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 외전 - 올해 제일 잘한 일
“내가 말한 건 이런 게 아닌데!”
“그런 것 치고는 무지하게 신나 보이는데?”
“재밌자나영~!”
찬이는 꿍시렁거리면서도 비료 포대를 야무지게 쥐고 터벅터벅 걸었다.
색색거리는 소리 사이로 하얀 숨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가영 형은 낄낄대고 웃느라 이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추워서 그런 건가?
“저 형들은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세빈아, 그렇게 포기하면 안 된다니까.”
장갑에 목도리를 칭칭 둘러 중무장한 세빈이는 곰돌이 같아서 무척 귀엽다.
그런 복장을 해놓고 저렇게 툴툴거리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처음에는 진짜 망했나 싶었는데, 뭐 어떻게든 즐거운 여행이 됐네.”
“형은 너무 긍정적이에요….”
“왜, 이왕이면 긍정적인 게 좋지.”
준이 형은 허우적거리는 힘찬이를 바라보며 경환 형에게 눈짓했다.
찰떡같이 그 눈빛을 알아들은 경환 형은 후다닥 달려가 찬이를 뒤에서 잡아주었다.
눈이 쌓인 야트막한 언덕, 그리고 신나게 포댓자루 타고 내려오는 멤버들.
어쩌다 야심 차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여행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쁘지 않다고? 제정신임, 계약자 놈아?’
‘왜, 그래도 다들 즐거워하고 잠자리도 있고, 먹을 것도 있잖아.’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내 계약자라니….’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는 포잉은 그래도 자꾸 날리는 눈발이 못마땅한지 기분이 저조했다.
“얘들아, 슬슬 돌아가야지.”
진우 형이 오들오들 떨면서 키스 형을 붙들고 걸어왔다.
“아, 진짜.”
진우 형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보는 터라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추위에 이렇게까지 약할 일인가.
어쩐지 추워지면 어디 안 나간다 했어.
“하겸 형이 또 삐질 것 같은데.”
“그러게, 누가 스케줄 조정 못 하랬나. 걔는 그래서 글러 먹었다니까?”
“어쩌면 같이 못 온 게 다행일 수도 있어. 그렇게 꼬일 줄 몰랐잖냐.”
한참 찬이를 굴리고 놀던 가영 형은 언제 왔는지 옆에 와서 옷을 털며 씩 웃었다.
“모처럼 다 같이 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됐어요.”
“어쩔 수 없지.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키스 형이 웃으며 모자를 푹 눌러쓴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어르신들이 마을 회관에 먹을 거 가져다 놨다고 밥 먹고 놀라고 그러시더라.”
“그릴도 있던데?”
“진짜요?”
“응. 종종 마을 분들끼리 잔치할 때 쓴다면서.”
준이 형이 손짓으로 멤버들을 부르고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키스 형과 함께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우리 처음 계획인 이게 아니었다.
* * *
“진짜 이 길이 맞아?”
“내비가 그렇다고 하잖아.”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왜 가도 가도 시골길이야….”
여행의 발단은 막내들의 소원이었다.
찬이는 보드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고, 세빈이는 눈썰매를 타고 싶다고 했다.
이 멤버가 다 같이 어디 가는 건 늘 힘든 일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든가, 프라이빗한 곳을 찾든가.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라 늘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한적한 곳에 캠핑하러 가는 게 아니면, 해외로 나가는 걸 택했다.
우리 애들도 애들이지만, 늘 같이 움직이는 멤버들이 화려하다 보니 그게 최선이었다.
이번에는 우리 나름대로 큰맘 먹고 보드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
아무래도 다 가려지니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로 생각한 게 컸다.
보드복에 고글까지 쓰면 누군지 어떻게 알아보겠어?
늘 함께하던 무인도 패밀리와 이번 여행을 기획한 막내 라인은 어느 때보다 들떴다.
이번에는 같이 가자고 다진 형에게 말해봤지만, 가영 형을 보더니 질색한 얼굴로 나중에 따로 만나자고 했다.
도대체 가영 형은 다진 형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골든 아워 형들도 함께 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콘서트 투어가 잡힌 이상 별수 없었다.
온갖 시상식 일정에 허덕이던 우리도 겨우 이틀 시간을 빼서 나온 거니까.
이 이틀을 빼기 위해 우리는 이 주 동안 지옥을 맛봐야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놀아야 하는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쯤, 겨우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두 대의 차에는 하룻밤 안에 도대체 뭘 얼마나 먹을 작정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음식 재료를 가득 쌓았다.
