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Decalcomanie(3)
제단처럼 만들어진 조형물 근처에 가영 형, 세비 형, 준이 형이 각자 자세를 잡고 앉아있었다.
제단에 걸터앉아 사과를 손에 쥔 가영 형.
제단에 놓인 싱그러운 꽃과 과일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세비 형.
와인잔을 위태롭게 손에 쥐고 웃고 있는 준이 형.
제단 바로 아래에는 나와 경환 형이 앉아있었다.
서로에게 기대 나른하고 졸린 듯한 얼굴로.
그런 우리 손에도 붉은 사과와 안개꽃이 들려있었다.
“좋습니다, 경환 씨, 고개 살짝만 더. 네, 진짜 졸린 거 말고요!”
나른하고 유혹적인, 표정을 지으라는데 그런 표정을 알 길 없는 우리가 최대한 궁리한 게 이 정도였다.
몇 번이나 거울을 보고 연습하고 형들에게 조언을 구해 겨우 표정을 만들었다.
경환 형은 눈을 반만 뜨고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라는 지시에 그렇게 했다.
다만, 너무 멍해서 졸린 얼굴처럼 보인다고 지적받긴 했지만.
눈을 내리깐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 콘셉트로 하지 말자고 그렇게 반대했는데.
팬들이 좋아할 거라는, 확신에 찬 가영 형의 말에 혹한 게 문제였다.
여태까지 무거운 주제만 노래했던 우리가 바로 전 앨범에서는 처연한 사랑을 노래했다.
물론 처음 의도와는 많이 떨어져서 슬펐지만, 솜뭉치들이 좋아해 줬으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노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번 콜라보 앨범에서 우리는 그간 고착되어 있던 역할에서 벗어나 마음껏 노래 불렀다.
‘한계를 긋지 않는다’는 말에 걸맞게 색다른 걸 해야 하지 않냐는 가영 형의 의견이 그럴듯해 보였으니까.
정말이지 저 형은 사이비 교주가 된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던지.
괜히 키스 형이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말을 들을 때는 그럴듯하고, 혹해서 그럴까? 싶은데 막상 상황이 닥치면 난감하다.
처음에는 준이 형이 어색해해서 다시 찍었고, 경환 형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아 그 후로도 몇 번째 다시 찍고 있었다.
생각보다 내 표정에는 별다른 피드백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작가님이 이번에는 무언가 애매하다는 듯 갸우뚱하며 중얼거리길래 경환 형에게 속삭였다.
“형, 저쪽에 밥상이 차려져 있다고 생각해봐. 갈비찜, 육전, 치킨에 닭갈비가 상에 있는 거야.”
“하, 말만 들어도 배고파 죽을 거 같다.”
경환 형이 홀린 듯 내 손끝을 따라 어느 지점을 보며 상상한 듯 중얼거렸다.
“저기에 있는데 형은 지금 못 먹는 거지. 상을 들고 와야 해. 가져다 달라고 꼬셔야 한다고.”
“오, 그럴듯해.”
“밥 먹자고 꼬실 때처럼 웃어봐.”
속닥거리며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웃는 사이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봐요, 좋아. 지금 경환 씨 표정 되게 좋아요!”
어딘가 잔뜩 신난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긴장을 놓고 있던 형들도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갈비찜이 푹 익었으니까 얼마나 야들야들하겠어. 간도 잘 배어서 달콤하고 짭조름하고. 윤기 흐르고 촉촉하게 씹히는 고기에 감자랑 고구마도 양념이 잔뜩 스며들어서.”
“와씨.”
경환 형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 찬이 어머님이 보내주셨던 갈비찜 기억하지? 그때 형 밥 두 공기 먹었잖아.”
“아, 제발….”
공복으로 촬영하는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내 속삭임이 유독 악마의 속삭임 같았나 보다.
경환 형은 홀린 듯 바라보다 이제는 괴로운 듯 눈가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찬이 어머님이 음식을 굉장히 잘하시긴 해….
이야기하면서 점점 그 맛이 떠올라 나도 배가 고파졌다.
아, 고기 먹고 싶다. 맛있는 고기….
서글퍼진 나는 이번엔 다른 메뉴를 입에 올렸다.
“자, 이제… 갈비찜 옆의 육전은 소고기 냄새에 후추 향도 좀 나고, 달걀 때문에 고소하기도 하지. 우리가 전에 부쳤던 그 맛 알지?”
“환아, 그만해…. 형 미칠 것 같아.”
경환 형은 슬퍼하다 못해 이제는 처연한 얼굴이 됐다.
