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19)화 (419/456)

419. Decalcomanie(4)

“촬영 시작이 언제부터죠?”

“다음 주부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잠시만요.”

소현과 정윤은 수북한 서류 더미를 뒤적여가며 각자 노트북에 이것저것 메모하고 있었다.

“정확히 목요일부터 촬영 시작이네요.”

“우진이랑 종범, 두 분이 함께 가는 거죠?”

“네. 저도 갈까 했는데 과한 것 같아서 전 남기로 했어요.”

최근에 갑자기 일이 몰려들어서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일정 사이에 여행 예능을 끼워 넣으면서 가뜩이나 빠듯했던 일정이다.

앨범 두 개를 동시에 준비해야 했고, 주기적으로 올라가는 자체 리얼리티도 계속 촬영해야 하니까.

그 와중에 드라마 홍보까지 한발 걸치게 되었더니 정신없음이 두 배가 되었다.

“애들 광고 어디 어디 들어왔다고 했죠?”

“의류는 앙퀴라랑 겹치는 곳은 제외했고, 건강제품도 허니비가 있어서 뺐어요.”

“홍삼 제품 광고는 하나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지환이가 좋아하겠네요. 여기 리스트요.”

허니비는 홍삼 쪽은 거의 발만 살짝 걸치고 있는 수준이었다. 주력 제품이 아니다 보니 다른 회사를 받아도 탓하지 않으리란 판단이었다.

소현이 건넨 리스트에는 회사 평판과 그간의 사건·사고 내용, 제시 금액 등 자세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리 금액을 많이 불러도 벌써 때를 묻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

광고시장에서 언래블의 몸값이 차근차근 높아졌다.

허니비와 앙퀴라 광고로 언래블 팬들의 시장성은 충분히 보여주었다.

드라마 덕이라고 해도 지환은 개인 광고도 찍었고, 진성과 둘이 광고를 찍기도 했고.

아직 초대형 팬덤을 지닌 그룹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2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안에 이렇게 가파르게 성장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건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조금 찝찝하지만, 그 기회도 영리하게 잘 써먹었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당시에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에 출연을 결심한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한 선택이었다.

아이돌 팬덤의 충성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지만, 그 풀이 한정적이라는 게 늘 한계처럼 다가온다.

그러니 예능 판에 그렇게 쫓아다니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만들려 애쓰는 편이고.

하지만 신인을 받아주는 예능은 의도도 내용도 대부분 뻔했다.

그걸 아니까 ON 엔터에서는 그런 예능으로 애들을 돌리지 않았다.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자고 서로를 다독이던 그때 벌어진 사건들.

흉기 난동 사건은 일반인이 벌여도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다.

막지 못해서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최대한 잘 써주는 게 회사의 할 일.

알뜰살뜰하게 잘 써먹었고, 덕분에 언래블의 이름값이 훌쩍 뛰었다.

동정과 호감은 종이 한 장 차이고, 사람은 익숙한 것들을 선호한다.

이왕이면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광고하는 물건을 선택하는 것도 그런 심리 때문이니까.

“대충 일정은 정리된 것 같고, 애들 얘기를 해볼까요?”

종이와 노트북을 바라보느라 피곤해진 눈두덩을 꾹꾹 누르던 정윤 실장은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정을 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여태까지 다른 소속 연예인들처럼 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자라는 걸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더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너무 잘 자라주고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더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거겠지.

“서포트 팀 의견은 서류에 정리해두었고, 제 생각에는….”

소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멤버들 한 명, 한 명 틈이 날 때마다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준을 통해 멤버들의 목소리를 대신 듣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직접 말할 때와 하준을 통해 들을 때의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꽤 신뢰를 주었다고 생각했는데도 회사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기색이 보였다.

최소한의 방어기제라는 걸 알아도 눈치챘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서운했다.

“큼, 하준은 최근에 프로듀싱 관련해서 의욕을 보입니다. 외부에서 찔러보는 경우도 부쩍 늘었고요.”

“찔러보기만 해요?”

“아뇨, 곡을 팔아달라는 요청도 종종 들어와요. 특히 솔로 발라드 가수들의 협업 요청이 많은 편이죠.”

“경환이 쪽은요?”

팀 내에서 둘의 포지션이 비슷하다.

