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0)화 (420/456)

420. Decalcomanie(5)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건조하게 돌아가는 공기청정기.

미약한 소음 사이로 맑은 웃음소리가 넓게 퍼진다.

손톱으로 ‘톡’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파르르 몸을 떠는 연약한 이파리처럼.

꼭 그렇게 예민한 성정을 지녀놓고도 어떻게 저렇게 웃고 다닐 수 있을까.

하겸은 태블릿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언래블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화면에서는 언래블 스토리의 미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 으아아! 저리 가!

- 싫은데? 싫은데?

도대체 저 병아리들은 어디서 저런 체력이 나오는 걸까?

분장한 힘찬이 기겁하고 도망치는 환이를 쫓아가고 있었다.

원래 하겸은 애들 영상을 딱히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다.

그저 위캠을 뒤적거리며 눈에 걸리면 보는 정도.

화면 속 언래블은 하겸이 아는 언래블과 미묘하게 달라 끌리지 않았다.

실제로 마주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들만의 포근하고 말랑한 분위기가 하겸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희한하게 긴장이 풀린다고 해야 하나.

하준과 라디오를 할 때도 은은하게 그런 분위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촬영을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을 감춰놓고 움직이는 병아리들은 끌리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하겸이 언래블 영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건 한가영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한바탕 소동 후, 그 뒤로 별다른 연락도 없이 평소의 관계로 돌아갔다.

그 망나니 같은 새끼는 언래블이라는 쿠션이 있을 때만 마주하고 싶은 놈이니까.

그놈이 보낸 영상은 새벽과 촬영한 언래블의 자체 제작 영상이었다.

가영에게 들려 종잇장처럼 팔랑거리며 살려달라고 우는 지환의 모습은 조금 충격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휙 들려서 가볍게 흔들릴 일인가?

객관적으로 지환의 키가 그렇게 작지 않은 편인데.

그 영상 링크 아래 한가영의 메시지는 일종의 도발이었다.

미친자 [너는 이런 거 안 해봤지?]

처음에는 애를 들고 흔들어서 울리는 걸 말하는 건가 싶었다.

역시 미친 자다운 발상이라고.

하지만, 가영의 발언은 언래블과 자체 콘텐츠를 함께 촬영할 정도의 친분이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애새끼 같기는.”

혀를 차며 쓸모없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 영상 이후 이것저것 눌러보니 DCL과도 촬영했었다.

아무래도 동기 중에 가장 친한 그룹이 그들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워낙 ON 엔터 대표와 새벽의 인연은 유명했으니까.

저런 얕은 수작에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뜸 가서 같이 촬영하자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어딘가 뒤틀리는 심기를 꾹꾹 누르며 다른 영상도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는 게 제법 귀엽기도 했고, 마침 그때 하겸은 할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틈날 때마다 언래블 영상을 보며 혼잣말하는 경지에 이르렀던 어느 날.

추천 영상에 ‘무인도 패밀리 관계성(쟈근환망태기)’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무인도 패밀리라면 새벽과 언래블, 여진우를 뜻한다는 건 하겸도 안다.

영상을 제작한 사람은 언래블의 팬인 듯싶었다.

활동 초기부터 함께한 새벽과 여진우가 언래블과 얼마나 사이좋은지가 흘러나왔다.

그 영상을 본 하겸은 이유 모를 불쾌감이 가슴을 콕 찔렀다.

언래블의 첫 방송은 자신과 함께한 라디오인데.

왜 자신이 새벽이나 여진우보다 뒤로 밀리는지 괜히 기분이 나빴다.

골든 아워와 언래블이 단체로 뭉친 적이 많지 않을 뿐이지, 개개인들은 늘 연락하며 지낸다.

당장 어제만 해도 얀이 힘찬이 보낸 영상이라며 숙소 영상을 보여줬다.

짧은 영상에서 영빈은 하준에게 쿠션을 던지며 짜증을 냈고, 그 쿠션을 대신 잡아챈 경환이 웃었다.

지환은 흐물흐물해져서는 태평하게 러그에 늘어져 있었다.

