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16)화 (416/456)

416. Decalcomanie(1)

준이 형과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계속 고민했다.

서로를 아끼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나 걱정들.

거기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다만, 아직 멤버들이 내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건 조금 의외다.

그동안은 정말 별거 없이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도 준이 형은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지 말라며 손을 꼭 잡아주던 눈동자가 슬퍼서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밖에 몰랐던 내가 언래블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함께 살아가는 법, 의지하고 기대는 법, 서로 힘이 되어주는 법, 사람을 믿는 법 등.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받았는데 멤버들은 여전히 내게 더 주지 못해 안달인 듯했다.

사실 연기하는 동안 즐거웠고, 얻은 것도 많다.

연기를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게 내게는 무척 크게 다가왔다.

가뜩이나 사람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내가 배역을 통해 다른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하나같이 정상적인 삶을 산 역할은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도 배울 수 있는 건 많았다.

특히나 ‘DEAR’에서 도한겸 역은 서서히 사람의 감정을 깨우치는 역이라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건 싫다고만 생각했는데, 액션을 배우는 건 제법 재밌었다.

“같이 가는 사람들….”

준이 형이 말했던 언래블의 의미.

시작점부터 마침표에 다다르는 그 날까지 쭉 우리는 하나라는 말 같아서 계속 곱씹게 됐다.

“휴, 뭔가 시원한 걸 마셔야겠다.”

생각이 자꾸만 덩치를 키우면 머리가 아프다.

잠시 머리를 비울 겸 회사 앞의 편의점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진 형한테 말해야 하나?”

우리는 편의점 갈 때도 되도록 혼자 가지 않고 몇 명이 같이 움직이거나 회사 분들이랑 움직였다.

혼자 몸을 뺄 수 있는 경환 형이나 준이 형 찬이는 가끔 혼자서도 돌아다니지만.

세빈이는 혼자 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늘 우리와 함께 다녔고.

영빈 형이나 나는 멤버들이 절대 혼자 다니지 못하게 했다.

이제는 막내까지 영빈 형이랑 나를 그런 취급하는 게 조금 슬펐지만, 수긍했다.

다른 사람들 걱정시키는 것보다 안전한 게 훨씬 나으니까.

“아, 맞다.”

우진 형에게 연락하려 핸드폰을 들었지만, 이내 우진 형이 회사에 없다는 게 생각났다.

오늘은 준이 형과 경환 형이 스케줄 때문에 자리를 비웠고, 우진 형이 따라갔다.

다른 멤버들은 개인 연습 중일 테니 종범 형과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작업실을 나섰다.

* * *

“어? 종범 형!”

“지환아, 어디가?”

종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지환을 바라봤다.

작업에 한 번 빠지면 들어가서 끌고 나와야 움직이던 애가 제 발로 나왔으니 신기할 만도 했다.

“편의점 가려고요. 같이 가요.”

“아아, 그래. 뭐 사려고?”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에 선 종범은 밝은 얼굴로 조잘거리는 지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그만 게 늘 최선을 다하고 있어서 기특했다.

언래블 멤버들 중 그러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지환은 그중에서도 조금 더 특별했다.

누군가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는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언래블 멤버들은 지환에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정을 느끼고 있었고, 지환은 그들을 무조건 믿었다.

멤버들이 무언가 말하면 그게 무엇이든 지환은 믿어주었다.

함께 고민하고 변치 않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일상을 함께하는 매니저들이기에 알 수 있는 유대.

왜 선배가 저 애들은 괜찮을 거라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지 알 것 같았다.

혼자서는 조금 불안정해 보였던 멤버들도 지환이 곁에 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매일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안 좋은 버릇을 고치고, 실력을 쌓고,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 다 바꾸고 있었다.

물론 또래 아이들처럼 다툴 때도 있었고, 장난이 지나칠 때도 있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내부의 분쟁은 외부 도움 없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풀어 내렸다.

하준의 편견 없는 중립적인 태도가 멤버들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영빈의 세심한 배려가 팀을 감싸고 있다.

이렇게 조합이 좋은 팀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애들 인성이 괜찮았다.

연예계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들에게 듣기로는 이런 사람이 그렇게 흔치는 않다고 하던데.

편의점에 들어선 지환은 음료수 코너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뚫어져라 음료수들을 바라보더니 무어라 중얼거리며 하나씩 골라냈다.

“뭐해?”

워낙 진지하게 고르고 있는 터라 지켜보던 종범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이렇게 고민하고 있냐고.

그러자 지환은 배시시 웃더니 방금 손에 든 음료수를 살짝 흔들었다.

“찬이가 요새 단 걸 너무 많이 먹는 거 같아서 좀 덜 단 거로 고르고 있어요.”

“찬이 꺼?”

“네. 세빈이는 오늘 비타민 안 먹고 왔으니까 비타민 들어 있는 걸 사다 주고….”

지환은 멤버들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음료수를 고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 태도에 기가 질린 종범은 ‘그렇구나’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매니저가 아니라 네가 매니저 같다, 이 녀석아….’

담당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매니저.

그런 자신보다 지환이 멤버들을 더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데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얘는 진짜 뭐지?’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범은 무언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응?”

“형, 형은 뭐 마실래요? 커피?”

“아, 어. 형은 늘 마시던 거 마실게.”

지환은 멤버들뿐만 아니라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취향까지 다 꿰고 있었다.

처음에는 따로 말한 적도 없는데 알고 있어서 신기했다.

이전에 그에 관해 물었더니 조금만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더랬다.