다만, 둘이 만드는 곡의 느낌은 사뭇 달라서 처음에는 듣기만 해도 이게 누구 곡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정윤의 물음에 소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게, 음. 둘에게 들어오는 작업 제의는 비슷합니다. 한데 종종 의외의 요청이 있어요.”

“어떤 요청이요?”

“자기들 곡을 좀 봐달라는 그런 요청이요.”

소현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태까지의 앨범에 멤버들의 손이 많이 닿아있는 건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결과물이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하준이나 경환이 성공할 곡을 잘 고른다는 이상한 소문.

둘이 주로 프로듀싱을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오해를 하는 듯했다.

그 말을 들은 정윤의 표정도 오묘해졌다.

“사람들이 제대로 오해하고 있네요.”

“네. 촉이 좋은 건 환이랑 세빈인데 말이죠.”

둘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힌 순간, 둘 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준이나 경환의 작곡, 프로듀싱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가장 잘 찍는 게 지환이다.

곡에 대한 본능적인 감은 세빈이 가장 뛰어나고, 지환은 어떤 계산을 바탕으로 한 촉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그렇고, 곡에 대해서도 그렇고.

언래블 멤버들은 기본적으로 촉이 좋았다.

그래서 방송 관계자들에게 크게 밉보이지 않고 있었다.

기본 예의도 바르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한다고 해야 할까.

장난과 재미, 버릇없음과 건방짐의 경계를 잘 구분 지었다.

특히나 경환이나 힘찬, 세빈이 이렇게 막내 라인이 그걸 잘했다.

“아, 요새 찬이가 조금.”

“음?”

멤버들의 개인 스케줄과 현재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던 소현은 힘찬을 언급하며 눈가를 찌푸렸다.

“힘찬이 왜요?”

“뭔가 기운이 쭉 빠져있는 것 같아요.”

“찬이 가요?”

정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되물었다.

가장 에너지 넘치는 멤버 하면 누구나 힘찬을 고를 정도로 마스코트 같은 아이다.

흔한 감기도 잘 안 걸리던 애가 갑자기?

“티를 안 내려고 하는데 몸살이 좀처럼 낫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 병원에 보냈어요.”

“언제부터죠?”

“일본 방문했을 때 자유시간 줬더니 혼자 숙소에서 쉬었거든요. 냉방병인 것 같다고 약 먹고 쉬더니 괜찮아졌었는데, 그 뒤로 묘하게 컨디션이 안 좋아요.”

둘 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앞으로도 체력적으로 버거울 만한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제대로 관리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일단 우진 매니저 붙여서 병원 보냈으니 돌아오는 대로 이야기해볼게요.”

“크게 아픈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언래블은 멤버 간의 유대가 강한 만큼, 누구 하나가 약해지면 멤버들 전체가 흔들린다.

지환이 다치고 아플 때마다 멤버들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언급하는 건, 입 아픈 이야기다.

서로 영향을 끼치는 만큼 멤버들은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했다.

게다가 성격도 점점 서로를 닮아가고 있어서 가끔 애들을 보고 있으면 웃기기도 했고.

경환은 하준과 영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전 경환을 생각하면 그가 누군가를 신경 쓰고 챙겨주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찬이는 은연중에 지환을 동경했는지 지환의 섬세함과 차분함을 배워갔다.

반면, 세빈이는 하준과 힘찬, 지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덕분인지 세빈의 장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고 지환이 한숨 쉬던 것도 떠올랐다.

서로 좋은 점만 닮으면 바랄 게 없건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현은 피식 웃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 힘찬이 아프다니.

원래 안 아프던 애들이 한번 아플 때 크게 아프다는 말이 있었다.

정윤은 문득 그 말이 떠올라 유난히 걱정스러웠다.

“애들 지금 약은 뭐 먹고 있죠?”

“공통으로 먹는 건 허니비 측에서 제공한 영양제고, 경환이 어머님이 보내신 호박즙을 경환이랑 찬이가 먹고 있어요.”

“지환이는 홍삼 여전히 달고 살고요?”

지환이를 언급하며 둘 다 겨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워낙 기초 체력이 떨어지는 애라 홍삼을 챙겨 먹고 있으니까.

이번 홍삼 브랜드 광고도 지환이 덕분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윤은 바쁜 게 한바탕 지나가면 애들 건강검진을 한번 해보자며 일단 마무리 지었다.

가뜩이나 몸 축나는 일을 하는 애들이니 미리미리 챙겨서 나쁜 건 없다.