“이거 다 먹을 수 있는 거죠…?”
“나는 말렸다. 진짜 열심히 말렸어, 환아.”
진우 형은 어딘가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자라는 것보다야 배 터지게 먹는 게 낫지!”
“맞아, 고기 모자라는 건 너무 슬프잖아.”
질린 얼굴의 나를 보며 상쾌하게 웃는 가영 형.
찬이는 음식 재료를 뒤적거리며 신나서 방방 뛰었고, 경환 형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진짜….
세비 형의 얼굴이 심란한 걸 보면, 아무래도 장을 볼 때 가영 형이 폭주한 모양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키스 형의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눌러서 펴준 후 결국 웃고 말았다.
이 사람들은 진짜 한결같구나.
“뭐, 신나게 먹고 남으면 가영 형이 다 먹는 거로 하죠.”
간단한 군것질거리를 챙기라고 했더니 가방 하나 가득 과자를 챙긴 세빈이와 찬이.
영빈 형은 이미 반쯤 잠든 상태여서 준이 형이 웃으며 차에 밀어 넣고 있었다.
우리 형들은 여전히 사이가 좋다니까.
밀어 넣어지면서 ‘퍽’하는 소리와 작은 비명이 들린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 사이에 끼면 적어도 일주일은 괴로워야 하니 때로는 모른 척해야 한다.
자고로 착한 동생은 형들의 사정에 신경 쓰지 않는 법.
가영 형과 경환 형이 갈 때 운전을, 진우 형과 키스 형이 올 때 운전을 맡았다.
처음에는 나도 할 수 있다고 도전했지만, 어째서인지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늘 형들이 운전을 도맡아 하는 게 미안해서 용기를 낸 건데 이런 결과라니.
하다못해 찬이도, 세빈이도 운전하는데!
형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 누가 운전할지 정했다.
체력이 나만큼 저질인 영빈 형은 놀고 나면 기절할 거라고 제외됐고, 준이 형은 애들 챙기라며 제외됐다.
늘 열외인 내 슬픈 외침은 누구도 듣지 않아서 가슴이 아팠다.
‘왜인지 모름? 왜 모름? 나도 아는데.’
‘아니, 그러니까 왜냐고!’
포잉의 비웃음과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나는 차에 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고.
운전할 수 있다고 외쳤던 거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퇴장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무언가 소란스러워서 잠에서 깬 나는 주변 풍경에 의아해졌다.
“여기가 어디예요?”
“글쎄. 우리도 모르겠어.”
“네?”
준이 형은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으면서 무서운 말을 했다.
“새로 개장한 스키장으로 분명 내비를 찍었는데 이상해서 멈춰있거든.”
“이상하네….”
분명 가영 형이 보내준 링크에서는 올해 새로 개장한다던 스키장이 있었다.
내비게이션 검색에도 안 나와서 그 업체에 전화해서 주소까지 받았다.
신규 개장이다 보니 업데이트가 안 된 것 같다는 설명도 들었고.
숙소에서 다 같이 있을 때 했던 통화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 어디쯤에서 길을 바꿔 들어온 우리.
한쪽에 차를 세우고 모두 내렸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주소까지 쭉 가봐?”
“일단 가보자. 아무래도 외진 곳에 있고 신규 개장이라 그런가 봐.”
“다시 전화해보는 건 어때요?”
“새로 연 곳이라고 해도 차가 너무 없는데….”
불안한 마음에 고객 센터에 연락해보라고 말했지만, 세비 형이 고개를 저었다.
“연결이 안 돼. 계속 통화 중으로 나와. 자동 멘트로 넘어가더라고.”
“우리 왠지 공포 영화 클리셰대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가영 형의 한마디에 나와 우리 맏형들은 멈칫했다.
공포물 싫다고, 싫어….
“헛소리하지 마, 형 새끼야.”
음흉하게 웃고 있던 가영 형을 키스 형이 걷어차 버렸다.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우리를 본 건지, 키스 형은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툭 건드렸다.
“가다가 정 이상하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방향 틀거나 적당한 마을에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 지지 뭐.”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꼬이네.”
“뭐, 이것도 새로운 경험으로 치면 나쁘지 않지.”
일찍 출발한다고 출발했지만, 초행길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우리는 다시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이동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내비가 목적지라고 알려준 곳은 도저히 스키장이 있을 거라고 보이지 않는 산이었다.