연달아 눌리는 셔터음과 위에서 들리는 형들의 웃음소리도 부끄러움을 부채질했다.
“형이 오늘 꼭 고기 사줄게. 이야, 우리 애들 누가 굶겼냐. 안 되겠네.”
경쾌하기까지 한 가영 형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사진 작가님의 입에서 우리 촬영이 끝났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열심히 형에게 속삭인 덕분에 경환 형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나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우진 형, 우리 밥 언제 먹어요?”
마찬가지로 배고파진 나도 비틀거리며 우진 형에게 걸어갔다.
“배고파….”
“너희는 진짜….”
뒤따라오던 준이 형의 중얼거림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지만, 그보다 지금의 허기가 더 급했다.
“지환 씨,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그렇게 표정이 좋아졌어요? 경환 씨 갑자기 감정이 엄청 풍부해졌던데.”
나머지 인원의 사진 촬영을 위해 스태프들이 현장을 정리하는 사이, 작가님이 해맑은 얼굴로 다가오셨다.
경환 형과 찬이는 특히나 표정 연기에 약했다.
그 때문에 평소에도 우리는 이 인간들의 표정을 끌어내기 위해 먹는 얘기를 자주 써먹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먹는 것에 약한지 원.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방법을 써먹긴 했지만, 남에게 말하기에는 부끄러웠다.
“그냥 형이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을 상상하라고 그랬어요.”
“하하, 뭐 어떻든 사진이 잘 나왔으면 됐죠! 아주 그럴싸해요. 어서 완성해보고 싶을 정도로요.”
작가님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는지 내내 경환 형을 칭찬했다.
경환 형은 예의 바르게 대꾸하면서도 우진 형을 힐끔거렸고.
배고프니 어서 밥을 달라는 눈빛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뭐라도 먹고 할 시간이 되긴 했다.
우진 형이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작가님에게 다가갔다.
“저희 애들이 배가 많이 고픈 것 같은데 가볍게 허기라도 달래고 계속하는 건 어떠세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작가님은 작업하다 보면 시간이 이렇게 흐른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자신도 출출한 것 같다면서.
이번 작가님은 굉장히 활달한 성격을 지닌 분이었다.
평소에도 여러 작업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 사는 풍경을 찍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하셨다.
사람 냄새 나는 사진을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다고, 처음 자신을 소개할 때 말해주셨던 것을 기억한다.
“저희가 미리 간단하게 드실 수 있는 거로 준비했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어휴, 뭐든 주시면 ‘감사합니다’하고 먹어야죠. 얘들아! 밥 먹고 하자!”
그 한마디에 현장에는 갑자기 빛이 돌았다.
역시 우리만 배고픈 게 아니었나 보다.
종범 형과 우진 형은 미리 주문해놨다면서 샌드위치와 김밥을 쌓아둔 쪽으로 사람들을 불렀다.
“밥이랑 빵 중에 더 좋은 쪽으로 드시면 됩니다. 양은 넉넉하니까 많이 드세요.”
역시 밥에 있어서는 아끼지 않는 회사답게 모든 인원이 배부르게 먹어도 남을 만한 양.
“일단 의상 좀 갈아입을게요. 옷에 흘리면 큰일이니까.”
“흘리면 진짜 울면서 빨아야 해.”
대기 중이던 다른 멤버들까지 우르르 몰려들어 복작복작해진 공간.
입을 때와 달리 빛의 속도로 의상을 벗어낸 경환 형이 김밥으로 손을 뻗었다.
“아, 진짜 지환이 너는….”
바스락거리는 은박지 소리와 함께 경환 형의 한숨 소리가 섞여 들렸고,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떡해요. 형이 자꾸 졸린 표정인데.”
다시 의상을 입어야 했기에 곱게 벗고 대충 티셔츠에 팔을 껴입는 사이 다른 멤버들도 주변에 앉았다.
“아까 도대체 무슨 소릴 했길래 경환이 표정이 그랬어?”
떨어진 현장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영빈 형이 샌드위치를 들면서 물었다.
“야, 말도 마. 얘 무슨 먹방 스트리머? 그런 거 해도 되겠더라.”
“환이는 많이 못 먹으니까 먹는 건 안 되고, 그 맛 설명해주는? 그런 건 해도 되겠더라.”
작게 속삭인다고 속삭였는데 비교적 가까이 있던, 형들은 그걸 또 들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만 놀려요.”
“놀리다니. 신기해서 그러지.”
가영 형과 세비 형의 웃음과, 이미 경험해본 일이기에 그러려니 하는 준이 형.
