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17)화 (417/456)

417. Decalcomanie(2)

“아, 하지 말라고!”

“흐즈 므르그~.”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얄미운 표정을 만들 수 있지?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늘 신기한 기분이 드는 찬이의 장난질.

찬이는 오늘도 기운차게 막내를 놀리고 있었다.

졸음을 참지 못한 세빈이가 몸을 풀다 말고 깜박 졸았고, 금방 흠칫 놀라며 깼다.

스트레칭하다 존다는 게 너무 신기하지만, 세빈이는 언제 어디서도 잘 수 있으니까.

막내의 수면 욕구를 익히 아는 우리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우리 찬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으니.

세빈이가 졸다가 파드득 놀라 깰 때마다 짓는 멍한 표정을 보곤 킬킬거리며 장난을 시작한 것.

하필이면 오늘은 찬이와 세빈이가 짝궁으로 스트레칭하는 날이라 정면에서 그 모습을 본 찬이.

그때부터 저렇게 세빈이 말을 따라 하며 얄밉게 굴고 있었다.

막내들 투덕거림이야 일상이지만, 준이 형은 슬슬 찬이를 말릴 생각인 듯했다.

저런 장난은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형이 자제시키는 편이었다.

적어도 멤버들끼리는 서로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최힘찬.”

“응?”

신나게 투덕거리던 찬이와 세빈이 둘 다 준이 형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아쉽다는 눈이고 한 명은 기대에 찬 눈.

이미 익숙한 패턴이라 이놈들도 알고 있다.

“이제 그만해야지?”

“네엥….”

“어휴, 진짜 나잇값 못하는 형이랑 놀아주려니까 힘드네.”

오늘 소동도 이렇게 정리되었고, 막내들 재롱 구경을 실컷 한 형들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물론 나도.

장난이 큰 다툼으로 이어지지 않게 된 것도, 적당히 웃어넘기게 된 것도 서로의 노력 덕분이었다.

세상에는 넘으면 안 되는 선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

그건 누가 알려주기도 하지만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서, 그래서 내게는 유난히 버거웠다.

지난 생에 나는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그 선은 어느 정도인 거야? 어디까지가 맞는 거야?’

도저히 사람들이 말하는 적당하다는 것의 기준을 알 수 없어서 물어봤었다.

그때 대학 동기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눈치껏 알아서 해야지 그런 것까지 알려줘야 하냐고.

밥을 다 떠먹여 줘야 먹냐며 혀를 찼었다.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할 때도 내키는 대로 할 때도 타박은 일상이었다.

늘 나에게 꽂히는 말들은 ‘넌 도무지 알 수 없어’였기에 나도 그들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동기 말이 전부 틀리진 않았다.

사람마다 본인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계선이 있을 거고, 비즈니스와 정말 친구의 선도 다를 테니까.

하지만 준이 형과 언래블 멤버들은 그들과 다르다.

다투게 되면 한 꺼풀 감정이 가라앉은 후, 자신의 기분을 이야기해 줬다.

서운한 게 무엇인지 왜 화가 났는지 말해줘서 나도 이해하고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늘 서로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지킬 수 있도록 선을 그어주는 준이 형이 있었다.

이해하지 못한 눈치면 조용히 따로 불러내어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영빈 형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점차 다툼이 줄어들었고, 서로에게 자신을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멤버들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이룬 것들이라 더 뿌듯했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는 ‘내가 얘네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하면서 간과했던 많은 것들이 있었다.

같은 시선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모든 일을 구분 짓던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나.

초반에는 별거 아닌 것들로도 찬이랑 장난치고 놀다가 멈칫거리기도 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면서.

나이에 사로잡혀 억지로 어른스러운척하려고 애썼지만, 별로 좋은 결과를 내진 못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포잉이 말했다.

지금 넌 청소년인데 왜 굳이 어른이 되고 싶냐고.

어른이었던 게 좋은 거냐고.

난 한 번도 어른인 내 모습을 괜찮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사회생활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사람 사이에 스며드는 것도 어려워했으니까.

