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5)화 (425/456)

425. MORE & MORE(5)

요정계에 온 포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타박타박 작은 발걸음이 평소처럼 경쾌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계약자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드디어 상대를 특정할 수 있었지만, 적은 요정 한 명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드문 경우라 장로들도 방법을 궁리하느라 잠을 설친다 했다.

포잉은 포포를 비롯한 장로 요정들과 많은 것을 헤집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와 얼마 되지 않는 자료.

자료를 뒤지면서 포잉이 장로들에게 얼마나 짜증을 냈던지, 나중에는 포포가 제발 그만하라고 말렸다.

어린 요정들과 위험 요소를 최대한 떨어뜨려 놓으려는 의도인 건 알겠다.

하지만 배울 땐 ‘그런 게 있다’ 정도만 가르쳐 놓지 않았나.

그래놓고 이렇게 갑자기 실제 상황이 닥치니 아무리 똑똑한 포잉이라도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벌인 참상이 무엇인지,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일일이 찾아야 했다.

그 결과물이라 하기엔 어처구니없지만, 포잉은 조사한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훗날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참고할 수 있도록.

그 기이한 현상이 타락한 소원 요정의 짓이라는 걸 확인하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일 지환의 주위를 맴도는 게 사특한 원한령 같은 것이었다면, 누구보다 포잉이 먼저 눈치챘을 것이다.

상대를 기만하고 타락시키는 게 삶의 낙이라는 악마라 하여도 포잉이 모를 리 없다.

더군다나 그런 존재들은 소원 요정과 척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손해 보는 게임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이번 상대는 명백히 그들과는 달랐다. 타락한 소원 요정.

다른 요정들에게 이 이야기가 퍼지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심각한 사안임에도 포잉과 장로들만 움직였다.

타락한 소원 요정이 나타날 때마다 어린 요정들이 희생되었다.

어린 요정일수록 계약자와의 관계에 민감하니까.

이별을 겪으면서 점차 성장해나가는 요정도 있지만 버거워하는 요정들도 많았는데, 타락한 소원 요정은 늘 그런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가 요정들을 헤집어놓았다.

상실의 아픔을 다스릴 수 있는 상급 요정들을 노리지 않고, 초급 혹은 중급 요정을 노리는 게 그 때문이다.

장로들은 그 점을 우려하여 포잉은 정령계로 돌아오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포잉의 빈자리는 다른 상급 요정, 혹은 장로 요정이 직접 채우겠다고.

포잉은 인정할 수 없었다.

지환은 자신의 계약자고, 자신이 품에서 기른 아이다.

이제야 빛을 보고 피어나고 있는데 그런 계약자를 두고 떠날 수 없다.

포잉은 지환과 함께한 모든 날을 기억한다.

서로 데면데면했던 첫 만남.

어리바리하고 정신 못 차리는 어린 계약자가 포잉은 못마땅했다.

저렇게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지고, 주인 잃고 날아가 버린 풍선 같은 영혼이라니.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헤매는 영혼이 못마땅했다.

그보다 더 가여운 삶에서도 꽃은 피어나거늘.

포잉은 나약한 지환의 영혼이 못마땅했지만, 자신의 계약자임을 잊지 않았다.

번거롭지만 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면서 날이 지나고 달이 차 기울었다.

그렇게 포잉은 서서히 지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불행과 우울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린 계약자를 통해 배웠다.

나약할지언정 빛을 잃지 않는 영혼이 안쓰럽고 애틋해졌다.

포잉은 어떻게 지환이 소원 요정을 불러낸 건지 이해했다.

그는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울고 있던 어린 영혼이었다.

바르게 걷고 싶지만,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걸을 수 없기에.

지환은 지금도 늘 무언가 배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책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세상에게서 계속해서 여러 가지를 배워 나간다.

저질 체력에 늘 허덕이면서도 배움을 놓지 않으니 기특했다.

그렇게 겁이 많고 무서운 건 못 보는 놈이 제 사람 일만 엮이면 사납게 이를 드러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지환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걷기 시작할 때, 그 옆에 포잉이 있었다.