제일 차분했던 준이 형이 다른 멤버들에게 아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에 찬이 표정 연기 끌어낼 때는 치킨 얘기하더니.”
“효과 직빵이었잖아, 그때도.”
“매번 먹는 얘기를 해줘야 표정이 나오는 것도 문제 아니에요?”
키득거리며 각자 손에 먹을 걸 쥔 멤버들 사이에서 우리 막내가 조그맣게 항의했다.
형들 때문에 못 살겠다고.
툴툴거리며 샌드위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세빈이가 김밥 한 줄을 야무지게 펼쳤다.
“그러고 보면 막둥이가 참 잘 먹어.”
“그치. 잘 먹으니까 예쁘고 좋은데 왜 살은 안 찔까?”
“살찌면 안 되죠. 가뜩이나 매번 체중 감량 하는 것도 고역인데.”
“다이어트에 제일 자유로운 게 환이지?”
앞에 놓인 샌드위치와 김밥을 신나게 박살 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나 뭐요.”
“환이는 잘 먹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입이 짧아.”
“위가 약해서 그래요. 체하기는 또 얼마나 잘 체하는데.”
먹는 얘기 실컷 하나 했더니 가만히 있는 내 체중으로 대화가 틀어졌다.
도대체 이 사람들 대화는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키스 형과 준이 형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김밥을 꼭꼭 씹어먹었다.
참치김밥은 늘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니까.
은근슬쩍 형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려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쉽게 나를 놔주지 않았다.
“환이는 다 잘 먹는 편인데 양이 너무 적어.”
“적다고요?”
“그래. 성장긴데 그 정도면 너무 적지 않아?”
경환 형은 김밥을 두 줄째 먹어 치우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형들도 보통 두세 줄은 먹고 거기에 후식으로 라면도 먹을 수 있을걸?”
“사람마다 먹는 양이야 다르지. 근데 환이가 좀 적게 먹긴 해.”
“양배추 환 같은 거라도 사다 줄까? 그게 위에 좋다던데.”
지금 먹는 약이 뭐냐는 둥, 양배추가 위에 좋으니 즙을 사다 준다는 둥.
갑자기 위에 좋은 음식이 뭐가 있는지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대화 주제가 이렇게 널을 뛰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잘랐다.
“밥이나 먹어요, 좀! 난 괜찮다니까!”
“까비, 양배추즙 맛없다고 해서 먹여보고 싶었는데.”
다진 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세비 형이 형의 등짝을 찰싹하고 내리쳤다.
“애를 왜 괴롭히려고 들어.”
“맞아! 우리 형 괴롭히지 마요!”
키스 형과 세빈이의 타박에 다진 형은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니, 나만 쓰레기야? 한가영도 그랬잖아!”
“난 맛없어서 먹이려던 게 아니니까 그렇지. 이 양심 없는 쓰레기야.”
갑자기 집중포화 당한 다진 형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다 입안으로 샌드위치를 욱여넣었다.
“에휴, 어떻게 이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조용한 날이 없을까.”
찬이가 먹던 샌드위치를 한입 뺏어 먹은 것으로 식사를 마쳤다.
김밥도 두 줄이나 먹어서 배가 불렀지만, 샌드위치 맛도 궁금했거든.
슬그머니 와글거리는 이 인간들에게서 한 발 빠진 내게 우진 형이 속 달래라며 따뜻한 유자차를 내밀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맛의 유자차가 속에 들어가자 몸이 따끈따끈해지는 느낌이었다.
현장에 에어컨이 너무 쌔서 내게는 조금 추웠는데 속이 데워지니 딱 좋았다.
배도 부르고 속도 따땃하고.
“이 사람들이 있는데 조용하길 바라는 게 더 큰 욕심인 것 같다.”
흐물흐물하게 녹은 내 옆에서 영빈 형이 내 혼잣말에 답하며 웃었다.
“그래도 재밌긴 해요. 이렇게 앨범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입에 샌드위치를 물고 가영 형에게 잡혀서 버둥거리는 찬이, 키스 형에게 이것저것 묻는 세빈이.
다진 형에게 붙들려 질문 세례를 받는 경환 형.
그리고 우리처럼 한걸음 물러나서 그런 몰골을 구경하는 세비 형과 준이 형.
“이 정도면 평화롭지 뭐.”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우진 형이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맞아, 그래도 이 정도면 평화롭지.
적당히 시끌벅적하고 적당히 요란한 내 삶의 평화를 위해, 그 이상한 불꽃은 이제 꺼져줬으면 좋겠다.
아니, 꼭 그렇게 만들고 말 테다.
속으로 굳게 다짐한 나는 포잉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