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한 발짝 두 발짝(1)
일명 ‘각얼음’.
회사에서도 몇 명만 알고 있는 이상 현상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지환의 추측으로 위장한 포잉의 소견과 소현과 정윤의 인맥을 뒤져 얻은 내용을 종합했다.
최근 멤버들의 컨디션 난조와 회사 내외부의 온갖 사건들이 그것과 영향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기운이 달린다며 따뜻한 차를 마시던 소현과 정윤은 최근 모든 음료를 아이스로 마셨다.
음료에 든 얼음을 아작아작 씹으며 분노를 달랜 것.
그 모습이 자못 기괴해서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고.
카야노키 이치카는 정말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일본에서 사람을 사 흑막처럼 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한국까지 왔다.
점잖게 내부부터 흔들려던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아예 직접 공격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
여러 인맥을 통해 적당히 돈을 쥐여주며 온갖 사건·사고를 사주했다.
내부 정보를 사고,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공장에 불을 지르고.
불을 지르고 끊임없이 장작을 밀어 넣는 것처럼 그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유리를 통해 멀리서 지켜보며, 지환이 소중히 여기는 게 어떤 것인지 파악해두었다.
기자들도 두엇 불러다 기사를 쓰게 했다.
처음에는 곤란한척하던 이들도 쥐여주는 돈에 금방 꼬리를 흔들었다.
ON 엔터의 회사 관리가 부실하다는 내용으로.
노후 차량으로 직원이 교통사고를 냈다는, 진실에 허구를 섞은 기사. 업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무리한 일정을 밀어붙여 공장에 사고가 났다는 기사.
회사는 이런 기사들에 직접 대응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응해봤자 논란이 더 커질 거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세 사람만 있으면 종이호랑이가 살아있는 호랑이가 된다던가.
이치카는 여러 삶을 살면서 사람들을 흔드는 법을 배웠다.
난장판일수록 사람들을 흔들고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하기 쉽다는 걸 안다.
유리는 가끔 구슬프게 울면서 이치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치카는 유리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알았다.
자신이 잘 인도하지 못해 이치카가 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가여운 내 요정.
이런 자신조차도 책임지려 한, 착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반쪽.
하지만 이치카는 한번 죽었을 때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기에 한 점의 미련도 없었다.
그러니 이건 유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그런 인간이었고, 이제는 인간도 되지 못한 ‘무엇’일 뿐.
이치카는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 밀리면서 흔들리는 ON 엔터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설령 소원 요정들을 잡아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들이 놀라고 우왕좌왕하는 꼴만 봐도 즐거웠다.
유리는 두 번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떻게든 유리를 살려두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오래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하루 억지로 이어 붙인 영혼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이치카는 유리가 존재하는 동안만이라도 소원 요정들이 괴롭길 바랐다.
그리고 유리가 사라진다면, 이치카도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남은 시간 동안 기꺼이 무고한 인간들을 괴롭힐 생각이다.
* * *
“그때 굿을 했으면 좀 조용히 넘어갔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박정균 대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따뜻한 코코아를 마셨다.
이사들이 시끄럽게 구는 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번엔 그 강도가 심상치 않았다.
언래블에 과감한 투자를 이어왔고, 다행히 그걸 수익으로 돌려주었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은 대부분 언래블이 피해자 포지션이었기에 적절한 대응이 가능했다.
하지만 최근 사건·사고는 언래블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대부분 회사 운영과 연관된 부분이라 비난이 대표에게 집중되었다.
아닌 척해도 힘들었는지 오동통했던 볼이 홀쭉해졌다.
정윤은 속으로 혀를 차며 입안에 얼음 조각을 아작 씹었다.
“스케줄 밀린 건 위약금 내면 될 일이고, 밀린 것도 일부니까 크게 걱정할 것 없어요.”
“광고에는 영향 없지?”
