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MORE & MORE(3)
힘찬은 최근 들어 컨디션이 이전만 못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금방 지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회사고 멤버들이고 건강에 관해서는 굉장히 민감했기에, 힘찬도 평소 몸을 아끼고 있었다.
당장 자신이 가장 건강해야 다른 사람도 돌볼 수 있는 거니까.
힘찬은 지환이 몸이 약하기에 자신이 더 건강해져서 지환을 챙겨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영양제도 열심히 잘 챙겨 먹었고.
그러던 중, 일본을 다녀온 후부터 몸살처럼 온몸이 욱신거려 한참을 고생하고 있었다.
병원도 다녀오고 링거도 맞았는데 통증이 가시긴 해도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멤버들의 걱정을 알기에 최대한 티 내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만큼 컨디션이 떨어지는 게 몸으로 와닿았다.
평소에는 종일 연습해도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반나절만 연습해도 지친다.
“에휴….”
한숨을 푹 내쉰 힘찬은 지환이 쥐여주었던 홍삼 스틱을 톡 뜯어서 들이켰다.
병원에서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다만, 통증이 지속해서 반복될 때 정밀 검사를 해보자는 소견을 내놓았을 뿐.
동행한 우진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 힘찬이 괜찮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었다.
최근 멤버들이 힘찬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본다는 걸 알기에, 지환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기도 했다.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멤버들이 걱정하는 게 당사자에게는 더 걱정일 수도 있다는 것.
그 때문에 그 며칠 동안은 무리한 연습도 하지 않았고, 꾸준히 루틴을 지키려고만 했다.
‘그때 이상한 걸 봤었지?’
연습이 끝나고 바닥에 철퍼덕 누운 힘찬은 혼자 호텔에 있을 때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몸이 좋지 않아 힘찬만 호텔에 머물렀다.
자신이 나갔다가 신나게 놀아야 할 멤버들까지 놀지 못할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한여름인데도 식은땀이 흐르고 잔기침에 온몸이 욱신거렸기에, 늘 붙어있던 멤버들이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그렇게 멤버들을 보내놓고 약 기운에 잠들었던 힘찬은 눈을 떴을 때 기묘한 것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듯 허공에 있었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타지에서 아프고 자다 깨서 헛걸 보았나 싶었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지난밤에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트리머 방송을 켜놓고 자서 그런 걸까?
오싹했던 경험에 잠이 깬 힘찬은 방문을 열기도 하고 여기저기 확인했다.
혹시라도 이상한 게 있나 하고.
다시 둘러본 방안은 언제 이상한 게 보였냐는 듯 어제와 똑같았다.
이상한 형체가 보였던 곳을 다시 확인하니 그 자리에는 의자가 있었다.
지난밤, 힘찬이 가방을 뒤적거리며 의자에 올려놨던 그 자리였다.
지환이 선물해줬던 가방이기에 괜히 신경이 쓰인 힘찬은 가방을 탈탈 털었었다.
괜히 내 친구가 고심해서 골라준 가방에 부정 타면 안 된다고.
그 후로는 다행히 헛것도 보이지 않았고, 멤버들의 이야기도 즐거웠다.
첫 나들이에 함께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자연스럽게 다음을 약속하는 멤버들이 있어 괜찮았다.
언래블은 이제 다음 일을 입에 담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그 후의 미래에도 함께 있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으갸갸아아….”
지환이 봤으면 또 못생긴 얼굴이라고 할법한, 그런 얼굴로 바닥에 눌어붙어 뭉그적대던 힘찬.
이리저리 뒹굴던 힘찬은 그때 보았던 이상한 형체가 자꾸만 생각났다.
“진짜 몸이 허해졌나?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아직 팔팔한 19세건만, 지환의 영향인지 보약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자고로 몸은 튼튼할 때 잘 챙겨야 한다고 평소에도 지환이 얼마나 잔소리했던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쳐다보는 지환이 떠올라 괜히 실실 웃게 됐다.
막내 세빈은 그런 지환을 알기에 가끔 은근슬쩍 아픈 척을 했다.