그 앞에서 멈춘 우리는 다시 한번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이게 뭐야!”
“차라리 이 근처 마을에 하룻밤 머물 수 있는지 물어보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늦을까요?”
“시간이 좀 애매하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리조트로 다시 이동할 것인지 아니면 근처에서 머물 것인지 급히 회의하기 시작했다.
형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는 사이 막내 라인과 나는 한군데 모여 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뭔가 이상해. 거기서 주소 불러준 거 그대로 찍은 거잖아.”
“그때 두 번이나 주소 확인한 건데.”
“옛날에 떠돌던 괴담 생각난다.”
“뭔데?”
“무서운 얘기 하지 마!”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별 얘기가 다 흘러나왔다.
“왜 옛날에 내비 따라가다 이상해서 멈추니까 앞에 강이고 절벽이었다는 그런 얘기, 있었잖아.”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를 하고 그래.”
찬이가 목소리를 잔뜩 깔고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려 했지만, 세빈이 앞에서는 헛수고였다.
그렇게 우리끼리 웅성거리던 그때, 경환 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거기 이름이 화이트 오션 맞아?”
“네. 그래서 처음에 눈 바다냐고 우리끼리 웃었잖아요.”
“안 나와.”
“네?”
“지금은 검색해도 거기 안 나온다고.”
경환 형 특유의 침착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 형들을 붙들었다.
“거기 가면 안 돼요! 귀신 나와!”
“없대요! 거기 없는 데야!”
“얘들이 왜 이래.”
“뭔데?”
다른 차에서 얘기 중이던 형들은 뛰쳐나와 횡설수설하는 우리를 붙들고 다독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키스 형이 계속 통화 중이라던 고객 센터에 다시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녹음된 안내 멘트가 아니라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진짜 뭐에 홀렸냐, 이게 뭐야.”
그 순간의 정적과 공포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던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제일 가까운 마을을 찾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까운 스키장을 찾아가는 쪽으로 기울었던 의견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 상태로 어디를 또 찾아가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차라리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 하룻밤 신세 지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 회관에서 하루 묵을 수 있었다.
도착한 직후 짐을 풀고 어르신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잔뜩 쌓아왔던 고기를 나눠드렸다.
한참 점심 식사 중이셨던 어르신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답례로 신나게 노래도 불러드렸다.
잘생긴 총각들이 노래도 잘한다고, 손뼉 치면서 환하게 웃던 어르신들.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갸웃거리기에 연예인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더 좋아하셨다.
텔레비전에서 본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셨고.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고 하셔서 우리가 겪었던 기묘한 일을 말씀드렸다.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홀홀 하고 웃던 어느 할머니께서는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여주셨다.
아무래도 도깨비나 산신이 노인네들이 쓸쓸해 하니 젊은 친구들을 보내주신 것 같다면서.
어르신들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무서웠던 마음도 한결 가라앉았다.
그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스키장이 아쉬웠던 찬이가 침울해하자, 눈썰매라도 타라며 알려주셨다.
가끔 손주들이 오면 타고 노는 곳이라며 알려주신 곳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신나게 놀았다.
내려오다 굴러서 눈더미에 처박히기도 하고, 눈싸움하다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지만 놀겠다는 우리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다.
진이 빠져서 더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까지 논 우리는 따뜻한 물에 씻고 배가 터질 때까지 고기를 구웠다.
이불까지 내와 주셔서 옹기종기 마을 회관에 모여 누운 그 날밤.
“이상하지만 재밌는 여행이었어.”
“두 번째는 안 이상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고기 잔뜩 가져온 덕분에 어르신들도 드리고 잘됐지, 뭐.”
이미 잔뜩 놀아서 진을 뺀 데다 배불리 먹은 덕분에 잠든 찬이나 경환 형.
지쳐서 제일 먼저 기절하듯 잠든 영빈 형을 빼고 잠들지 못한 사람들끼리 속닥거렸다.
세빈이는 꼬물거리더니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방긋 웃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막내가 즐거웠다면 된 거지, 뭐.
포잉은 그런 우리를 지켜보며 못 말린다는 듯 피식거리며 웃었다.
너희는 어떻게 이렇게 나이 먹어도 똑같냐면서.
“어쨌든 잊을 수 없는 여행이긴 하네요.”
준이 형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잊을 수 없는 겨울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