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MORE & MORE(4)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부유물 같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처럼.
한없이 가볍고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몸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스노 글로브 안에 잘 꾸며진 것처럼 반짝거리기만 하는 화려한 세상.
이대로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겠다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몽롱했다.
뿌리 내릴 곳도 없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던 그때, 무언가 시선 끝에 걸렸다.
낡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담벼락 아래 작은 새싹.
햇볕도 잘 들지 않을 것 같은 그늘진 그곳에도 연록 빛 싹이 돋아있었다.
이상하리만큼 대견하고 뿌듯해서 뭉클한 마음에 그 주변을 맴돌았다.
마음 가는 곳도, 시선 가는 곳도 없이 먼지 조각처럼 무게도, 무엇도 갖지 못했던 내가.
그 작은 싹이 귀해서 기어코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얌전히 그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꾸물거리며 콘크리트 조각 틈, 그 작은 사이에서 열심히 뿌리를 퍼트리고 비틀거리며 자라는 모습을.
나는 잎을 받쳐줄 수도, 날카로운 바람을 막아줄 수도 없어 안타까웠다.
허리가 꺾일 것처럼 강한 바람에 저항하기보다 순응하며, 서툴지만 착실히 자라던 싹.
풀은 기어코 노란 꽃을 피워내고, 지고 한 움큼도 안 될 하늘하늘한 씨앗을 남겼다.
홀씨 가닥마다 온갖 감정이 매달려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안도도, 질투나 원망 같은 감정도 하늘거리는 홀씨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도 저 홀씨를 타고 날아가면 되겠구나.
저 솜뭉치 같은 하늘거리는 씨앗이 내가 갈 곳으로 데려다주겠구나.
냉큼 홀씨에 매달려 기둥을 품에 꼭 안았다.
‘나를 데려다줘.’
어딘지 모르지만,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불어온 바람.
부유물 같던 내가 홀씨에 몸을 실은 덕에 하늘거리며 하늘을 날았다.
몇 번이나 떨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연약한 씨앗에 매달려 하염없이 날았다.
그리고 도착한 광활한 벌판.
씨앗과 함께 흙 이불을 덮은 나는 안도했다.
드디어 피어날 수 있겠어, 하면서.
* * *
“이상한 꿈이네, 진짜.”
“응. 근데 하늘을 나는 기분은 되게 좋더라.”
지난밤 꾼 알 수 없는 꿈을 찬이와 속닥거리며 웃었다.
그동안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던 찬이가 한결 기운차진 건 무척 보기 좋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한껏 예민해져서 찌푸리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속상했다.
늘 활기차게 팀 분위기를 이끌어가 주는 찬이가 처져있으니 더 무겁게 느껴진 걸까?
다들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일 전전긍긍하던 세빈이를 꼬드겨서 밖에 나갔다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연히 우진 형을 대동하고 외출했고, 우진 형은 풀이 죽은 세빈이를 다독여주었다.
괜찮을 거라고.
그동안 무리했으니 아플 만도 하다고.
다정한 토닥임에 기운 차린 세빈이와 나는 쓴 걸 싫어하는 찬이를 약간 골려줄 마음을 담아 쌍화탕을 샀다.
홍삼을 먹이려고 해도 늘 쓰다고 싫다고 도망가는 놈이니까.
몰래 가서 후다닥 두고 와야지 했는데, 찬이가 혼자 끙끙대는 소리가 안쓰러워 잠시 주저했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지만 우린 서로 모른 척 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런 일을 다시 꺼내는 건 조금 부끄러우니까.
편의점, 드라마 홍보물 촬영장에서 모습을 보였던 불꽃은 최근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포잉과도 여러 번에 걸쳐 그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잉이 애쓰고 있는 건 알지만,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나도 대처할 방법이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해두었다.
포잉의 깊은 한숨과 걱정이 뚝뚝 묻어나던 눈빛.
종범 형에게 이미 이상한 걸 본다고 말을 했다고 했더니, 포잉은 오래도록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인간들에게 영향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이미 그건 그른 것 같다고.