누구보다 서로 몸을 잘 아는 힘찬과 세빈.
그렇기에 저 정도 연습과 동작으로 아플 리 없다는 걸 아는데, 괜히 골골거리며 지환을 독차지했다.
너무 무리한 거 같다면서 우리 막내 어쩌냐고 안쓰러워 어화둥둥 하는 지환의 품에 쏙 안긴 세빈.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는 힘찬을 향해 얄밉게 혀까지 내미는 걸 보면 무조건 저건 엄살이었다.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가 지환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다.
‘쟤가 저거하고 아플 리 없다니까! 저저, 얌생이같이!’
‘동생한테 얌생이가 뭐야, 인마.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을 수도 있지. 막내한테 왜 그래.’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아오, 막내면 다냐!”
혼자 있는 작은 연습실에서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리다 결국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다지…. 다야.”
가끔 얄밉게 굴고 힘찬에게 대들긴 하지만, 세빈이가 미운 건 아니다.
힘찬이야 이복 누나들에게 과격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세빈은 처음일 테니까.
맏형들의 자상한 보살핌과 지환의 아낌없는 보호.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는 경환과 진짜 혈육처럼 치고받고 스스럼없이 장난치는 자신.
그 모든 것들에 세빈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직접 봐왔으니 모르지 않는다.
매번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는데 모를 수가.
뽀얗고 말랑한 얼굴이 활짝 피어서 더 예뻐졌는지, 다른 사람들도 세빈이를 예쁘다 예쁘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빈이는 오직 멤버들 앞에서만 자신을 솔직하게 다 꺼낸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아직 철딱서니 없는 막내니, 형인 내가 이해해줘야지 하면서.
오늘 연습은 이쯤 해야겠다 싶어 아직 욱신거리는 몸 여기저기를 비틀어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마냥 우중충하게 늘어져 있을 수는 없다.
좋아지도록 노력하고 다시 평소 몸 상태를 찾아야 한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살금살금 걷는 듯, 발소리를 한껏 죽인 이 걸음 소리는 두 사람의 것이었다.
인기척을 느꼈지만, 힘찬은 멤버들을 떠올리며 누굴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며 못 들은 척 스트레칭을 이어갔다.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면서.
한껏 귀를 쫑긋거려보니 무어라 말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무언가 부딪히는 ‘탁’하는 소리가 들렸고, 화들짝 놀란 건지 바쁜 걸음 소리가 들렸다.
올 때는 한껏 조심해서 걷더니, 자신들이 낸 소리에 놀라 도망가다니.
‘세빈이 아니면 지환이겠네. 아니, 둘 단가?’
적절히 도망갔을 때까지 기다린 힘찬이 연습실 문을 열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 뭐야. 진짜….”
까만 봉투 사이에서 비쭉 자신을 드러낸 것은 아직 뜨거운 쌍화탕과 가벼운 군것질거리였다.
몸살이라고 했더니 나가서 사 온듯했다.
따뜻한 쌍화탕 병을 손에 쥐자 온기와 함께 계속 힘찬을 괴롭히던 통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귀엽다니까, 둘 다.”
바스락거리는 봉투 안에는 그것만 들어있지 않았다.
[아프면 안 돼! 잘 챙겨 먹어!
PS. 간식은 비밀이니까 몰래 먹어]
윗줄은 세빈이, 아랫줄은 지환이 적은 듯 글씨체가 달랐다.
자신도 모르게 히죽거리며 웃던 힘찬은 따끈한 병을 손에 꼭 쥐었다.
이러니 미워할 수가 있나.
같은 방을 쓰는 하준은 자다 깰 때마다 이불을 차고 자는 힘찬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잠결에 받은 토닥거림, 걱정스러운 한숨, 일어났을 때 늘 이불을 덮고 있는 자신.
영빈은 노래 연습할 때마다 유자차를 타 놓고 힘찬을 기다렸다.
꼭 따뜻하게 마셔야 한다면서 연습 시간에 맞춰 준비해주는 다정한 형.
경환은 틈만 나면 자신을 찾아다니며 자꾸 간식을 쥐여주었다.
