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6)화 (426/456)

426. 기적(1)

소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평소보다 훨씬 담담한 얼굴을 한 지환.

어설프게 미소 짓지 않고 이제는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아이가 각오를 다진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소현은 아이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따라 그 분위기가 달라진다.

주변 공기가, 표정이, 목소리의 떨림이나 눈빛이 그녀가 앞으로 들을 이야기를 암시해 주었다.

이를테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예의 바른 경고일 수도 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활짝 피어나던 지환의 미소가 오늘은 조금 어두웠다.

어리바리하고 하느작거리는 순둥이 같아 보이는 아이지만, 사실 지환이 마냥 순하지 않다는 건 잘 안다.

지환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고, 늘 그것을 메꾸기 위해 노력한다.

회의에서 의견을 낼 때도 혼자만의 계산을 끝낸 내용이다.

힘찬이 충동적으로 상상한 것을 풀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짧은 찰나에도 저 작은 머리통 안에서는 혼자만의 검열을 거친다.

말해도 될 것과 말해선 안 될 것.

많은 생각 끝에 나오는 말들이라 귀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아이의 얼굴에는 아직 다 끝내지 못한 생각이 남아있었다.

결심은 섰지만, 자신은 없는 그런 얼굴.

담담함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지만, 다 가려지지 못한 불안이 엿보인다.

소현이 무수한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얼굴이다.

소현은 주로 결정을 짓는 사람이었고, 그런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볼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병아리, 무슨 이야기 하려고 그렇게 분위기 잡고 있어.’

그렇다면 소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결심을 다잡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평소처럼 웃으며 아이를 맞이했고, 세세히 살폈다.

늘 반짝이던 눈에 걱정과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별처럼 빛나던 눈동자에 드리운 그늘은 소현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언제나 즐겁고 가끔 골치가 아프지. 하지만 팀장님은 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단다.’

진심을 가득 담아 아이에게 웃었다.

소현은 정말로 언래블의 모든 멤버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면, 언제든 들어줄 준비를 하고 산다.

소현은 제 일이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케줄을 짜고, 다음을 준비하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멤버들이 꼭 필요하다.

언래블이 없다면, 언래블 전담팀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언래블이 언래블로서 잘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보살피고 이끌어주는 것이 소현의 일이다.

그러라고 전담팀이 있는 거니까.

어차피 아이돌이라고는 언래블 한 팀뿐이니 전담팀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것 없지만, 그런 마음가짐이다.

다행히도 자신과 함께하는 팀원들도 비슷한 마음으로 잘 일 해주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 위주로 오래 살피고 고른 덕분이긴 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덕분에 소현은 숨이 조금 트였다.

‘제가 이상한 걸 봤어요.’

한숨처럼 흘러나온 지환의 얼굴은 원래 피부색보다 조금 더 창백했다.

얼마나 고민했던 건지, 잠을 설친 것처럼 피부가 평소보다 조금 푸석해 보였다.

소현은 희주에게 멤버들 피부 관리를 조금 더 챙겨달라고 말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일본에 갔을 때부터 파란 불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지환이 소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헛소리한다고 치부하는 게 보통이니까.

‘혹시 집안에 신내림 받은 분이 있니? 특정 종교를 믿는다거나.’

‘네? 아뇨. 제가 알기론… 없을걸요?’

소현이 진지한 얼굴로 여러 가지를 묻자, 도리어 지환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과정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나 무언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과 회사와 숙소에서는 본 적 없다는 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소현은 지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환은 최대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를 믿게 하려고 제삼자의 이야기를 끌고 오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만.

소현과 정윤은 이미 종범에게 전후 사정을 들었다.

말을 꺼내기까지 종범이 어떤 고민을 했을지도 조금은 짐작했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보면 무서워하거나 궁금해한다.

무속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가지는 기대도 있기에 아마 종범은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일 터.

그 마음을 소현과 정윤은 높이 샀다.

사람은 무형의 것을 믿기 힘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은 해도 그걸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듯이.

특히나 소현과 정윤은 그게 심했다.

그러나 모르는 것,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무조건 의심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자기가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귀하게 들었다.

물론 그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조금 많은 뒷조사와 여러 시험이 있겠지만.

