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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1)화 (421/456)

421. MORE & MORE(1)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얼굴만 잠깐 보는 거니까요.”

간호사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에 연희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이제 공정한은 연희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하는, 그런 하찮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두 눈으로 확인하고 더 이상 자신과 동생의 인생에 그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동생과 밥을 먹으며 이야기 한 날부터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가 더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하찮은 인간임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로.

쇳내와 소독약 냄새가 건조한 공기를 타고 넘실거렸다.

쇳내인지 피 냄새인지 잘 모를 향이 거슬렸다.

쿵쿵거리던 심장은 되려 병실 앞에 서니 가라앉았다.

자꾸만 아빠가 찾아온다던 그는 폭력적인 행동과 자해 때문에 폐쇄 병동에 홀로 감금되어 있었다.

최근에는 그나마 조용해졌다고.

그렇게 마주한 그는 바짝 말라 초췌한 몰골이었다.

흐리멍덩한 눈과 흠칫거리는 몸.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하는 것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공정한 씨, 이러려고 그렇게 사셨어요?”

혈육을 부정하는 게 이렇게 쉽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자연스럽게 타인을 대하듯 낯선 지칭이 흘러나왔고, 마주하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지환이 이 사람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순간을 들었었다.

그 순간에도 이기적이었던 이 사람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이기적이다.

모든 죄를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실 도피를 택했으니.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연희에게 다가오려던 그가 간호사들의 제지에 막혔다.

잠시 지켜보는 동안에도 무어라 쉴새 없이 중얼거리는데 웅얼거리는 소리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드문드문 들리는 고양이나 아버지 이름으로 추측하건대, 아직도 그날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연희는 그 전에 열심히 생각했던 모든 말이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을 나가려던 연희는 마지막으로 공정한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희미한 연민이 떠올랐지만, 금방 녹아 없어졌다.

어차피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니까.

병원을 나서는 걸음은 들어올 때와 달리 가벼워졌다.

아주 오래된 고리가 이제야 끊어졌기 때문일까?

오래도록 고여서 썩어버린 진득한 감정을 당사자에게 주고 나왔기 때문일까?

문득 동생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님도.

이를 악문 연희는 이유 모를 눈물을 겨우 참아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연희와 지환의 집으로.

* * *

집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것이 귀찮아졌지만, 겨우 힘을 내어 씻었다.

씻고 나니 집 오는 내내 괴롭혔던 무기력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버릇처럼 동생의 방문을 열어본 연희는 온기 하나 없는 작은 방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환이 올 때마다 이 방에서 자곤 했지만, 평소 사람이 머무르지 않다 보니 방은 늘 서늘했다.

“옷이라도 좀 사다 넣어둘까.”

옷은 몇 벌 있지만 그사이 키가 자란 동생에게는 좀 작은 것 같았다.

집에 올 때마다 번거롭게 옷을 싸 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까.

어찌 되었든 이 집은 연희와 지환의 집인데, 집에 올 때마다 낯선 곳처럼 옷을 싸다녀야 하다니.

연희는 이전부터 그런 상황이 무척 못마땅했다.

자신의 방으로 건너간 연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쇼핑모아 사이트를 열었다.

동생이 이곳의 광고를 찍은 후부터는 이곳을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앙퀴라 옷은 많을 테니까 다른 걸 좀 볼까….”

옷을 많이 선물 받았다며 우쭐하던 모자란 동생이 떠올라 피식거리던 연희.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상세 페이지에 있는 언래블 멤버들의 사진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남들 다 클 때 얘는 뭘 한 거야.”

훌쩍 큰 멤버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동생이 이제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 손으로는 자기 머리를 헝클며 장난스럽게 웃는 지환의 사진.

분명 지환이 집에 왔을 때 편히 입을 옷을 사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연희는 언래블의 사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연희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진지한 얼굴로 옷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잘 때 입을 옷, 집안에서 돌아다닐 때 입을 옷, 외출복 등등.

지환이 봤다면 쓸데없이 돈 쓴다고 뭐라고 했을 테지만, 연희는 즐거운 마음으로 쇼핑에 몰두했다.