처음 듣는 포잉의 자조적인 어투라 나도 모르게 포잉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네 탓이 아니라고.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긴 건데 그게 왜 포잉의 탓이냐고.
평소라면 답답하다고 나를 쳐냈을 포잉이 그날따라 유난히 얌전했다.
늘 자신만만했던 포잉의 약한 모습이 안타까워서 내 요정님의 아름다운 눈을 들여다보았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무리 지어 생활하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거라고.
그러니 나는 포잉의 도움을 기꺼이 받을 거라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나도 무언가 포잉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내 요정님은 한참이나 말없이 얌전히 내 품에 안겨주었다.
비록 그 후엔 도로 평소의 포잉으로 돌아가 나를 쳐냈지만.
그러면서 이야기했다.
다행히 이 세계에도 인외의 존재와 소통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고.
그래서 장로들을 통해 그들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했다.
종범 형을 떠올리며 설마? 하고 되물으니 내 짐작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포잉은 진지한 얼굴로 팀장님과 실장님께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타락한 소원 요정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계약자 외에는 모두에 대한 증오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위해를 가하려고 발버둥 칠 수도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지금으로서는 타락한 소원 요정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어 장로들이 나서지 못한다고 했다.
확실한 근거가 생기면 장로들도 나설 거고 그렇게 되면 금방 해결될 거라며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들은 타락하면서 대부분의 힘은 잃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포잉은 더 자주 요정계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밤중에야 간신히 내 곁으로 돌아와 지친 듯 금방 잠드는 날이 반복되었다.
마치 매일 같이 새벽에 출근하고, 깊은 한밤중에 겨우 집에 돌아오는 아버지 같다고 해야 할까?
고된 일에 시달려서 가족 얼굴 보기도 힘든 그런 가장의 무게.
농담 삼아서라도 포잉에게 그렇게 말했다가는 진심으로 때릴 것 같아서 관뒀다.
그저 혼자 상상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사이 나는 멤버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포잉이 말한 것도 있고, 그동안 몸이 안 좋았던 찬이도 걱정됐으니까.
다행히 찬이는 잘 털어냈는지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졌다.
옆에서 깐죽거릴 때는 가끔 너무 화딱지 나서 멱살을 잡고 싶었었는데.
그렇게 기운차던 애가 아파서 흐물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속상한 마음이 가득해졌다.
차라리 깐죽거릴 때가 낫지.
“근데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하필 민들레야?”
“난들 아냐? 꿈인데.”
“꿈은 무의식의 산물이라던데 넌 평소에 뭘 생각하고 사는 거야.”
“오, 우리 차니 그런 것도 알아?”
혼자 꿈 해석을 찾아본다고 똥폼 잡고 열심히 중얼거리는 꼴이 제법 진지했다.
그래, 우리 모지리는 계속 이렇게 모지리로 크자.
비실비실 웃던 나는 찬이 머리를 곱게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홍삼 광고 영상은 당일 촬영으로 끝나지 못했다.
광고주님의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기존의 대본이 엎어져 오늘은 재촬영이었다.
처음 찍었던 광고 영상은 보편적이고 따뜻한 가족 감성이었다.
우리가 홍삼을 몰래 사다가 부모님에게 밀어주는, 그런 영상.
너무 평탄한 내용이라서였을까, 찍을 때부터 요새 광고 영상치고는 조금 심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광고주님들 눈에도 썩 차지 않았던 건지 재촬영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애당초 이쪽 회사와 계약할 때 사전 조항에 들어가 있던 내용이라 수긍했다.
그렇게 새로 받은 광고 내용.
“진짜 이대로 찍는 걸까?”
“그래도 허니비 때보다는 평범하잖아.”
어딘가 걱정스러워 보이는 영빈 형의 중얼거림과 태연하게 답하는 준이 형.
새로 받은 광고는 건강식품보다는 스포츠음료 광고 같았다.
콘서트 때 영상도 조금 따서 쓴다고 했다.