소현은 종범의 말을 들으면서 모두 다 놓지 않았던 의심을 지환의 말을 들으며 전부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소현이 할 일은 명확하다.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해, 환아.’

소현은 정보를 요구했다.

원래 지키는 게 더 어렵다.

잘 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늘 정보는 소현이 목표한 바를 이루도록 도와주었다.

미지의 적이지만, 어떻게든 쥐어짜면 도움 될만한 것들 한두 가지 정도는 건질 수 있겠지.

소현은 그리 생각하며 지환을 짤짤 흔들어 많은 정보를 쥐어짰다.

일단은 귀신, 악령, 악마, 도깨비불, 뭐가 됐든 적으로 상정했으니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이름이요?’

지환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귀여운 병아리 같으니라고.

소현은 눈을 깜박이며 어리둥절해 하는 병아리를 보며 웃었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상대를 인식했다는 것이다.

정체 모를 그것을 적으로 상정했다는 그런 표식.

그러니 우리 적에게 가장 하찮은 이름을 붙여주자고 했다.

지환이 데미갓의 최태성을 ‘망둥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렇게 명명한 이후부터 모두들 최태성을 망둥이처럼 못생기고 파닥거리기나 하는 하찮은 물고기처럼 여겼다.

이름을 붙인 지환도, 그 이름을 들은 이들도 그리 여겼다.

소현은 그 불에도 이름을 붙여, 정체불명의 무서운 존재 대신 하찮은 무언가로 여기자고 했다. 이를테면 ‘각얼음’ 같은 것.

그 이름을 들은 지환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마치 자신이 상상하는 그 각얼음이 맞냐는 듯.

얼굴에 이토록 선명하게 하고픈 이야기가 떠오르다니.

소현은 문득 유쾌해져서 신나게 웃었다.

소현이 보아온 지환은 늘 여러 가지로 자신을 덮고 있는 아이였다.

무언가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을 차가운 얼굴로 덮고 사는 그런 사람.

차가운 얼굴이 거둬지고 나니 한여름 피어난 꽃송이처럼 생생했지만, 그마저도 나름의 가면이란 걸 느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지환의 얼굴은 너무 생생해서 ‘팀장님,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그게 너무 유쾌해서 신나게 웃고 말았다.

지환이 한숨을 몇 번쯤 내쉰 후에야 적절히 설명해주긴 했지만.

‘음료수에 넣어 먹는, 갈아서 빙수를 만들기도 하는 그 각얼음 맞아. 겉모습은 불꽃이지만, 지환이 네가 그걸 시리도록 차갑다고 느꼈으니까.’

그렇다면 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겉모습과 속이 다른 건 흔하고 어려울 것이 없다.

소현도 그렇고 정윤도 그런 사람이니까.

더불어 소현이 마주해야 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다.

‘약간 거슬리는 그런 문제라고 생각하자. 팀장님 믿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저 늘 하던 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대책을 강구하고.

소현은 평소처럼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평소처럼 대처하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아이들도 평소처럼 지낼 수 있다.

그런 소현을 지환은 빤히 바라보다 부스스 웃었다.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네, 팀장님’하고 평소처럼 답했다.

앞으로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면 공유해달라고 답하며 소현은 병아리를 한번 꼭 안아주었다.

소현에게 지환은 그런 아이다.

그냥 꼭 한번 안아주고 싶은 아이.

언래블과 소현의 비즈니스 관계나 이런저런 잡다한 걸 다 떼어내면 그것만 남는다.

정윤의 말대로 아이를 지키는 건 어른이 일이니까.

비록 과로와 야근 때문에 이러다 급사하겠다 싶은 날도 있지만, 그런데도 소현이 이 일을 사랑하니까.

소현은 마지막으로 지환에게 같이 고민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그를 연습실로 보냈다.

무언가 허를 찔린 것처럼 사무실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환.

‘아, 밥 잘 챙겨 드시는 거죠? 영양제도 거르지 말고 드세요. 커피는 조금 덜 드시고요.’

나가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던 병아리는 어느샌가 평소 표정으로 돌아와 잔소리를 잔뜩 꺼냈다.

‘너무 피곤해 보여요, 팀장님.’