지금 말하면 자기 옷 많다고 빽빽거릴 테니 나중에 집에 오면 보여줘야지 하며 웃었다.

한바탕 신나게 쇼핑하고 나니 내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역시 자본주의 치료가 최고라며 중얼거리던 연희는 책상 옆, 책장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언래블의 포토 카드를 모아둔 파일을 넘겨보며 동생이 조잘거렸던 현장의 일들을 떠올렸다.

사진만 보면 이렇게 멋있는 애들이 없는데, 동생 얘기를 듣고 있자면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져내렸다.

파일을 천천히 확인하고 난 후에는 침대 밑 서랍을 열었다.

그 아래 고이 숨겨져 있던 언래블 굿즈들.

지환이 혹시라도 방에 들어와도 알 수 없도록 침대 밑에 숨겨두었다.

한쪽에는 연희가 직접 산 굿즈가 있었고, 한쪽에는 포장지도 뜯지 않은 새 물건들이 있었다.

포장지에 쌓인 것들은 지환이 챙겨다 준 것들이다.

굿즈 나왔다고 신나서 방방 뛰던 모습은 영락없이 어릴 때 모습이라 무척 귀여웠다.

어릴 때도 지환은 기분이 좋으면 신나서 폴짝거리며 연희 주변을 맴돌았다.

조막만 한 게 연희 다리에 매달려 해사하게 웃을 때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나이 차 많은 동생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었다.

빽빽 울기도 하고 이상한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머리가 다 큰 연희가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동생의 투정에 엄마에게 짜증도 냈었다.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흔들흔들 갸우뚱거리며 걷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라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하나뿐인 동생이 애틋해졌다.

누나랑 잔다고 조그만 게 뽈뽈대고 와서 옆구리에 착 붙을 때, 엉망으로 탄 볶음밥도 맛있다고 먹던 때.

누나가 좋다고 이빨 빠져서 못생긴 주제에 해사하게 활짝 웃던 어느 날.

모두 연희의 기억에는 콕콕 박혀있었다.

굿즈를 하나씩 꺼내서 만져보다, 그 옆에 다른 서랍을 열었다.

얼기설기 조잡한 실력으로 만든 카네이션, 삐뚠 글씨로 ‘사랑하는 누나에게’라고 쓴 편지.

소복하게 쌓인 어린 시절 동생의 선물들.

선물과 편지는 오랜 공백 후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이거 하든지’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쓴 하얀 봉투.

문구와 달리 글씨는 동글동글하고 신중하게 쓴 태가 났다.

원래는 악필이던 동생이 열심히 연습해서 교정한 글씨임을 익히 알기에 헛웃음이 흘러나왔었다.

그 건방진 봉투 안에는 짧은 편지와 돈이 들어있었다.

정산받았다고 몰래 집에 놓고 간 봉투를 쥐고 울컥해서 울기도 했었다.

돈도 편지도 봉투에 그대로 들어있다.

그 애가 어떤 고생을 하면서 버는 돈인지 아는 데 쓸 수 있을 리가.

최근 지환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어릴 때처럼 근심 없이 웃고, 누군가를 입에 올리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다.

창문과 커튼 사이로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처럼 포근하고 밝은 느낌.

그 아이가 문득 자기 손을 떠났다는 생각에 슬퍼졌던 날도 있었다.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어머니와 아버지 영정 앞에서 다짐했지만, 연희는 잘 해내지 못해 괴로웠다.

하지만 자신이 정한 틀을 강요하는 게 올바른 일이 아니라는 걸 연희도 안다.

어쩌면 그때 반대하지 않고 응원해줬으면 덜 힘들지 않았을까.

고요한 집에 있을 때면 온갖 생각들이 연희를 잠식해간다.

날카롭게 외치던 지환의 얼굴,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 늘 초조하게 쫓기듯 살던 내 동생.

나풀거리던 생각들을 깨트려버린 건, 익숙한 진동이었다.

“내 정신 좀 봐.”

화들짝 놀란 연희가 무거운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책상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 보물 [누나, 뭐해?]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걸 아는 건지, 말썽꾸러기 동생이 연락을 해왔다.

피식거리며 웃던 연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을 보냈다.

[집 정리. 왜?]