좋았던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그렇게 살려고 했을까.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포잉의 앞발이 평소처럼 무심하게 다가왔다.

툭 하고 팔에 자신의 앞발을 얹은 포잉은 평소보다 조금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넌 애니까 애처럼 굴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본다고.

되려 어른스러운척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걱정할 테니 마음껏 즐기라고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이라는 굴레를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들이.

그때부터 멤버들과 더 가까워졌고,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다.

역시 포잉이 없으면 안 된다니까.

* * *

“안녕, 병아리들.”

“잘 지냈어?”

엄청 오랜만인 것처럼 인사하는 새벽 형들.

“저기, 저희 저번 주에도 만났는데요….”

“늘 반갑다는 거지 뭐.”

내 작은 의문은 언제나처럼 가영 형의 제멋대로식 화법에 튕겨 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웃더니 등을 팡팡 쳐대는 손길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아파요! 아프다고!”

“우리 병아리는 이렇게 허약해서 어떡하냐.”

“약한 게 아니라 네 손이 매운 거라고 몇 번 말해.”

붙잡힌 나를 빼내 준 세비 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다진 형이 옆에서 한소리 보탰다.

가영 형은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할 것 같은데 손이 무척 매웠다.

얼얼한 등 때문에 낑낑대자 우리 막내가 얼른 다가와 맞은 곳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경환이나 힘찬이는 괜찮던데, 쟤는 저렇게 약해서 어떡하냐, 진짜.”

다진 형의 말도 가영 형의 귓가에는 닿지도 못하고 퉁겨져 버렸나 보다.

나보고 자꾸 약하다고 하는 걸 보면.

한숨을 푹 내쉰 세빈이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촬영 준비나 해.”

“제발 빨리 무사히 안전하게 끝내자.”

키스 형과 준이 형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말에 우리는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훑어보는 가영 형이나 호기심을 주체못하는 다진 형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 두 인간과 얽히면 평온한 하루가 와장창 끝장날 거라는 걸 모두 알기 때문일까?

후다닥 움직이는 몸놀림이 평소보다 조급했다.

오죽했으면 경환 형이 빨리 움직일까.

콜라보 앨범은 여태까지와 달리 뮤직비디오를 찍지 않기로 했다.

두 그룹이 하고 싶은 음악을 모아서 만든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앨범이라 반응을 보겠다는 것.

형들 앨범에는 초반 앨범을 제외하고는 포토 카드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가끔 단체 샷을 넣기는 하지만 아이돌의 영업 방식을 취하진 않는다고.

무작위로 나오는 포토 카드만큼 팬들의 애를 태우는 게 또 있을까.

드래곤볼 모아서 소원을 비는 것도 아닌데 모으기가 영 쉽지 않았다.

우리끼리 앨범 언박싱 영상을 찍을 때도 모든 멤버가 나온 적이 없으니까 말 다 했지.

일부 회사에서는 멤버 별로 팬덤 내의 인기도가 다른 것을 이용해 포토 카드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인기 있는 멤버의 사진은 조금 넣어서 더 많은 앨범을 사게 만드는 것.

다행히 우리 회사는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진 않다고 들었다.

물론 더 깊이 파고들면 얼마나 다를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이 있으니 믿었다.

회사를 고려해 새벽 형들이 이 부분을 양보해주었다.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고 해도 수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키스 형이 사진 찍는 게 싫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런 컨셉 생각해낸 거 누구야.”

“회의 때 빠진 너를 탓해라. 그러게 참석하라고 했잖아.”

의상을 받아든 키스 형의 눈가가 꿈틀거리다, 세비 형의 타박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으로 답했다.

수많은 의견이 오간 회의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덕분에 대타로 DJ 했다가 라디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키스 형은 콘셉트 회의 때 한번 빠졌고.

사실 일정을 조정해서 참여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저 키스 형이 가영 형과 다진 형의 꼬락서니를 못 견디겠다고 핑계 삼아 도망갔을 뿐.

그리고 그날 포토 카드의 콘셉트가 정해졌다.