늘 자기 얼굴을 살피고 건강을 염려하는 아이를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이 지금 소현이 풀 맛과 쇠 맛이 나는, 크고 잘 넘어가지 않는 비타민제를 삼키는 이유였다.

“어휴, 맛없어.”

커피 대신 물을 들이켜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지환이 가져온 고민은 지끈거리는 두통만큼 크고 어려운 것이지만, 어차피 그간의 다른 일 역시 어렵지 않았던 적은 없었으니까.

지환과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소현은 목구멍 안에 남은 약 맛에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동시에, 소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어 주소록을 뒤졌다.

소현의 연락처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그중에는 마침 이 일에 적당한 조언을 구할만한 사람도 있었다.

이래서 세상은 인맥빨이라고 했던가.

* * *

팀장님께 털어놓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포잉.’

‘?’

팀장님께 이야기하는 사이 돌아온 포잉이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은하수 사이에 서 있는 내가 비친다.

‘고마워. 덕분에 용기 낼 수 있었어.’

‘별 쓸데없는 소리를.’

불퉁한 목소리는 평소의 포잉이지만, 꼬리가 흔들거렸다.

좋아하고 있는 게 이렇게 뻔히 다 티 나는데.

귀여운 내 요정님의 모습에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하게 해줘.’

‘무슨 소리냐, 계약자 놈아.’

‘이건 우리 일이잖아.’

태연한 내 목소리와 달리 포잉의 발걸음이 멈췄다.

‘네놈….’

‘나는 약해, 포잉.’

다들 바쁘게 일하는지 사무실을 지나 연습실로 가는 복도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하니까 포잉이 지켜주는 걸 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어.’

내 요정은 너무 걱정이 많고 마음이 여려서 분명 혼자서 감당하려 애쓸 것이다.

포잉이 나를, 이전과 지금의 모든 나를 안다면.

나는 나와 함께 지내온 포잉을 안다.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그러니 이 작고 귀여운 요정님은 내게는 아주 조금만 알리고, 내 안전을 지키며 해결하려 애쓸 것이다.

무엇보다 내 안전을 중히 여기는 포잉이 그동안 요정계에서 쭉 지내온 것은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

그렇기에 나는 아무런 투정 없이 포잉을 보냈다.

더불어, 지금 포잉이 내 곁에 있는 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거나, 해결 방법을 찾아서일 것이다.

‘나 혼자서는 약하니까 최선을 다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거야.’

‘….’

다시 걸음을 옮기자, 포잉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함께 걸었다.

‘이건 우리 일이야, 포잉. 그러니 같이 고민하고 내가 뭐라도 할 수 있게 해줘.’

포잉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있고, 네가 이렇게 잘 키우고 있다고.

우리는 동반자로서 긴 시간을 함께하진 못했지만, 열심히 서로를 알아가려 애써왔다고.

그러니 포잉이 내게 알려준 것처럼, 혼자 짊어지지 말고 함께 해결해보자고 했다.

‘뺀질뺀질하게 말솜씨만 늘었음?’

‘그럴 리가! 포잉에게 배운 건데?’

‘이렇게 물에 넣으면 입만 뜰 종자로 키우지 않았다!’

겨우 평소 포잉의 모습으로 돌아오기에 그게 좋아 웃었다.

“환아? 뭐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습합시다, 연습.”

“…?”

내가 웃는 소리를 들은 건지 연습실 문을 열고 준이 형이 나와서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소리 내 웃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 않아서일까?

준이 형의 얼굴에는 근심이 차올랐다.

좋게 말하면 어디 아픈가 하고 보고 있었고, 솔직하게 말하면 미친 건가 싶은 눈이었다.

“형, 내가 말했나요?”

“뭘?”

“제가 형 엄청 좋아해요.”

그러자 준이 형의 평소처럼 온화해졌다.

“알아, 인마. 그러니까 연습하자.”

“뭐야? 왜 또 둘만 이야기해!”

입구에 서서 둘이 웃고 있자 찬이가 뛰어왔고, 세빈이가 기웃거렸다.

영빈 형은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고, 경환 형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등 뒤에는 한숨을 푹 내쉬는 내 요정님이 있었다.

나는 원래 무척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 내 것은 단 하나도 넘겨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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