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15)화 (415/456)

415. 괜찮아도 괜찮아(5)

소현 팀장님이 처음 질색했던 것과 별개로 일은 깔끔하게 서로 원하는 바를 적당히 충족해서 잘 마무리되었다.

광고 영상은 총 두 개.

특별 영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기존에 만들었던 홍보 영상에 우리 노래를 입힌 영상이 하나.

뮤직비디오처럼 우리가 세트장에서 직접 연기와 노래를 하는 영상이 하나.

곧 시작될 드라마 시작 시점까지는 두 가지 모두 기한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해서 손을 조금만 보면 되는 영상을 먼저 내보내고, 이후 이번에 촬영할 영상을 내보내기로 했다.

대신, 기존 영상의 중간마다 우리가 부스에서 녹음하던 장면을 넣기로 했다.

기운 PD님은 약간만 손보면 되니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고 무척 좋아하셨다.

새로 다 찍자니 시간이 부족하고, 그냥 노래만 넣자니 임팩트가 부족했다.

그렇다고 대충 찍기에는 PD님도 우리도 용납할 수 없었고.

어찌 되었든 일을 하기로 한 이상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니까.

더불어 이번 일로 EJ TV 측과 꽤 괜찮은 조건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됐다고 들었다.

도연 형에 의하면 한동안 소현 팀장님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돌아다니셨다고 한다.

형의 표현으로는, 뼈도 안 남기고 다 씹어먹은 배부른 짐승 같았다고.

물론 소현 팀장님의 귀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표현이라 웃고 말았다.

이 말이 소현 팀장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도연 형이 그렇게 씹어 먹힐지도 모르니 비밀을 지켜줘야 했다.

이번에 회사는 금전적인 이득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굳건히 하는 데 더 힘을 실었다.

공영방송의 시청률이 바닥을 기기 시작한 지도 좀 되었고, 이제는 케이블 채널도 예전과 많이 다르니까.

더군다나 EJ TV는 대규모 물갈이와 함께 외부 인재 영입에 힘썼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 결과물 중의 한 명이 정기운 PD님이었고.

덕분에 우리 회사 배우분이 노리던 배역에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소식도 있었다.

그동안 회사 배우분들에게는 나름대로 귀염받는 후배였다.

하지만 어디에나 좋게좋게 흘러가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몇 명이 회사에서 언래블을 지나치게 편애한다고 큰 소리를 낸 적 있었다.

우리에게 투자되는 금액에 불만을 제기한 것.

대표님이 무슨 헛소리냐고 가볍게 일축하고 넘어갔지만, 그런 불만이 쌓이면 좋지 않다는 건 서로 안다.

배우실 실장님과 정윤 실장님이 사무실에서 말다툼하는 것을 얼핏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의 성과가 배우실에도 나뉘자 자연스럽게 우리를 보는 시선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평소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배우실 실장님이 우리 연습실까지 찾아와 고맙다고 했으니 말 다 했지.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홍보 영상을 촬영하는 당일이 다가왔다.

“인물들이 훤칠하니까 이렇게 입혀놔도 인물이 사네.”

PD님은 처음 뵈었을 때와 달리 많이 초췌한 얼굴이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하고 퀭한 얼굴이었지만, 눈은 여전히 번뜩거렸다.

그래서 더 무서워 보이기도 했고.

움찔거리는 세빈이 손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달래고는 멤버들을 한번 둘러봤다.

우리는 오늘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한 명의 학생들이 되었다.

낯선 교복과 모자.

실제 있었던 과거의 한 장면을 우리 상황에 맞춰 재해석한 것이지만, 이상하게 평소보다 가슴이 무거웠다.

우리는 PD님과 작가님에게 대본을 받고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내용을 찾아보았다.

수박 겉핥는 듯한 얕은 지식이라도 머릿속에 담고 임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일단 낮 장면 촬영하고 가능하면 밤 장면까지 오늘 끝냅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각오를 다진 찬이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PD님은 흡족한 듯 웃었다.