“네. 이미 촬영도 끝난 상태고 회사 선정도 철저히 조사 후에 한 거라 괜찮아요.”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건 새벽과의 콜라보 앨범과 일본 발매 앨범뿐이다.
그쪽만 해도 골치가 아프긴 하지만, 다른 쪽은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광고 제의가 들어왔던 회사 중 몇 군데가 최근 문제가 있었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불똥 튀지 않도록 프로그램 선정도, 광고도 최대한 철저히 조사 후 선정했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박정균 대표는 정윤 실장의 유능함에 다시 한번 반했고, 앞으로도 말을 잘 들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애들이 한동안 몸이 안 좋다더니, 이제는 괜찮나요?”
“네. 힘찬이랑 경환이 걱정이었는데 괜찮아졌어요. 다른 애들 스트레스 관리만 조금 더 신경 쓰면 될 것 같아요.”
상담사가 우려했던 문제가 이런 것이었다.
멤버 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그들이 아프면, 팀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힘찬이 아플 때 슬쩍 흔들렸다가 괜찮아지나 했다.
하지만 경환이 날카로워지면서 다른 멤버들도 덩달아 예민해졌다.
하준과 영빈은 위염이 도져서 다시 약을 먹고 있었다.
형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세빈은 종종 불안 증세를 보였고.
지환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나마 경환이 나아지면서 멤버들의 상태도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다.
“끈끈한 게 이럴 때는 문제가 되네.”
“그래도 데면데면한 것보다야 끈끈한 게 나아요. 자기들끼리 해결해보려고 애쓰기도 하고.”
박 대표도 정윤도 지금이 훨씬 낫다는 건 이해했다.
회사가 욕을 조금 먹긴 했다.
팬들은 내 가수가 아픈 것 같으면 케어 못한 회사를 탓하게 되니까.
그리고 대부분은 그게 회사 탓이라 걸 정윤도 안다.
그 덕분에 ON 엔터가 엔터사 중에서는 돌연변이 취급받고 있기도 했고.
회사가 욕을 먹더라도 팬들의 집결이 단단해지고 가수에 대한 지지가 굳건하다면 되려 좋은 일이다.
충성도 높은 팬들이 많을수록 아이돌로서의 생명도 길어지는 거니까.
“상담을 중지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이 될 줄은 몰랐는데.”
“앞으로 별문제 없어도 상담은 꾸준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속 계약이라도 해두어야 할까.”
사람은 믿기 어려웠지만, 계약서는 믿을 수 있었다.
박정균도 정윤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의도로 물었지만, 정윤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지켜보죠. 여태까지야 애들에게 도움이 됐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니까요. 더군다나 비용 책정도 문제고요.”
어느 정도 선으로 맞춰야 할지도 어렵다.
거기에 노찬영 상담사는 자기 일에 무척 자부심 있는 타입이라, 새로운 계약서를 못마땅해할 수도 있다.
처음 상담을 맡길 때도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던가.
굵직한 내부 정책은 모두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것 같은데 둘 다 지쳤다.
“지환이가 왜 홍삼을 그렇게 물처럼 마시는지 알겠어.”
“놀릴 게 아니었다니까요….”
정신을 갉아먹는 예민한 문제들을 논의하느라 지쳐버린 둘은 흐물흐물해졌다.
제일 머리 아픈 일들은 이렇게 느긋하게 논의도 못 하고 바로바로 대처해야 했다.
직원들 입단속 시키고, 각 실 실장들은 소속 연예인들을 다독이고.
외부 이슈 때문에 배우 중에는 재계약을 다시 고려해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배우 대다수는 별다른 흔들림 없이 회사를 믿어주었다.
이래서 힘든 일을 겪으면 사람이 걸러진다는 거구나 하면서 둘은 허허롭게 웃었다.
회사 쪼개려던 인간들을 다 솎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또 불순분자들이 스며들었나 보다.
“…한번 정리하긴 해야죠.”