앨범의 중심을 잡아줄 타이틀곡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힌트를 얻었다.

미친 듯한 집착으로 사랑을 지키려는 자아와 그런 마음을 떨쳐내야 한다는 자아의 충돌.

“아, 그런데 진짜 저런 가영 형 안 어울려요….”

“내가 뭐. 난 원래 뭘 입어도 잘 어울려.”

뻔뻔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인간은 안된다.….

하지만 반응과는 별개로 가영 형은 자기 몫의 의상을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듯 날카롭게 서 있는 깃과 길고 새하얀 코트.

성직자들이 입을 법한 온통 하얀 옷에는 금빛 단추가 매달려있었다.

탈색하는 게 싫다고 투덜거리던 것과는 별개로 금발로 염색한 가영 형은 무척 근사했다.

가영 형과 비슷한 복장을 한 세비 형과 준이 형.

나와 경환 형도 하얀 의상이었지만, 디자인이 조금 달랐다.

형들이 금욕적이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정하다면, 우리는 조금 더 활동적인 느낌이었다.

“진짜 게임 캐릭터 같지 않아요?”

“내 생각에도 그래. 뭔가 판타지나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들 같아.”

“왠지 힐 해야 할 것 같아.”

“넣어둬요. 형한테 힐 받으면 디버프 걸릴 것 같으니까.”

“디버프가 뭐야?”

얼마 지나지 않아 의상을 모두 갈아입은 새벽 형들과 우리는 잠시간 평가 시간을 가졌다.

가영 형이 눈을 반짝이며 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기에 내가 단칼에 쳐냈고.

차마 형한테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면 내 마음은 전달됐겠지.

디버프가 뭐냐고 묻는 영빈 형에게 설명하는 찬이.

저 형은 게임도 안 하고 살았던 건가.

그러고 보면 여태까지 영빈 형이 RPG 계열 게임을 한 걸 본 적 없기는 했다.

주로 하는 게임이 퍼즐 게임이라 찬이가 질색했었지.

서포트 팀분들의 도움을 받아 액세서리를 챙기고 잠시 대기하는 사이, 종범 형이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본 종범 형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안보이지?”

“네. 오늘은 안 보여요.”

“그래, 혹시라도 이상한 거 보이면 꼭, 바로 말해.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도망치게 해줄게.”

종범 형은 본가에 내가 본 현상에 관해 물어 놓았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마주했을 때만 해도 바로 회사로 쳐들어오려나 했는데, 다행히 이상한 불꽃은 회사에 들어오지 못했다.

포잉에게 이 일을 설명하니 포잉이 효과는 있는 모양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설명하지 않고 넘기려는 포잉을 간식으로 꼬드겨 대충 들은 바로는 장로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숙소와 회사는 고정적으로 머무르는 곳이라 최대한 안전할 수 있도록 요정의 힘이 담긴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그러니 적어도 숙소와 회사 안에서는 안심해도 된다고.

‘그 영감탱이가 헛소리를 좀 하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은 쓸만함.’

그렇게 입술을 삐죽거리던 포잉의 눈에는 내가 모르는 그 요정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더불어 최근 요정계에 자주 갔던 것도 그런 보호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해주었다.

계속 자료를 찾는 건가 했더니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하는 듯했다.

우리 포잉 힘내라고 꼭 안아줬다가 솜방망이에 맞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지켜주려는 사람과 요정이 있었고, 나도 이제는 도움을 구하는 걸 꺼리지 않았다.

외부로 움직이는 건 아직 걱정스러웠지만, 포잉이 오늘은 자신이 딱 붙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었다.

더불어 종범 형은 내게 그 사실을 회사에 말할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갑자기 그런 현상이 생긴 거면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 적합한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회사에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꺼려졌기에 고개를 저었다.

“환아, 이리 와 봐.”

희주 누나가 불러서 그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머리를 매만져주던 희주 누나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오늘도 예쁘네, 우리 환이.”

“촬영 시작합니다!”

모든 세팅이 끝난 건지 사진 작가님이 기운차게 외쳤다.

오늘도 부디 무사히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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