다가 걷어차였던 것 같다.
어쩐지 이제는 멀게 느껴지는 그 생의 기억을 헤집다 보니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까지 떠올랐다.
생각을 털어내려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냥 걱정되면 이래서 걱정된다, 저래서 걱정된다고 말해주세요. 포잉이 조금 투덜거리긴 하겠지만.”
포잉이 투덜거릴 거라는 말에 포포는 그 상황이 절로 떠오르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포잉은 여러분을 좋아하니까 최대한 말을 들으려고 할 거예요. 지금 저희는 그렇게 함께 살아가고 있거든요.”
어쩌면 건방진 소리를 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아왔으니 더 많은 것을 알 텐데.
하지만 말은 이미 입 밖으로 주절주절 흘러나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 아이야, 네게 걱정을 끼친 셈이 되었구나.
포포는 복잡한 감정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요정님이지만, 그래도 포잉에게는 소중한 요정일 테니 걱정된다.
포잉이 우리 애들을 걱정하듯이.
그 후로 포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소원 요정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등.
- 최대한 보호해줄 생각이지만, 그 여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너도 꼭 조심해야 한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의 포포.
이 할아버지 요정님은 포잉이 내게 다 말하지 못했던 사건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요정들이 붙어서 챙기고 있다고 했다.
더 일찍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전해주었다.
“저 같아도 우리 집에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문 벌컥 열고 들어오면 화날 것 같아요.”
너무 큰 힘을 지닌 소원 요정이니 짊어져야 하는 책임도 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웃어주었다.
- 그러고 보니 개인적으로 전달받은 질문도 있었지.
“네? 누가 또 저를 알아요?”
포잉이 옥사나 포포 외에 다른 요정을 언급한 적이 없기에 우리 포잉은 왕따구나 했다.
그런데 다른 친구도 있었나?
- 왜 스킬을 쓰지 않느냐고 시스템을 만든 놈이 물어보더구나.
어라?
내가 처음에 주야장천 욕했던 그놈인가?
“개발자와 아는 사이세요?”
- 개발자이자 관리자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그런 놈이 있다. 네가 유독 잘 활용하지 않는다며 신기해하더구나.
포잉도 모르던 개발자와 아는 사이라는 말에 역시 어르신이구나 싶어졌다.
초반에 느꼈던 불편함이 떠올라 슬그머니 짜증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잘 눌러 담았다.
지금 포포가 물어본 건 사용 후기가 아니니까.
“저는 지금 삶에 적응하고 녹아들기까지 무척 힘들었어요.”
- 음. 그럴 만하지.
“그런데 상태창이라는 게 보이니까 더 가볍게 생각하더라고요.”
제일 처음. 다시 살게 되고 마냥 낯설기만 했던 그때.
갑자기 스킬이라는 게 생기고, 상태창이라는 게 눈에 보이니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래서 처음에는 잘 써보려고 했다.
이런 게 바로 꿀 빠는 것인가 하면서 혼자 히죽대기도 했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스킬이 무섭고, 이 시스템이라는 게 두려워졌다.
“제 삶은 게임이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