포잉과 지환은 함께 걸었고 서로 의지하면서 차근차근 둘이서 세계를 만들었다.

운명의 꼬임으로 지환이 고생해야 했던 날들도 기억한다.

무슨 곡절이 그렇게나 많은지.

무슨 일만 있으면 포잉을 품에 꼭 끌어안는 마르고 하얀 손.

진창 같은 감정들이 고여 썩어가도 울어서 흘려보낼 줄 모르던 계약자.

이전 세계의 가족들과 이별할 때조차, 고생한 이야기는 죽어도 입에 담지 않았던 순해 빠진 계약자.

궂은일이 있어도, 속상한 일이 있어도 포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속삭이던 목소리를 안다.

잠결에 몸부림치며 울다가도 포잉을 품에 꼭 안으려던 작은 아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응원해달라며 포잉부터 찾는 기특한 계약자.

지환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면서 포잉은 왜 요정이 타락하기도 하는지 이해했다.

타락하는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다.

왜 가진 능력으로 다른 존재가 살아갈 삶의 등불이 되어주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요정.

욕심에 삼켜진 어리석은 경우였다.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계약자에 매이는 경우였다.

계약자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 어린 요정들이 이런 결과를 맞았다.

처음 포잉은 그런 종류의 타락은 우습게 여겼다.

세계는 모든 것의 순환으로 돌아간다.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지금의 계약자가 생이 다해도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태어난다.

운이 좋다면 살아가면서 그 영혼을 볼 수도 있겠지.

영원에 가까운 생명을 지닌 소원 요정도 죽기는 하니까.

그저 그들의 시간은 다른 존재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갈 뿐이라 여겼다.

그랬던 포잉은 지환과 지내고 주변의 인간들을 통해 여러 감정을 배웠다.

제 앞에서는 마냥 어린애처럼 구는 이 존재를 상실한다면, 자신은 정말로 괜찮을 수 있을까?

지금이야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하다지만, 훗날 지환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영원토록 아이를 지켜볼 방법이 있다면, 포잉은 그걸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포잉은 그 많은 이별을 겪고도 다른 이를 품어주는 선배 소원 요정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무겁구나, 무거워.”

하지만 차마 그 어린 것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요정들이 벌인 일이니, 요정이 해결하는 게 옳다.

포잉은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던 계약자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무한한 신뢰는 안락한 보금자리 같았고, 한없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품 안의 새끼 같다.

가뜩이나 픽픽 쓰러지고 휘청이던 약한 계약자가 이제야 좀 단단해져서 행복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내용을 굳이 알려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중에는 말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래, 지금은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다.

포잉은 지환이 지금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는지 안다.

경중은 있을지언정, 그들을 모두 아끼고 있는 게 맞다.

혹여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이는 여름 지난 꽃처럼 시들고 말겠지.

아직은.

포잉은 입안이 바짝 말라오는 걸 느끼며 무겁게 걸었다.

자기 적이 누구인지까지는 찾았다.

문제는 상대 요정은 이미 타락하고 육체도 잃어 추적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계약자의 환생체를 찾아야 하는데 명부 쪽에서 곱게 협조하지를 않는다.

“빌어먹을 관료주의.”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지 않으려 이리저리 발을 빼고 있는 게 뻔했다.

이를 갈며 사납게 중얼거리는 포잉의 모습은 지환이 봤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거칠었다.

“왔느냐.”

“왔어요.”

그사이 고생해서 그런지 부쩍 수척해진 포포가 포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생체는요?”

“아직 제대로 답변을 주질 않는구나. 조만간 장로 중 한 명이 가서 엎기로 했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장로들이 드디어 직접 움직이려나 보다.

“포포 님이 가면 잘 뒤엎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얀 놈, 말하는 모양새하고는.”

“사실이잖아요.”

포잉이 어깨를 으쓱이자 포포는 피식거리며 느릿하게 꼬리를 움직였다.

“그래서 내가 가질 못하느니라. 뒷수습하기 번거로워지니까.”

포포도 젊은 시절 그 성정이 불같기로 유명했다.