내 보물 [그냥. 밥 먹었어?]

뭔가 할 말이 있는 건지 우물쭈물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가 몇 번 오가다 갑자기 화면에 무언가 불쑥 떠올랐다.

선물과 메시지가 왔다는 메시지가 적힌 케이크 사진.

유명 브랜드의 케이크였다.

[뭐야?]

내 보물 [이거 맛있더라고.]

평소라면 뭐 하러 이런데 돈 쓰냐고 했겠지만, 연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필시 자기가 먹어보고 맛있어서 자기 딴에는 고민하다 보냈을 게 뻔했다.

내 보물 [누나 이런 거 좋아하잖아.]

답이 없자 혼자 뭐에 찔렸는지 또 메시지가 왔다.

혼자 우물쭈물하고 있을 게 눈에 훤해서 웃어버렸다.

[고마워. 안 그래도 한번 사 먹어볼까 하던 건데.]

내 보물 [?]

[왜]

내 보물 [누나 맞지?]

[뭐 인마?]

내 보물 [아, 누나 맞구나ㅋㅋ… 응. 나 이번 주말에 집에 갈 건데 바빠?]

좋게 말했더니 이놈의 동생 새끼는 누나 맞냐고 물어오기나 하고.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해야 하나 보다.

연희는 이번 주말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에게 약속을 미루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안 바빠. 몇 시에 오는데?]

약속을 미루자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친구가 펄펄 뛰었다.

얼굴 보기 왜 이렇게 어렵냐며 투덜거리는 친구에게 동생이 온다고 말하자 한숨을 쉬며 이해해주었다.

자주 못 보는 걸 아는 친구라 다행이었다.

꼭 비싼 밥을 사겠다며 친구를 달래면서도 지환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메시지를 보냈다.

이 버릇없는 동생 놈은 연희가 친구도 없는 줄 알지만, 나가는 게 귀찮을 뿐 친구가 없는 건 아니다.

도대체 자신을 뭐로 보는지 모르겠다며 홀로 투덜거리던 연희는 냉장고를 확인했다.

혼자 살아도 밥은 잘 챙겨 먹는 연희기에 이것저것 반찬은 있었지만, 과일이 없었다.

“키위 시켜야겠네. 샤인 머스캣이랑… 아니다. 그냥 장을 좀 보자.”

연희는 과일을 잘 챙겨 먹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지환은 과일을 좋아하니까.

지환이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리니 온통 고기뿐이라 혀를 차며 마트 앱을 열었다.

“그렇게 자꾸 고기만 먹으니까 키가 안 크지. 어휴.”

입으로는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이것저것 찾아보며 장바구니에 담는 손은 무척 신나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연희는 동생에게는 이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 * *

여자는 눈앞에 흔들거리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잘 안됐어? 어쩔 수 없지 뭐. 그들은 원래 질기잖아.”

불꽃이 화가 난 듯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팔딱거리며 튀어 올랐다.

“괜찮아. 어차피 한순간에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 안 했잖아.”

여자의 말에 팔딱거리던 불꽃이 화르르 덩치를 키웠다가 다시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뭐가 그리 분한지 씩씩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 거 아냐? 이렇게 소원 요정을 마주한 게.”

여자는 불꽃을 달래듯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화르르 피어오르던 불꽃은 애교라도 부리듯 여자의 손을 감쌌다.

불꽃의 형상이었지만, 그 본질은 불이 아니기에 여자를 상하게 하지 않았다.

여자는 애틋하고 소중하다는 듯 불꽃을 다독였다.

긴 시간 그들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던 여자의 요정은 몸을 잃었다.

언제나 어떤 세상에서도 자신의 편이 되어준 유일한 존재.

많은 삶을 되풀이 하느라 그런 존재가 있었다는 걸 잊었다.

그런 삶에서조차 자기 요정은 늘 자신의 곁을 지켰다.

이번 생에 기억을 찾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천천히 하자. 어차피 우리한테는 늘 시간밖에 남는 게 없잖아.”

푸른 불꽃은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기분 좋은 듯 춤을 추었다.

여자는 많은 것을 기억했다.

최초의 삶과 그 마지막, 그리고 약속도.

여자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언래블의 사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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