주로 작업실에 있는 경환을, 개인 연습 시간에 하루에 서너 번씩 만나는 건 우연일 리 없다.
우묵하고 깊은 눈에 서린 걱정을 모를 수가 없다.
멤버들의 애정은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너무 깊어서 힘찬은 이제 걱정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이 사랑을 돌려줄 수 있을지, 이 사랑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을지.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기분에 가만히 서서 감정을 삼켰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찬이 덕분에 잘생긴 아들들이 이렇게 많이 생겨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얼마 전, 엄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늘 용감하고 멋진 우리 엄마.
몸이 아파서 그런 건지, 유난히 엄마가 보고 싶어져 통화버튼을 눌렀었다.
평소에는 자주 전화하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가족에게 의지하게 될까 봐.
가족과 원만하지 않은 멤버들도 있기에, 혼자 있을 때 가끔만 전화했다.
이런저런 투정과 칭얼거림을 다 받아주던 엄마가 통화 마지막에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다고.
부끄러움과 이상한 간질거림 때문에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툴툴거리며 끊었다.
그때 나도 엄마한테 고맙다고 말할걸.
다시 전화 걸기는 기분이 이상했기에 투정 부리지 말고 다음에는 꼭 고맙다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몸이 평소처럼 안 따라주고 자꾸만 아프니까 한동안 예민했었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은 늘 힘찬을 옥죄어오던 무거운 짐이었고.
애써 속으로 삭이고 억누르고 있었지만, 괜히 멤버들에게 툴툴거리기도 했다.
이유 없이 멤버들이 짜증스럽고 미워지기도 해서.
하지만 아프다고 예민하게 구는 자신을 보면서도 멤버들은 한결같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멤버들의 애정이 담긴 쌍화탕을 따서 삼키며 경환 형이 먼저 주었던 캐러멜을 입에 넣었다.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힘찬이 깨닫는 순간.
힘찬의 몸에서 시린 푸른 빛의 연기가 흘러나와 사라졌다.
“어?”
쌍화탕 덕분인지 축축 늘어지고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와, 이 쌍화탕 직빵이네?”
연기를 보지 못한 힘찬은 쌍화탕 병을 흔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 난 힘찬은 검정 봉지를 들고는 활기찬 걸음으로 복도를 뛰었다.
지환과 세빈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서.
* * *
“의외네. 생각보다 서로 믿음이 단단한 모양이야.”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여자는 테이블 위에서 통통 튀는 푸른 불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대놓고 건드리는 건 우리가 위험하니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여자는 ON 엔터에서 전해온 거절의 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여러 미사여구를 빼고 본질만 보자면, 상대를 믿을 수 없으니 광고도 투자도 거절한다는 말이었다.
내부부터 흔들려던 계획이 물 건너갔지만, 여자의 얼굴에는 조그만 미소가 떠올랐다.
“유리, 그들도 우리처럼 서로 믿고 있었나 봐.”
여자의 손바닥에 올라온 푸른 불꽃, 아니 타락한 요정 유리는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통통 튀었다.
“그래,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누구도 우리처럼 견고할 수는 없지.”
가장 비참한 순간, 자신을 찾아온 소원 요정 유리.
작은 새의 모습으로 다가온 유리는 성심성의껏 자신을 도왔다.
서로밖에 없었던 이들이기에, 둘은 누구도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도록 약속을 했다.
그러나 금기를 어겼다며 소중한 제 요정의 몸을 빼앗고, 둘을 억지로 떼어놓은 그들.
여자의 소원은 이번 생도, 다음 생도 언제까지나 제 요정과 함께 하는 것인데.
여자는 그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고, 언젠가 유리에게 몸을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이 작은 요정이 얼마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신을 위해 노래했는지 기억한다.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며 이제는 푸른 불꽃의 모습을 한 유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내 요정님. 우리는 늘 이런 상황을 잘 헤쳐왔잖아?”
다시 유리를 만나기 위해 여자는 무수한 환생을 거쳤고, 이번에야 겨우 다시 온전한 자신이 되었다.
여자의 눈에도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그녀는 자기 요정을 해친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