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7)화 (427/456)

427. 기적(2)

신경 쓸 문제가 생겼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습하고, 곡 쓰고, 가사도 쓰고, 연기 연습도 하고, 외국어 공부도 하고, 스케줄도 하고.

그러면서 포잉을 협박하고 회유하고 달랬다.

포잉은 내가 이번 문제의 해결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정확히는 타락한 소원 요정으로 인해 내가,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무척이나 다정하고 난폭한 마음.

하지만 그만큼 잔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와 우리의 일인데 거기에 관여하지 말라고 포잉이 선을 그어버린 셈이니까.

나는 포잉에게 상처받았고,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그 상처를 고스란히 포잉에게 내보였다.

소중하다고 품에만 끌어안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반푼이가 돼버릴 뿐이라고.

나는 삶을 두 번 살아가면서 이것 하나만큼은 뼈에 새길만큼 잘 배웠다.

나를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전생의 내가 있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음을 삼킨 지환이 있다.

또 타인을 지키고 위한다면서 어설프게 설치던 현생의 내가 있다.

그걸 보고 배운 내가 이번마저 상처가 두려워 외면한다면, 내게 두 번의 생을 허락받은 이유가 있을까.

내 상처를 모두 확인한 포잉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올라타 목을 감싸 안았다.

‘나도 아직 자라고 배우는 중이라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미안하다, 계약자놈아.’

지극히 포잉답게 귀엽고 어설픈 사과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모두는 자라는 중이라 괜찮다고.

어차피 포잉이 알려준 대로 나는 아직 어리니까.

몸이 어떻든 간에 내 영혼도, 내 정신도 어리니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괜찮다.

남들보다 천천히 자랄 수도 있지.

어설프고 삐뚤게 자라는 것보다,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곧게 걸어가는 게 낫다.

여태 삐뚤었으면, 앞으로는 곧게 자라면 되지.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만큼 뻔뻔해졌지만, 그런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괜찮다.

내 목덜미에 자기 몸을 문질러오는 포잉의 보드라운 털.

그 감촉이 언제나처럼 내 심장은 쓰다듬어주었다.

포잉도 나도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 * *

경환은 요즘 악몽 때문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삼일 간격으로 시작된 악몽은 처음엔 그저 이상한 꿈에 불과했었다.

그땐 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경환 혼자 있었다.

뮤직비디오의 시작 장면이 그와 비슷하게 새하얀 공간에 홀로 떠오른 문이라, 경환은 그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걸까 고민했다.

무섭진 않았고, 그냥 ‘아,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구나’하는 정도.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저 멀리서부터 푸른 불꽃이 하얀 공간을 조금씩 살라 먹고 있었다.

아직은 자신과 멀리 있었지만, 언젠가 그 불꽃이 자신에게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다.

꿈속 경환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그저 앞이라 추정되는 곳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최대한 불꽃과 멀어지기 위해서.

저건 위험하다고 꿈속에서도 본능이 경고했다.

그렇게 꿈에서도 내내 움직여서 그런 건지, 자고 일어나도 피곤했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자신을 깨우는 멤버들에게도 점차 날카롭게 굴기 시작했고.

경환이 짜증을 내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지환의 모습에 자책하기도 했다.

동생한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이렇게 감정이 불쑥불쑥 치솟는 건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없었던 일이라 혼란스러웠다.

경환은 그 부분을 상담사에게 이야기했다.

최근 꾸고 있는 꿈과 그 꿈이 현실의 자신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찬영이 자신이 겪었던 상담사와 다르다는 걸 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찬영은 진지한 얼굴로 경환에게 이야기했다.

꿈이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하지만, 그걸 적절히 해석해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더군다나 연속해서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 아니냐고.

신뢰하는 사람들과 최근 제일 마음에 걸리는 문제들을 논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

경환은 꿈 해석도 찾아보고 상담도 했지만 무언가 탁 마음에 드는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때마다 하루하루 불은 조금씩 가까워졌고, 경환은 지쳤다.

현실도 바쁜데 꿈속에서조차 내내 걸어야 하니 진이 빠질 법도 했다.