오늘 찍는 장면은 무대 아래의 땀범벅이 되어 지쳐있는 멤버들과 비교적 멀쩡한 내 모습.
그런 내가 가방에서 홍삼 스틱을 꺼내 멤버들 입에 하나씩 물려주며 평소처럼 웃으면 된다고 했다.
이 장면 이후에는 연습실로 꾸며진 세트에서 힘들어하는 막내 라인에게 슬며시 홍삼 정과를 내민다.
그 후에는 보컬 룸에서 힘들어하는 형들에게 홍삼정을 탄 차를.
아니, 무슨 우리 애들이 홍삼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처음 대본을 받아 들고서 우리는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 것이 낫지 않냐고 우리끼리 수군거렸다.
너무 홍삼으로 떡칠한 광고잖아?
아무리 나라도 저렇게 홍삼을 사람들에게 들이밀지는 않는걸!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힘 없는 연예인이고 광고주님은 어쨌든 상전이니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젊은 세대에 조금 더 친근하게 홍삼을 소개해주고 싶어 이 대본을 최종 선택했다고 하셨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과연 이 광고를 보고 홍삼을 살까?
조금 더 참신하고 신나는 이야기는 없었던 걸까 하고 슬퍼졌다.
우리 솜뭉치들의 주머니를 열기 위해 포스터도 찍었지만 어쩐지 싱숭생숭했다.
어딘지 모르게 허니비나 앙퀴라 광고 촬영 때랑은 기분이 달랐다.
그래도 성인 솜뭉치들도 많으니까 홍삼 먹고 건강해지면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애써 생각을 돌렸다.
대중적인 내 이미지에 관한 고찰과 광고가 팬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 온갖 생각이 마구 뒤엉켰다.
“그래도 이번 광고 후에 한동안은 홍삼 안 사도 되겠더라.”
애매한 얼굴을 한 멤버들과 어색하게 웃는 내게 우진 형이 속삭였다.
허니비 때도, 앙퀴라 광고 때도 많은 선물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홍삼 제품을 많이 챙겨주시려나 보다.
그 얘기를 듣자 갑자기 기운이 났다.
안 그래도 평소 챙겨 먹던 회사 제품이라 약간의 호감이 있기도 했다.
다만 먹기 편한 스틱만 계속 먹었던 터라 다른 제품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고.
“저저, 홍삼 준다니까 웃는 거 봐.”
“비싼 건데 주시면 ‘감사합니다’하고 받아야지. 안 그래?”
“어휴, 너는 그 홍삼 짤 평생 붙어 다닐 거야.”
“이미 포기했어, 괜찮아.”
찬이가 금방 활짝 피어난 나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저런 투덜거림은 이제 나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어차피 묻지 못할 흑역사라면 최대한 잘 뽑아먹는 게 이득이지 뭐.
방 한쪽에 곱게 놓인 홍삼 짤 액자는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이제는 받아들였다.
뭐든 잘 쓸 수 있으면 쓰는 거지!
“치킨 광고였으면 진짜 신났을 텐데.”
“치킨 광고는 진짜 대박 나야 찍는다더라.”
내게 툴툴거리던 찬이는 구석에서 조그맣게 소리 죽여 경환 형과 속닥거렸다.
우리끼리 쉴 수 있도록 배정받은 대기실이라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다른 스태프들과 회사 관계자들이 있는 세트장에서 할 소리 못할 소리 정도는 구분했다.
저 둘이 평소보다 우중충해진 것도 이해는 갔다.
홍삼은 어쨌든 쓴맛이 강하니까.
이전 촬영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우리가 직접 홍삼을 직접 먹어야 했다.
하루에 정해진 섭취량이 있기에 스틱이나 정 종류는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지만, 정과는 그 특유의 모양새 때문에 본 제품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결국은 저 인간들이 지금 저렇게 시무룩해진 건, 전부 쓴 거 먹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것.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우리 세빈이가 우중충해 있는 찬이와 경환을 향해 한마디 했다.
“초딩 입맛들.”
내가 진짜 우리 막내 보기 부끄러워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