자기 계약자가 부당한 신탁을 받자, 열 받는다고 신탁을 내린 신의 가장 큰 신전을 박살 냈었다.

사상자 없이 주춧돌 하나 남기고 건물을 무너트린 건 어찌 보면 대단하기까지 했다.

기겁한 신과 천사들이 포포에게 항의하기 위해 정령계까지 달려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포포는 ‘네놈 신전이 다 박살 나는 게 빠른지, 정정하는 게 빠른지 보자.’하고 웃었다고 전해진다.

신전은 그 신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

신전을 다 박살 내겠다는 건 영향력을 끊어버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저럴 수 있었던 건 여러 신과 요정들의, 소위 어른들의 사정도 얽혀있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했다.

그제야 얌전한 소원 요정들을 얕보고 책임을 미루던 신들이 태도를 바꿨다고 했다.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전의 일이지만, 나이 먹었다고 그 성격이 어디 갈 리 없다.

“만약에 그 환생체가 전생을 기억한다면, 명계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네요.”

“그렇지.”

“같이 죽자고 물고 늘어져야지.”

“네가 웬일로 옳은 소리를 하는구나.”

나란히 앉아 한마디씩 툭툭 주고받던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네 계약자에게는 언제 말할 생각이냐.”

“조금만 더 있다가요.”

“꽤 빠릿빠릿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이지 않더냐.”

“심약하고 잘 놀라서 안 돼요.”

포포는 진지한 얼굴로 포잉에게 타일렀다.

신뢰로 맺어진 상대일수록 이런 일은 빨리 말하는 게 좋다고.

사실 포잉은 두렵다.

혹시라도 지환의 주변에까지 피해가 간다면, 그들 중 누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계약자가 포잉을 원망할까 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따뜻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자신을 외면한다면, 포잉은 무척이나 힘들 것 같았다.

“네놈은 네 계약자라고 그렇게 물고 늘어져 놓고는, 정작 네놈이 믿지를 않고 있구나.”

“…….”

포포가 혀를 차며 포잉의 작은 머리에 살짝 앞발을 얹었다.

“믿어줄 때도 있어야 한다. 인간들은 약하면서도 강하지.”

온화한 목소리가 날 서 있던 포잉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소원 요정은 다른 존재들을 통해 배우고 성숙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하나, 조력자일 뿐.

이루는 것은 상대이고 요정들은 돕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포잉은 자신이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조만간 이야기할게요….”

“오냐. 너는 영리한 아이니 잘할 게야.”

포포는 시무룩해진 포잉의 작은 몸이 안쓰러워, 품에 안았다.

분명 이 아이와 계약자는 현명하게 잘 해결해나갈 것이라 믿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성장해나가겠지.

포포는 포잉이 부디 별 탈 없이 일을 잘 해결할 수 있기를 빌었다.

* * *

최근 들어 포잉이 기운 없어 하기에 새로운 간식들을 시켰다.

수제 간식이라며 예약하고 기다린 끝에 겨우 받은 간식들.

우리 포잉이 이거 먹고 조금 기운 차렸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생각 끝에 소현 팀장님의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종범 형을 통해 들은 이야기, 포잉과 나눈 대화.

그걸 긴 고민 끝에 회사에도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포잉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약해서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도움도 기꺼이 받기로 마음을 정했다.

원래도 연예계에는 귀신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촬영장이나 녹음실에서 귀신이 나오면 대박 난다는 그런 속설이 떠도는 곳이니까.

소현 팀장님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여태까지 팀장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준 모습들이 모두 진실이라면, 이번에도 믿어주지 않을까 하면서.

- 똑똑

“네.”

“팀장님, 저 지환이요.”

“들어와.”

피곤해 보이던 팀장님의 목소리가 누군지 밝히자 조금 밝아졌다.

우리를 기꺼워해 주시는 이런 작은 것들에 감사하다.

이제는 나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걸 배워왔으니까.

“어서 와, 우리 병아리.”

팀장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 얼굴 위에 나를 ‘내 새끼’하고 부르며 눈물짓던 팀장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팀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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