어느 곳에서도 쉬지 못하는 셈이라 누적된 피로가 무겁게 경환을 짓눌렀다.

“형, 요새 무슨 일 있어요?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별거 아냐. 그냥 꿈이 좀.”

점점 연습에도 집중하지 못했고, 작업실에 앉아있어도 멍했다.

벌스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지환이 찾아왔다.

“꿈이요? 무슨 꿈이길래 그래요.”

걱정 가득한 동생의 눈동자가 평소라면 고마웠을 텐데, 오늘따라 그마저도 귀찮아졌다.

귀찮고 다 짜증 나는 마음에 무심코 말을 뱉으려던 경환은 움찔하고 멈췄다.

‘귀찮다고?’

데뷔 후 한 번도 멤버들을 귀찮다고 생각해본 적 없던 경환은 방금 제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미쳤네.’

머리를 부여잡은 경환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지환을 바라봤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동생의 움직임을 타고 사르륵 움직였다.

부스스했던 머리칼은 이제 잘 관리되어 차르륵하는 소리도 낼 것 같았다.

눈썹을 살짝 덮는 앞머리 아래 서늘하기만 했던 눈이 지금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있었다.

경환은 지환이 왜 이렇게 안쓰럽다는 표정인지 안다.

룸메이트인 만큼 자신의 태도가 평소랑 다르다는 걸 알기에 걱정돼서 찾아온 거다.

연습 시간을 악착같이 챙기는 애가 자기 시간을 쪼개서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겠다고.

속에서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것처럼 자기 멋대로 춤추던 감정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잠 좀 못 잤다고 짜증이나 내는 못난 형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잠깐 앉아서 형이랑 이야기할래?”

“네!”

분명 조금 전, 자신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텐데도 지환은 아무런 내색 없이 웃었다.

죄책감이 울컥울컥 치고 올라왔다.

‘그래도 내가 형이니까’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아직 형들만큼 되려면 멀었다는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지환이 올 때마다 껴안았던 쿠션을 밀어주었다.

하준과 경환, 지환의 작업실에는 여러 개의 인형, 쿠션들이 있다.

멤버들이 올 때마다 편하게 껴안고 있으라고.

숙소에서 팬들이 선물해준 인형을 껴안고 있었더니 버릇이 돼버렸다.

뭐라도 품에 껴안고 조물락거려야 제일 편하다고 힘찬이 당당하게 말할 만큼.

“형이… 요즘 날카로웠지? 미안해.”

“아니에요, 피곤할 수도 있죠.”

나이답지 않은 차분함, 언제나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

가끔은 엉뚱하고 어딘가 허술하면서도 종종 예리하게 눈을 빛내는 내 동생.

“잠을 제대로 못 자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지더라.”

“음, 혹시 무슨 꿈을 꾸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지환은 조심스럽게 무슨 꿈인지 물었다.

내용이야 대수로운 것 없었기에 경환은 처음 꿈을 꾸었을 때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을 설명해주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경환과 달리 지환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점점 가까워진다고요?”

“응. 그래도 아직은 꽤 머니까. 찬영 선생님 말씀으로는 스트레스 때문일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도 꿈을 이어서 계속 꾸는 건 진짜 이상하네요.”

경환은 지환에게 너무 걱정을 끼쳤나 싶었다.

이야기를 듣던 지환의 얼굴색도, 표정도, 안 좋아져서 쿠션을 꽉 끌어안고 있던 지환의 손을 잡았다.

“너 괜찮아?”

손을 잡힌 지환이 흠칫하더니 몸이 굳었다.

“왜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둑해지던 눈동자가 거짓이라는 듯, 지환은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자꾸 불이 쫓아온다니까 상상만 해도 무서워져서요. 제가 겁이 좀 많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는 지환의 손은 여전히 차갑다.

워낙 잔걱정도, 겁도 많은 애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에는 이상했다.

경환은 지환이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싶어 미심쩍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캐묻는 건 경환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쪽을 더 선호했다.