막내 세빈의 안마를 받으면서.

이런 사적인 모습도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 게 우린데.

자기도 모르게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된 하겸은 이게 다 그동안 너무 바빴던 탓이라 생각했다.

한동안 각자 스케줄이 바빠 병아리들을 보지 못했다.

노는 건 좋지만, 일단 일도 해야 하니까.

무엇보다 멤버들이 멜트 애들을 도우라고 하도 성화여서 뒤처리에 시간이 좀 걸렸다.

‘특별히 악감정이 있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에드의 일탈은 회사 내에선 그렇게 정리되었다.

다행히 에드가 발을 들이밀었다는 부분은 전체에 비하면 매우 작은 조각이라 가능한 수습이었다.

당사자들이 알고 하겸도 알지만, 멜트 멤버들을 위해 그렇게 서로 적당히 입을 맞추었다.

더군다나 당사자인 지환이 ON 엔터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왔다.

그 과정에서 계약위반에 따른 보상금이 조금 줄어들었고, 에드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정리됐다.

하겸이 회사와 에드 사이에서 중재한 덕도 있었고.

그 뒤로 에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했다.

오죽하면 막내 단우가 얀을 언래블에게 며칠 보내자고 했을까.

천둥벌거숭이 같은 얀이 지환에게 교육받으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단우의 그런 욕망은 인하의 단호한 한마디에 좌절됐지만.

‘그걸로 될 인간이면 힘찬이 제일 먼저 변하지 않았을까?’

절로 숙연해지는 발언이었다.

골든 아워에 얀이 있다면, 언래블에는 힘찬이 있다.

둘 다 에너지 과잉형이라 신나서 날뛰기 시작하면 주변이 초토화된다.

그나마 힘찬이 지금처럼 선을 잘 지킬 수 있게 된 것도 하준과 지환의 교육 때문이라 했다.

그전까지는 자신도 감정이 날뛰어서 많이 힘들어했다고.

하겸은 개인적으로 지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왜 에드를 용서해주었는지.

왜 손해를 고려하면서 그를 감싸준 건지.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하겸의 가치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선택이다.

목을 벨 수 있으면 단칼에 베내야 하고, 단칼에 칠 수 없다면 가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겸은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테니까.

그때 지환은 알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신도 절벽 끝에 매달렸을 때가 있었고, 누군가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거라고.

그러면서 자기는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받은 대로 주는 것뿐이라 했다.

그렇게 따져도 에드가 그들에게 준 건 피해뿐인데 싶었지만, 하겸은 곧 이해했다.

지환은 에드를 ‘박화영’ 개인으로만 보는 게 아니었다.

멜트의 막내이자 골든 아워의 후배.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에드가 아무리 잘못했다 쳐도 멜트 입장에서는 단칼에 쳐내기 어렵다.

그동안 함께 지낸 세월이 짧지 않으니까.

그 후의 일들까지 모두 생각하고 대응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하겸은 지환에게 더 흥미가 생겼다.

마냥 순하고 뽀짝거리는 병아리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잖아?

하겸은 몇 번 멜트 애들을 통해 에드의 근황을 들었다.

방송용 캐릭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박화영은 확실히 변해가고 있다고 했다.

형들을 존중하고, 사소한 것들을 챙기고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고.

신경질적이고 날카롭던 모습도, 사람을 은근히 나눠가며 대하던 모습도 사라졌다고 했다.

말수가 줄어들고 수척해진 것은 걱정스럽지만, 그건 차차 나아질 것 같다고.

무엇보다 막냇동생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 후로 에드는 종종 지환에게 연락해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무언가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고 들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거나, 촬영 갔던 지역의 특산품 같은 것들을.

이전의 에드를 아는 모두가 듣고도 믿지 못할 이야기긴 했다.

누가 보면 박화영의 영혼이 바뀐 줄 알았을 것.

“그래도 한 번쯤은 뭔가 딱 뇌리에 꽂힐 뭔가를 하고 싶은데.”