카메라 감독님, 오디오 감독님뿐만 아니라 많은 스태프가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쏟아붓는 촬영이 시작됐다.

* * *

PD님은 회사의 트레이너 선생님들 못지않게 우리를 열심히 쥐어짰다.

여태까지 뮤직비디오 촬영 때도 늘 버겁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더했다.

그나마 정극 경험이 있는 나는 멤버들에 비해 덜했지만, 경환 형이나 힘찬이는 무척 힘들어했다.

힘찬이는 평소에는 감정 표현이 풍부한 편이지만, 연기 자체를 너무 힘들어했다.

반면 경환 형은 평소에도 크게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라 연기를 힘들어했고.

게다가 조금만 어색해도 날카롭게 들어오는 PD님의 목소리가 무척 매서웠다.

중간중간 우진 형과 종범 형의 부등부등을 받아 가며 겨우 끝낸 촬영.

그 와중에도 우리 막내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세빈이는 생각보다 금방 역에 몰입했고, 재밌어했다.

이곳에서의 소식을 각지의 동지들에게 알리기 위해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는 장면이었다.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에 결연한 얼굴로 우리와 멀어지는 세빈이 모습은 정말 학생 운동가 같았다.

이전까지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도 섬세한 감정 표현을 곧잘 해낸다 싶었는데.

어쩌면 우리 애가 연기에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행복했다.

나중에 최종본을 봐야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있을 테지만, 일단은 스태프분들 표정이 괜찮은 편이었다.

“기대해도 좋아. 진짜 잘 뽑힌 것 같거든.”

몇 번 얼굴을 봤다고 우리가 익숙해진 건지 기운 PD님은 굉장히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오늘 찍은 장면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벌써 들뜬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며 아까보다 더 윤이 나는 얼굴의 PD님에게 질려버렸다.

저 사람은 왜 촬영하면 할수록 더 살아나는 건데?

저런 게 바로 천직인가 싶어 온종일 구르느라 욱신대는 팔다리를 주물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너희도 고생 많았다.”

“언래블 수고했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 씻고 러그에 눕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치 없이 쪼르르 바로 차에 들어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먼저 현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스태프분들은 더 오래 남아있어야 하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도 멤버들도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PD님부터 시작해서 모든분들께 인사드렸다.

웃는 얼굴로 더 공손하게.

이런 모습을 그동안 쭉 유지해왔고, 덕분에 우리는 대부분의 촬영장에서 환영받았다.

그저 예의 바르게 행동한 것뿐인데.

우리가 당했던 것들을 타인에게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고, 처음부터 회사와 준이 형이 당부했던 것도 있었다.

겨우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탄 멤버들은 하나같이 시들시들해진 채소 같았다.

한여름에 긴 팔 교복을 입고 촬영하느라 땀을 잔뜩 흘린 덕분에 지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올 때까지만 해도 잘생긴 아이돌이었는데 돌아갈 때는 꼬질꼬질한 동네 말썽꾸러기 같은 모습이라니.

대충 닦아냈어도 온종일 찌든 흙먼지는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숙소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너희 좀 자라.”

“고마워요, 형.”

평소라면 되도록 잠들지 않으려 애썼을 테지만 오늘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더위도 더위였지만, 그 불꽃을 다시 봐버린 터라 긴장한 상태로 너무 오래 밖에 있었다.

그 불길한 느낌의 푸른 불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일본에서 마주한 후 한국에서는 보이지 않았기에 행복 회로를 돌린 것도 있었다.

귀신은 물을 못 건넌다고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번에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불꽃이 아닐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것도, 불꽃이 있는 주변에 불이 붙지 않는 것도 모두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니까.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비밀 은신처에 동지들과 모여 궐기 내용을 논의하는 장면을 촬영하던 때였다.

