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2)화 (422/456)

422. MORE & MORE(2)

진우는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 영화 촬영에 몰두하느라 그동안 지인들을 만날 시간도 없었다.

간간이 전해 듣는 소식들로 다들 무사히 잘 지내는 건 알고 있지만, 괜히 심술이 돋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아…. 나도 우리 병아리들이랑 놀고 싶은데.”

언래블과 시간을 보내면 묘하게 충전 받는 기분이 든다.

병아리들과 있으면 지치고 힘들었다가도 반신욕 하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풀어지니까.

그들의 고운 심성 때문이리라 짐작해보았지만, 늘 날카롭게 세워진 감각까지 흐물거리니 웃기기도 했다.

새벽이 이번에 언래블과 앨범을 낸다고 했을 때 부러움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나중에 가영이 진우에게 자랑해댈 걸 생각하면 벌써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가영의 연락은 받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진우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병아리들을 만나 힐링 받을 수 없으니, 비슷한 반신욕이라도 하면서 몸을 풀어볼 생각이었다.

이번 작품은 독립 영화를 선택했다.

예산이 빠듯한 탓에 평소 진우 몸값보다 훨씬 낮은 금액을 받았다.

하지만 뜨거운 물에 입욕제까지 풀고 몸을 담근 진우 얼굴에는 진한 만족감이 어려있었다.

돈은 많이 벌수록 좋다.

하지만 열심히 버는 이유는 이럴 때 자기가 하고 싶은 연기를 위해서였다.

쉬지 않고 작품에 들어갔고, 워낙 어릴 때부터 연기에 발을 들인 만큼 작품 목록이 빼곡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일했고 가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연기를 할 수 있으니 만족스러운 삶이리라.

맡은 역 때문에 극단적으로 살을 빼고 근육을 바짝 길렀더니 만져지는 몸이 다르다.

“이번 것만 끝나면 좀 쉬자….”

분장으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진우는 자신이 맡은 역의 분위기를 직접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몸을 관리해 최대한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 후에는 분장의 도움을 받는다.

“환이랑 했을 때 재밌었는데….”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늘어진 진우는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진우를 바라보던 초롱초롱한 눈동자, 잘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불타던 눈.

그리고 마음처럼 잘 안되자 분해하던 얼굴까지.

역시 지환은 기특한 후배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둘도 없이 착하고 귀여운 동생이라 예뻐했다.

하지만, 촬영장에서는 진우는 나름대로 엄한 선배였다.

물론 시무룩해지는 지환의 얼굴만 보면 금방 달래주었던 터라,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진우뿐이었다.

진우가 신기했던 건, 지환이 생각보다 훨씬 감정을 연기에 잘 녹여낸다는 것이었다.

‘도한겸’은 극단적인 감정 결핍 상태로 자라온 인물인 만큼 새로운 감정을 배워나가는 장면이 필수였다.

설종현과의 기묘한 관계, 그 중간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친동생 이은설.

극 중 도한겸이 진실을 깨닫고 엉망이 되어 흐트러지는 장면이 있었다.

양부의 목적, 그동안의 삶이 온통 거짓이었다는 것.

그중 꿈속 소녀인 여동생이 한겸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설종현을 통해 이것들을 알아가고 냉혹한 청부살인자의 얼굴에 금이 간다.

지환은 때려 붓듯 내리는 빗줄기 사이에서 영혼이 나간 듯 텅 빈 얼굴로 설종현을 바라본다.

[나는, 난 어떻게…. 난 뭐야, 형?]

자신을 손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얼기설기 어설프게 단어를 툭툭 내뱉는 지환.

덜덜 떨리는 손이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건 함께 몰입해있었던 진우도 알 수 있었다.

존재를 부정당한 도한겸은 비참함에 짐승처럼 울부짖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도대체 나는 누구냐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단단하고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았던 도한겸이 그날은 톡 치면 바스러질 모래 인형 같았다.

감정 씬을 찍으며 한 번에 OK 사인받기란 쉽지 않은데, 그걸 지환이 해냈다.