“형은 정말 괜찮아. 상담도 잘 받고 있고, 아무래도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으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환의 얼굴에는 걱정과 애정만 가득했는데.

“…네. 그럼요. 그래도 아프면 안 되니까 우진 형이나 소현 팀장님한테도 꼭 말해요.”

“오냐.”

차분하게 웃으며 평소처럼 잔소리를 늘어놓는 지환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손안에 사락거리는 머리칼.

배시시 웃는 착한 내 동생.

하지만 경환은 지환의 얼굴에 왜 죄책감 같은 감정이 서려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미안해 죽을 것 같은 눈을 하는지도 물을 수 없었다.

* * *

처음에는 찬이가 아프더니 이번에는 경환 형 컨디션이 안 좋아졌다.

워낙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형이라 따로 찾아가서 물었던 건데.

‘포잉, 어떡하지?’

‘분명히 숙소로는 들어올 수 없을 텐데.’

손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아 다른 손으로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계약자야, 진정해!’

‘왜 우리 애들한테….’

겨우 혼자 있을 수 있는 작업실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포잉이 옆에 없었다면, 경환 형 앞에서 제대로 표정 관리를 못 할 뻔했다.

꿈속을 잠식해 들어가는 그 푸른 불꽃이 무엇인지 경환 형은 몰랐지만, 나는 안다.

나를 쫓던 그 불꽃이 내가 아닌 우리 애들을 노리고 있었다.

‘왜지? 갑자기 왜 방향을 바꾼 걸까.’

‘너 지금 너무 흥분했음.’

나만 노리는 거면 포잉이 있으니 괜찮다.

그것들은 늘 포잉이 곁에 없을 때만 노렸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멤버들을 노리면 내가 어떻게 대처할 수 없다.

어쩌면 찬이가 이유 없이 계속 아팠던 것도….

혹시 이런 식으로 계속 다른 멤버들을 노리면?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다치면.

‘공지환.’

‘…응?’

계속해서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들이 주르륵 떠오르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말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무척이나 낯선 기분이 들었다.

포잉이 처음으로 나를 지칭해서 불렀다.

효과는 굉장했다.

‘방금 내 이름 말한 거야, 포잉?’

‘그래, 이 멍청한 계약자 놈아!’

무작위로 들끓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깨끗하게 비어버렸다.

포잉은 늘 나를 부를 때면 ‘계약자 놈’이라고 불렀다.

기분 좋을 때는 계약자, 평소에는 계약자 놈.

왜 이름을 불러주지 않냐고 처음에는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방법은 내가 찾아올 테니까 너는 네 할 일을 하셈.’

포잉은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단호한 목소리였다.

높낮이마저 없어진, 무척 건조한 목소리.

‘포잉?’

‘빌어먹을 새끼들이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한테 화를 낼 때는 하악질하고 바락바락 소리치던 포잉.

그때의 모습과 달리 지금 포잉은 무척이나 건조해 보였다.

‘그래, 어쩐지 장로 영감탱이들만 믿고 있다가는 망할 것 같았지. 내 이 새끼들을….’

포잉은 내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듯 파랗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무언가 욕을 중얼거렸다.

‘계약자 놈아, 너는 언래블 일만 되면 정신 놓는 것 좀 어떻게 해라. 계속 그렇게 감정에 휘둘리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한참 동안 장로회를 언급하며 욕하던 포잉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서는 나를 직시했다.

그러더니 잔소리를 한 바가지 쏟아내고는 요정계에 다녀온다며 휙 사라졌다.

방금까지 나를 휘감았던 공포와 두려움은 파도처럼 몰아치던 포잉의 태도에 전부 씻겨나간 듯 사라졌다.

이름을 불러줬다는 감격보다 저렇게까지 화가 난 포잉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의도한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지만 포잉 덕분에 혼란스러웠던 머리는 가라앉았다.

다만, 그러고 나니 포잉이 걱정됐다.

뭐라도 눈앞에 있는 걸 절단내겠다는 듯 살기등등한 모습은 나도 처음이라 그 기세에 눌려버렸다.

아니, 그런데 장로들이면 높은 분들 아냐? 가서 혼나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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