경환 형의 어깨를 붙들고 대사를 하려던 내 눈앞으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것은.

희미한 조명등 아래 모여있었던 터라 처음에는 그저 잔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불꽃은 손톱만 한 크기에서 점차 주먹만 한 크기로 덩치를 불려갔다.

눈앞에 들이 밀어진 불꽃을 보면 누가 태연할 수 있을까.

순간 굳어버린 나는 대사를 놓쳤고, 미간을 찌푸리던 PD님은 내 얼굴을 보더니 잠시 끊었다 가자고 하셨다.

PD님이 보기에도 당시 내 얼굴이 엉망이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굳어버린 내 주변으로 멤버들이 몰려들었고, 달래느라 진을 더 빼야 했다.

더위에 약해서 그런 걸 거라고.

평소라면 괜찮다고 계속 이어가자고 했겠지만, 지금은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세트장을 벗어난 나는 속으로 애타게 포잉을 불렀다.

최근 요정계를 자주 왕래하는 포잉.

늘 지켜주던 포잉이 없는 사이 나타난 이질적인 무언가는 나를 공포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갑자기 왜?

나는 저 이상한 불꽃이 나를 쫓는 거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그저 타이밍이 안 좋았던 거라고.

경로가 겹쳤던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저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푸른 불꽃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나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직접 바다를 건너 찾아올 정도로.

이런 이상한 집착은 사생만으로도 벅찬데.

다행히 불꽃은 일정 거리 이상 내 곁으로 오지 못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도 하고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했다.

이 소름 끼치는 불길한 느낌만 아니었다면 내가 또 다른 요정을 보고 있는 건가 싶었을 것이다.

불꽃이 주변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고 허공에서 일렁이고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불꽃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단숨에 나를 얼려버릴 만큼 시린 냉기를 품고 있다는 걸.

왜 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포잉은 저것이 어쩌면 타락한 소원 요정과 연관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했다.

워낙 관련 자료도 적고 대부분이 장로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나 내려왔기에 찾아볼 게 많다고.

하지만 이렇게 불꽃이 내 앞에 나타나리라는 걸 알았다면 보내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진 나 때문에 멤버들도 놀랐다.

더위를 먹은 것 같다고 멤버들을 달래고, 우진 형에게 몇 번이나 체온에 이상 없음을 확인받아야 했다.

부산스럽게 멤버들에게 챙김을 받는 동안에도 불꽃은 지하에 있는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뭘까.

무슨 조건이 있어야 나타나는 걸까.

왜 내게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는 걸까?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니 온갖 의문들이 떠올랐다.

왜 나를 찾아온 건지, 왜 그렇게 거슬리게 구는지 등.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촬영장으로 돌아갔을 때, 푸른 불꽃은 거기 없었다.

무수한 의문이 머릿속을 꽉 채웠지만 답을 구할 수가 없어서 속이 답답해져 왔다.

그 후 촬영 내내 불꽃은 그렇게 내 주변를 맴돌았다.

보일 듯 말 듯, 주변을 맴돌면서 이상하리만치 일정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 불꽃.

그 이상한 움직임 덕분에 되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내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듯하니 서둘러 포잉을 불러야 했다.

더불어 숙소까지 쫓아오는지도 봐야 했다.

그렇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촬영을 끝낸 차 안.

눈을 감고 있는 내 귓가로 멤버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우리 애들도 어지간히 힘들었던 건지 다들 잠든 듯했다.

‘이 몸이 왔다, 계약자 놈아.’

‘포잉!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제 막 요정계에서 넘어온 건지 머리 위에서 포잉의 목소리가 들렸다.

포잉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때서야 마음속 한 조각 남아있던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제야 긴장이 풀린 건지 견디기 힘든 졸음이 쏟아졌다.

‘근데 조금 있, 다가….’

‘계약자야?’

당황한 포잉의 목소리와 폭신한 앞발의 촉감

이제야 현실이 무게를 갖고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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