나중에 매니저에게 들으니 걱정된다고 촬영장에 왔던 박수영 작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고.

함께 촬영하는 내내 무척 즐거웠다.

여주인공 역의 은주도 호탕한 성격이라 촬영 내내 셋이 뭉쳐서 놀곤 했다.

‘DEAR’ 촬영은 몸이 힘들었지만 즐거웠는데, 지금 작품은 함께 하는 배우들이 날카로워서 지친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더 흔했는데 유난히 힘들다.

바로 직전 작품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촬영해서 지치는 줄 모르고 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진우는 놀고 싶은 것.

“진짜 이번 것만 끝나면 쉰다. 꼭!”

이렇게 오늘도 부질없는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긴 진우는 지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 *

무심코 집어 든 핸드폰에 온 진우 형의 메시지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우 형이 요새 힘든가 봐.”

“왜?”

“형이 뭐라는데?”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내밀자 동그란 머리통이 모여들었다.

“음, 형이 요새 힘든가 보네. 힘내라고 해줘야겠다.”

“커피라도 보내드릴까요?”

“이미 카페인에 절어 있을지도 몰라.”

진우 형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이상한 이모티콘과 함께 언래블이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형이랑 연기하자면서 형이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줄 테니 같이 하자고.

또, 언래블이 없으니 삶이 너무 황폐하다면서 집에 놀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평소와 달리 구구절절하고 어딘가 질척거리기까지 한 내용에 멤버들 모두가 내 말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형이 많이 힘든가 보다 하고.

세빈이는 형에게 커피라도 한잔 마시라며 커피 기프티콘을 보냈다.

곰곰이 생각하던 준이 형은 단 걸 먹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무언가 열심히 뒤적거렸다.

갑자기 멤버들에게 선물 더미를 받게 될 진우 형이 어리둥절할 걸 떠올리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형이 연기할 때 조금 멋있긴 하던데.”

그렇게 잠시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세빈이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와 내 무릎 위에 툭 하고 엎드렸다.

“그래? 그때만 멋있었단 거지?”

“그건 아니고.”

우물쭈물하던 세빈이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는 형이 노래하는 것도 좋고 곡 쓰는 것도 좋은데 연기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자기 딴에는 무척 많은 고민 끝에 한 말이라는 걸 알기에 가만히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 전, 준이 형과의 대화가 떠오르기도 했고.

“뭐어…. 그때 쫌 신기하긴 했지.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까 나도 좋았고.”

귀를 쫑긋거리며 세빈이 말을 훔쳐 듣던 찬이까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힐끔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경환 형에 그런 경환 형 등을 때리는 영빈 형.

이미 대화를 나눈 준이 형만 편안하게 웃었다.

멤버들이 내 눈치를 보는 건 여러모로 어색하다.

내가 멤버들 눈치를 보며 살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하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하나같이 내 입만 쳐다보고 있는 것도 즐거웠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준이 형과 나만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아마 영빈 형에게도 말하지 않은 듯했다.

준이 형은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이번 일은 아마 내가 직접 멤버들에게 말하고 싶어질 때 말하라고 두는 것 같았다.

“연기라…. 뭐, 하고 싶어지는 역이 생기면 하겠지?”

“그래! 하고 싶은 건 눈치 보지 말고 다 해버려!”

조마조마한 눈을 한 세빈이가 안쓰러워 마음을 살짝 흘리자, 찬이가 제일 먼저 외쳤다.

아이구, 저놈의 모지리.

저렇게 티가 나서 어쩌냐, 진짜.

“딱히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 아니니까 다들 걱정 안 해도 돼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둔 것뿐이니까.”

부스스하게 웃으며 멤버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봤다.

그제야 편안한 얼굴이 된 영빈 형과 세빈이.

찬이는 뭐가 그리 흥이 났는지 경환 형에게 붙어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경환 형은 찬이를 받아주다 한숨을 푹 내쉬며 쿠션과 함께 찬이를 굴려버렸고.

다시 거실은 평소처럼 엉망진창이 되었고, 세빈이가 먼지 난다며 둘을 러그 밖으로 밀어버렸다.