더불어 몸에 좋은 게 있으면 조금 더 챙기고, 한동안은 체중 조절보다 잘 먹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영빈이는 요새 어때요?”

“한동안 기운이 없었는데 슬럼프는 잘 넘긴 것 같아요.”

이번 그믐달 앨범이 시작하기 전, 영빈은 다시 성장이 막힌 듯하다며 힘들어했다.

보컬 트레이너와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고.

그런 영빈을 위해 정윤은 직접 면담을 진행했고, 하연수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정윤보다는 선배인 하연수가 더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었다.

중간중간 가영이 영빈에게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가영은 기본 성정이 제멋대로긴 하지만, 언래블을 아끼고 있었다.

소현이 에단을 만나러 회사에 방문한 가영을 붙들고 이 문제를 이야기했고, 가영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영빈은 워낙 정석대로 자라온 보컬이라 경험이 더 필요하다는 게 하연수와 한가영 둘의 의견이었다.

그때부터 영빈은 개인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영빈은 연습, 스케줄, 동생들 연습 봐주는 것 외에는 개인 시간을 거의 갖지 않았다.

그나마 숙소에서는 쉬면서 책도 읽고 한다지만 아주 잠깐뿐이었다.

다행히 선배들의 조언과 적절한 휴식이 어우러지자 영빈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

그렇게 소현과 정윤은 꽤 오래도록 멤버들의 현재 상태와 건강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있다고는 하나, 멤버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숨기는데 능했다.

자신을 온전히 내놓고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는 걸 알면서도 둘은 내심 그런 상황이 씁쓸했다.

이래서 너무 정을 주면 안 되는데.

비즈니스와 친애의 경계를 긋는 건 언제나 너무 힘든 일이라며 소현이 푸념했고 정윤은 웃었다.

“그럼 얼추 정리된 건가.”

“네. 일단 급한 건 다 이야기한 것 같네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상황이면 무난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애들이랑 얘기하다 알게 된 건데.”

“응?”

“경환이 생일이 호적에는 잘못 올라갔다고 하던데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정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에 경환이 친부가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바로 호적에 못 올려서 생일이 두 달 늦춰진 거라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년이 바뀌진 않았네.”

정윤은 소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전에 대표님이 점 봐오신 거 있잖아요.”

“아, 그거.”

정윤은 종교에 관한 믿음도 없었고, 이상 현상도 믿지 않는 편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때 여름 태생을 이야기한 게 찬이가 아니라 경환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일본에 별문제 없이 다녀왔잖아.”

정윤은 유달리 조심스럽게 말하는 소현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에도 이런 이야기를 언급하는 사람이 아닌데.

여태까지와 다른 근심 어린 얼굴이라 정윤은 조용히 소현의 말을 경청했다.

“휴, 종범 매니저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가 조금 있는데요.”

근심 가득한 소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의외의 것들이었다.

“불꽃을 봤다고?”

“네. 그게 일본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인대요.”

“애가 요새 좀이 좀 허한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대표님이 전에 들은 말이 있고 해서 저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제야 정윤도 그때 대표가 불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워낙 장난기 많은 애들이라 혹시 하는 마음에 음식 프로 같은 곳에서 문제가 생기나 했던 건데.

이전에도 막내들이 밥을 해본다고 했다가 숙소를 태워 먹을 뻔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런 류 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불꽃을 봤다는 지환의 말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지환이가 직접 말한 거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정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뇨. 종범 매니저 통해서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집안이 그쪽으로 유명하다더라고요. 종범 매니저는 보거나 그런 건 아닌데 지환이가 이야기했대요. 지환이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숨길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보고한다고 했어요.”

우진 매니저의 지인이라 어느 정도 믿고 있었지만, 혹시 애한테 수작을 부리는 건가 싶어 되물었다.

“괜히 애한테 헛바람 넣은 건 아니겠죠?”

“네. 개인적으로 종범 매니저를 캐봤는데 이상한 종교나 그런 쪽에서는 깨끗해요.”

간혹 사이비 종교나 일부 무속인이 주변인을 통해 연예인을 꾀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인지를 묻는 말에 소현이 단호하게 답하자 정윤은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대표님께 제가 말해볼게요.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

“네.”

둘의 얼굴에는 어느새 언래블에 관한 근심 걱정이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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