“그렇지.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정윤이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박 대표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그 웃음 뒤에는 냉정한 계산이 한창이리라.
“이번 일 끝나면, 저 휴가 좀 주세요.”
“언제든지 가도 된다니까?”
“그래 놓고 전화하실 거잖아요!”
“에이, 난 안 하지.”
정윤은 자기도 모르게 소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놈의 회사, 빌어먹을 회사.
언젠가 때려치우고 말리라.
* * *
숙소 거실에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다들 준비됐지?”
준이 형의 진중한 목소리에 멤버들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폭신한 러그 위에 밥상을 놓은 모양새가 웃겼지만, 분위기는 제법 진지했다.
“지금부터 언래블의 13번째 회의를 시작합니다.”
준이 형의 선언에 나는 노트를 펼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회의록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영빈 형이 했던 것 같은데….
우리는 팀 내에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보통 대화로 풀었다.
매일 잠시라도 대화할 시간을 갖는 이유 역시, 멤버 간의 서운함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였다.
다만, 항상 모이다 보니 점점 진지한 이야기보다 장난치는 시간이 늘었다.
평소라면 그런 것이 문제 되지 않지만, 가끔 진지하게 우리끼리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준이 형과 영빈 형이 그걸 지적한 덕에 우리는 한 번씩 이렇게 회의라는 이름 아래 모여앉았다.
“오늘 회의는 나, 경환이, 힘찬이가 요청해서 열었어.”
모두의 의견을 모으고 싶은 중대한 일이 있다면, 준이 형에게 이야기한다.
형이 들어보고 회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이런 자리를 만들고.
만약 적당한 대화로 해결될 문제면 그렇게 대처했다.
우리끼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늘 이런 식으로 결정했다.
어떤 스케줄의 대응, 콘셉트 결정에 대한 논의, 멤버들 간의 생각 차이 등.
영빈 형은 우리끼리 이런 회의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있어야 했고, 그에는 준비 과정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경험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재산이 되어줄 거라 말했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두면 예능이든, 다른 프로그램에서든 출연 기회가 왔을 때 도움이 될 거라고.
다시 한번 차오르던 덕심을 잘 다스린 나는 펜을 들고 다른 멤버들이 말하길 기다렸다.
“누가 먼저 말할까?”
“제가 먼저 말할게요!”
준이 형의 물음에 찬이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처음에는 감정에 치우쳐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던 찬이가 이제는 곧잘 또박또박 말을 한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제대로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
우리 모지리, 잘 자라고 있네.
흐뭇한 얼굴로 찬이를 바라봤더니, 찬이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질색했다.
귀여운 놈.
“저는 멤버들 사이의 신뢰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응?
갑자기 툭 꺼낸 찬이 말에 어리둥절했다.
우리만큼 서로 숨기는 것 없이 잘 말하는 그룹도 드물 텐데?
하지만 그 생각을 하는 건 나뿐인지 멤버들 모두가 끄덕거렸다.
뭐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곰곰이 최근 행적을 더듬어보았지만, 걱정되는 일은 없었다.
아니, 문제라면 타락한 요정의 방해가 문제지.
“우리는 서로 꽤 믿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찬이는 다른 거야?”
영빈 형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찬이는 형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차분하게 제 생각을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저희가 너무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속에 있는 생각을 다 말하지 않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둘의 대화를 간략하게 적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런 생각을 이렇게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끌고 올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아마 나도, 멤버들도 은연중에 모두 하고 있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꺼내는 것 자체가 꺼려져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기도 했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찬이는 조금 긴장한 듯 침을 삼키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내가 아팠을 때도, 경환 형이 힘들 때도, 영빈 형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최근 말고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우리는 늘 그게 문제였다는 거, 모두 알잖아요.”
찬이 말에 경환 형도, 준이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서는 이미 한차례 대화를 나눈 듯했다.
하다못해 영빈 형이나 세빈이도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오직 나만.
나만 덜컥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