내 새끼, 이렇게 잘 자랐네.

잘했다고 세빈이를 토닥여주는 사이, 준이 형은 손뼉을 짝하고 치더니 멤버들을 향해 웃었다.

“자, 그럼 이 문제로는 이제 지환이 그만 괴롭히고 너희 다 들어가. 좀 자자.”

이제 어서 자고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내일은 그동안 기다려온 홍삼 광고를 촬영하는 날이었다.

* * *

종범은 한숨을 내쉬며 소현에게로 향했다.

지환에 관해 이모님께 물었고, 얼마 전 답을 받았다.

종범은 어려서부터 어르신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기에, 질문을 드릴 때까지만 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생판 남은 믿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평소엔 어지간한 일들은 바로 답을 주셨었는데, 이번에는 한참 만에 다시 부르셨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하고 걱정하며 찾아간 존이모님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서 챙겨주시는 이모님도 그사이 살이 쪽 빠진 것처럼 핼쑥했다.

그러면서 해주시던 말씀은 종범으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존이모님이 해주시는 말들은 듣는 당시에는 몰라도 상황이 되면 깨닫게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종범은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고 소현에게 그대로 모두 전했다.

의외인 건 소현이 오라고 부른 곳이 소현의 사무실이 아닌 정윤 실장의 사무실이었다.

유난히 정윤이 무서웠던 종범은 기합이 바짝 든 얼굴로 이야기했다.

“순환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흘러가게 두라고.”

“네. 존이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절대 혼자 두지 말 것, 꼭 여름 태생과 함께 움직일 것, 새로운 사람은 되도록 맞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자연스럽게 모든 게 정리될 거라고요.”

무언가 골치가 아픈지 정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고, 소현은 뺨을 긁적였다.

“이게 참.”

“아무래도 대표님한테 거절하라고 해야겠지?”

“네. 다른 걸 다 떠나서 저희도 의심쩍어했었잖아요.”

종범이 모르는 무언가 있는 모양인지 둘은 묘한 얼굴이 됐다.

잠시 종범을 잊은 둘은 무언가 고민하던 둘 중 정윤이 고개를 들어 종범과 시선을 마주했다.

“종범 매니저도 어차피 회사 소속이고 이미 발 담갔으니까 하는 말인데.”

종범은 저 말을 듣는 순간 발을 빼기는 글렀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힘들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뭔지 모르겠지만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가는 정윤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다.

“언래블에게 새 광고가 무척 좋은 조건으로 들어왔어요.”

급이 낮은 광고는 대부분 쳐내고 기존 계약 광고와 겹치는 분야도 쳐내고.

최대한 신중하게 고른 광고들과 일정만으로도 언래블의 스케줄은 빼곡했다.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휴식 시간은 사이 사이에 넣긴 했지만, 바쁜 건 어쩔 수 없다.

새벽과의 콜라보 앨범 발매 후에는 일본 앨범 발매와 팬 사인회가 있다.

그 후에는 홍콩을 시작으로 대만,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도는 아시아 투어가 예정되어 있다.

투어 마지막은 일본에서의 콘서트.

해외 활동을 위한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되어왔고,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간이 다가온 셈.

그사이에 새 광고라니 종범으로서는 시간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일본에서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인데, 무슨 일인지 현지 광고를 제의했더라고요.”

이어진 정윤의 설명을 들은 종범은 왜 정윤이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제품이지만, 어찌 되었든 일본 제품이니 국민 정서에 반할 수 있다는 점.

갑자기 광고와 함께 투자 관련해서 의견을 전달한 저의도 의심스럽다.

회사에서 다른 회사에 투자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한국 기업도 아닌 일본 기업이 갑자기?

언래블은 아직 일본 앨범은 한 장도 발매하지 않았고, 그쪽은 원래 굉장히 배타적이다.

특히나 한국인들에게는.

새로운 투자자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신나 했던 대표가 떠오른 건지 정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내가 못 살아, 진짜.”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네요.”

두 상사의 무시무시한 기운에 종범은 어서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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