자기는 이런 작은 것밖에 챙길 수 없으니 이런 거라도 하고 싶다고.

그런 사소한 관심과 애정이 사람을 얼마나 감동하게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너무 또래 소년 같아서 종범은 기쁜 마음과 함께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사람을 관찰하고 필요한 걸 도와주고.

이런 것들은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니까.

이 소년이 야생 같은 연습생 시절을 버텨내고 데뷔한 아이돌이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됐다.

그래도 호의를 갖고 사람과 잘 지내보려는 태도가 종범을 흡족하게 했다.

그렇게 음료수를 고르는 지환을 두고 종범은 방금 느낀 섬뜩함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종범은 촉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촉을 잘 믿는다.

그 촉 덕분에 경호 일을 할 때도 여러 번 득을 봤으니까.

방금 느낀 오싹한 기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싶어 주변을 꼼꼼히 살폈지만, 다른 건 없었다.

여전히 인기곡이 흘러나오는 평소의 편의점이었다.

“어? 우리 노래다.”

“확실히 이번 노래가 역대급이긴 해.”

자신의 불안함을 지환이 느낄까 봐 빠르게 그런 기색을 지워낸 종범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기분 좋은 듯 노래를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행복해 보여서 같이 웃을 수 있었다.

이 한 곡을 만들기 위해 애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종범도 이제 아니까.

한참을 고민한 음료수와 칼로리 낮은 과자 몇 개, 초콜릿 몇 개를 들고 계산대에 선 지환.

익숙한 알바생과도 웃으며 인사한 지환은 종범을 바라보다 어딘가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

“어, 형.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요. 얼른 가요.”

지환은 어딘가를 바라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건네받은 봉투를 쥐었다.

“형이 들게. 가자.”

이미 무언가 느꼈던 종범은 별다른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바로 봉투를 넘겨받았다.

자신이 들겠다는 지환에게 커피값이라며 대신 봉투를 받아 든 종범.

그는 겁먹은 듯한 지환을 곁에 바짝 붙였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발을 놀렸다.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그사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지환의 모습에 종범은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제대로 담당 연예인을 경호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종범은 지환을 쳐다봤다.

“일단 작업실로 갈까?”

“네….”

무언가 두려운 것을 본 듯 자신들이 들어온 정문을 한번 바라보던 지환이 종범을 순순히 따라왔다.

작업실에 도착한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환은 지환대로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고, 종범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형, 있잖아요….”

“지환아.”

동시에 말을 꺼낸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피식 웃었다.

“먼저 말해.”

“어, 그… 형, 혹시 뭔가 봤어요?”

종범이 먼저 말하라고 지환의 어깨를 다독여주자 한결 얼굴이 나아진 지환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편의점에서….”

‘역시 뭔가 있구나.’

종범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지환의 얼굴을 살폈다.

“형은 못 봤어.”

“아….”

금방 실망으로 물드는 얼굴.

“근데 뭔가 있었다는 건 안다.”

“진짜요?”

말 한마디에 확 밝아지는 지환의 얼굴을 본 종범은 피식거리며 지환의 머리를 헝클었다.

애를 놀리다니,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한 번쯤은 놀려보고 싶었다.

“형이 촉이 조금 좋아.”

“네?”

종범은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외가 쪽이 그런 핏줄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둔해서 그저 느낌 정도만 받는 편이지만, 신을 모시는 분들이 있다고.

그래서 경호 일을 할 때도 여러 번 덕을 봤고, 아까도 무언가 느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종범은 자신의 집안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믿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믿게 된다고 해도 결국 끝이 좋지 않았다.

어릴 때 경험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철저히 이 일을 함구하며 살았다.

하지만 아까 지환의 태도로 보건대 지환은 자신의 모계 쪽처럼 무언가 보거나 느끼는 모양이었다.

종범의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설명에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 비밀인 거죠? 다른 데서는 말 안 할게요.”

“그래, 고맙다.”

덧붙이지 않은 말까지 다 읽어낸 지환의 대답에 종범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속이 깊으니까 다들 그렇게 예뻐서 싸고돌려고 하지.

“휴, 원래 그런 게 안 보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부터 푸른 불꽃이 보였어요.”

“푸른 불꽃?”

“네. 손톱만 하게 작았다가 주먹만 하게 커졌다가 하면서….”

지환은 일본에서 처음 봤고, 지난번 촬영 때도 보였다며 왜인지 모르지만, 자꾸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했다.

뭔지 모르지만 몹시 나쁜 기분이 들어서 가까이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울적해진 지환의 모습에 종범은 고민에 빠졌다.

종범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가까이 오는 건 좋지 않을 듯했다.

“일단 가까이는 못 오는 거 같지?”

“모르겠어요. 혼자 있을 때 본 적은 없어서.”

“형이 일단 집에 좀 물어볼게.”

“어,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아냐. 형 일이 너희 도와주는 거잖아.”

폐를 끼치는 거 아니냐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지환에게 종범은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는 단순히 연예인들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보좌관이나 비서 같은 것과 비슷하다는 게 종범의 생각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있으니까.

언래블이 일하는데 방해될만한 것들은 되도록 배제하는 게 제 일이기도 했다.

자꾸 저런 것이 보이면 제대로 일에 집중하기 힘든 건 당연했고.

“형이 집에 물어보고 말해줄 테니까 일단은 조심하는 쪽으로 하자. 외출할 때는 꼭 누구랑 같이 다니고.”

창백했던 아이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웃음이 어렸다.

종범은 왜 우진이 그렇게 단단해졌는지 이해했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단단해지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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