대놓고 들이대는 캐릭터는 한가영 한 명으로도 애들에게 버거울 게 뻔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친근하고 듬직한 형 자리를 노리는 게 낫지 않나.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하겸은 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귀염둥이 뭐함?]

언래블 멤버들이 단우를 유독 좋아하던 게 떠올랐다.

나이 차가 가장 적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우의 솔직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 마음에 든 건지.

하겸이 생각하기에도 우리 막내가 매력적인 사람이긴 했다.

“찬이가 단우랑 꽤 친하지?”

직접 공략보다 방어벽이 말랑한 곳부터 차근차근 공략해가는 게 여러모로 성공률이 높다.

“귀염둥이라고 했다고 씹는 거 봐라. 이러니 귀엽다고 하지.”

세상 질색하며 핸드폰을 멀리 던져뒀을 막내를 떠올리며 하겸은 즐겁다는 듯 웃었다.

다른 팀 형도 좋지만, 일단은 내 동생부터 꼬셔야지.

* * *

“강세빈!”

“…하.”

세빈은 신나서 뛰어오는 재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준과는 좋지 못한 시작이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주변을 맴돌더니 결국 사과하며 다시 친구가 돼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눈이 시뻘게져서는 목소리는 금방 꺼질 것처럼 희미했었다.

버석하게 부서질 것처럼 건조하고 지루했던 학교생활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 재준은 얼마나 긴장했던 건지 교복 셔츠 끝을 꽉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솔직히 세빈은 재준이 다시 말을 걸어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작은 소동이었고, 그런 일들은 발에 챌 정도로 흔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 후로 언래블도 회사도 아무런 모션을 취하지 않았고, 금세 묻혔다.

그러니 재준도 당연히 어물쩍 넘어가고 모른 척할 거라 생각했다.

멤버들은 세빈이 상처받을까 직접 말을 꺼내진 못하고 전전긍긍했지만, 세빈은 괜찮았다.

세빈의 세계는 작지만 무척 견고해서 그런 일에 흔들리지 않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그건 어릴 때부터 무척 명확한 일이었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유 없는 미움이 당연한 세계에 발을 들이민 순간부터 조금씩 세빈도 마모되어갔다.

그럴수록 사람이 더 무서워졌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어려웠다.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울면서 버티던 세빈은 형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삶의 우선순위를 고를 수 있게 되었고, 사람은 무섭지만 모든 사람이 무섭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나를 상처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나를 내어줄 필요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한 세빈을 지키기 위해 형들이 고군분투하는 걸 보며, 앞으로는 자신이 그들을 지켜주고 싶어졌다.

이제는 세빈보다 작으면서도 늘 세빈을 볼 때면 세상을 녹여낼 것처럼 웃는 지환이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세빈은 일전 키스에게 물었었다.

어떻게 하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누군가를 지키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때 키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고 세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 너를 지킬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도 지킬 수 있게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세빈의 작은 심장에 콕 박혔고, 뿌리를 내리고 온몸으로 가지를 뻗어나갔다.

세빈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형들로부터 비롯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준은 공평함을, 영빈은 자애를, 경환은 단호함을 가르쳐주었다.

힘찬은 열정을, 지환은 절대적인 신뢰를 알게 해주었다.

숨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손톱만큼씩 매일 자랐고, 이제는 타인의 사과를 곡해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뭐가 급해서 맨날 그렇게 사라지냐?”

“형들이 기다릴까 봐 그러지.”

재준은 투덜대면서도 자연스럽게 세빈의 곁에 서서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 내의 소문, 자신이 들은 연예계 소식 등 은근히 아는 게 많았다.

“하긴, 우리 형들이 너희 형들만큼 했으면 내가 업고 다녔다.”

“뭐래.”

재준도 언래블 멤버들의 유난한 막내 사랑을 익히 아는지라 씩 웃으며 세빈을 툭툭 건드렸다.

장난치는 걸 알지만, 세빈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교문 근처에서 힘찬이 지환에게 무어라 장난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환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면서도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세빈이 사랑하는 행복한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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