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괜찮아도 괜찮아(4)
하준은 고민하던 상담을 오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작업실에는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으니 이곳이 나을 거라는 판단 후 지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환아, 혹시 바쁘니?]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환이 [아뇨! 왜요?]
개인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흔치는 않아서 그런지 답장이 빨랐다.
생각이 많은 녀석이니 아마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있으리라.
하준은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동생의 모습에 슬며시 웃었다.
[형이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형 작업실로 오면 되는데.]
이번에는 텀이 조금 생겼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한 게 없는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손가락이 머뭇거린 것 같다.
[별일 아니고 그냥 평소에도 하던 면담 같은 거야.]
작은 머리통이 포화상태에 빠질 것을 염려해, 하준이 재빨리 덧붙여 메시지를 보냈다.
환이 [금방 갈게요~]
어쩐지 메시지에서 자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잔뜩 허물고 웃고 있었다.
지환이 유달리 자신을 잘 따르는 건 알고 있다.
그가 가끔씩 솜뭉치들과 같은 시선으로 하준을 바라볼 때면 어깨가 우쭐해졌다.
아무리 다른 그룹의 형들이 지환을 탐낸다고 해도 지환은 하준의 동생이니까.
경환이, 지환이, 힘찬이, 세빈이 누구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예쁜 동생들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이 많이 가고 신경 쓰이는 건 역시 지환이와 힘찬이었다.
동갑내기 둘이 어쩌면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걱정되게 하는지.
낡은 노트를 뒤적거리며 꼭 확인해야 할 것들을 챙기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 환이야?”
“네, 형.”
“응. 들어와.”
문이 빼꼼 열리면서 작은 머리통이 문 안으로 쏙 들어왔다.
동생들은 하나같이 문을 여는 법도 달랐다.
경환이는 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허락하면 그대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찬이는 늘 문을 두드리고 기운차게 ‘형!’하고 외쳤고.
세빈이는 지환이만큼 공손했다.
연락해서 물어보고, 문 앞에서 메시지를 했다.
들어가도 되냐고.
영빈은 아무 때나 와도 된다고 했더니 정말 아무 때나 불쑥 들어왔다.
가끔은 문 여는 소리도 안 나서, 인기척에 뒤돌아보면 영빈이 태연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멤버들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하준은 자기 앞에 앉은 지환을 바라봤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응?”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해서요.”
지환의 눈동자 가득 온갖 근심 걱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틈나는 대로 멤버들과 개인 면담을 하는 건 이제 하준에겐 일상적인 일이다.
리더인 만큼 멤버들의 상태를 가장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주 멤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고 싶은 게 있는지, 힘든 점이나 바꾸고 싶은 건 없는지 등.
회사에서 팀장님이나 실장님이 하는 면담과는 달랐다.
좀 더 내밀하고 친근한 대화 같은 이야기들.
가끔 멤버들 간의 다툼이 있을 때도 대부분 하준 선에서 해결하곤 했다.
“그냥. 형이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지환은 영빈만큼이나 하준과 대화를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어서 눈빛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주로 동생들을 그런 식으로 챙기곤 했다.
하지만 하준과 영빈이 있어도, 조금 더 사적인 일들이 생기면 멤버들은 지환을 먼저 찾았다.
이 사고뭉치들 마음을 얼마나 잘 녹여놨는지 무슨 일만 있으면 다들 지환을 붙들고 이야기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가족과의 트러블, 사람 사이의 일, 같은 팀 누군가에게 서운한 일 등.
무언가 해결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서러운 마음이 들면 지환을 붙들었다.
하준은 멤버들의 그런 행동이 지환에게 짐이 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초반에 지환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다 받아주지 말고 형한테 보내라고.
그때 지환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는 멤버들이 자신을 가까이 여겨줘서 너무 좋다고.
그냥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이거라도 하고 싶다고.
늘 기죽어있던 작은 아이가 눈을 빛내며 하는 말이 하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요새도 애들이 너 귀찮게 해?”
“귀찮게 안 해요. 그냥 같이 투덜거리기도 하고 그렇게 푸는 거죠. 저도 같이 툴툴거리고 그래요.”
하준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지환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네가 너무 잘해주니까 이것들이 마냥 너한테 매달리잖아. 다 받아주면 안 된다니까.”
“저도 다 받아주진 않아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형.”
갑자기 어른이 돼버린 동생이 처음에는 낯설었고, 이유를 알고 나서는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
대나무처럼 꼿꼿한 동생.
하준은 부러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죽 내가 못미더우면 너한테 달려가나 싶다니까.”
“아닌 거 알면서 괜히 그런다, 또.”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쩔쩔매더니 이제는 놀리려고 해도 능글맞게 빠져나간다.
여러모로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몇 가지 대화로 분위기가 몽글몽글해지자 하준이 본 주제를 입에 올렸다.
“환아, 연기에는 뜻이 없는 거야?”
“연기요?”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지환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응. 연기할 때 재밌어하는 거 같았는데, 영화 후로는 다른 말이 없어서.”
“혹시 소현 팀장님이 형한테 얘기해보라고 하셨어요?”
“그건 아냐. 그냥 형이 신경 쓰여서 그래.”
지환은 회사에서 하준에게 압력을 넣은 건지 물었다.
가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하준은 우리 애가 어디 가서 사기당하진 않겠구나 싶어서 안심했다.
평소에는 맹하게 있다가도 가끔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니까.
하준은 지환이 너무 그룹에만 신경 쓰는 게 마음에 걸렸다.
곡을 쓰기도 하고 노래 연습도 부지런히 하지만, 연기 연습을 지금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작품을 한다는 말은 없었다.
소현에게 살짝 물어보니 조연이나 단역은 계속 문의가 온다고 했다.
하지만 지환이 별생각 없어 보여 권하지 않는다고.
처음에는 재능이 없다는 평을 받던 지환이었다.
그런 애가 연습만으로 그만큼 잘하게 됐으니 더 욕심을 낼만도 한데.
하준은 그게 혹시 멤버들을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우려스러웠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여야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서는 안 된다.
하준의 질문에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지환은 천천히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연기를 한 건 회사에서 권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막 기대하고 한 건 아니었어요. 형도 알다시피 제가 연기는 좀….”
지환도 무척 낯을 많이 가린다.
그건 함께 지낸 멤버들이 가장 잘 안다.
하지만 일이 일이다 보니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러다 보니 일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면 애가 기운이 없었다.
열심히 모으고 모아서 일할 때 다 써버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연기를 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지환 몰래 멤버들끼리 회의하기도 했다.
우리 애가 가서 괴롭힘당하진 않을지,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힘들진 않을지.
워낙 내색을 안 하는 동생이라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기도 했다.
우리 애 좀 잘 봐달라고 멤버들이 돈을 모아 촬영장으로 간식을 보내기도 했고.
이 모든 게 지환 모르게 진행된 일이었다.
간식도 일부러 지환이 촬영장을 가지 않는 날로 골라서 보냈으니까.
알면 부담스러워하면서 하지 말라고 할 게 뻔했다.
첫 드라마에서 그렇게 했다가 결국 걸려서 한 소리 들었고, 다음 영화 촬영 때는 미리 말하고 밥차를 보냈다.
그 후로도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지환을 살폈고, 생각보다 좋아하는 것 같아 기뻤다.
광고도 찍고, 인터뷰도 하고.
멤버들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고, 기회가 왔으니 일단 잡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노력하는 건 잘하니까.”
자기는 노력하는 것밖에 못 하지 않냐고 아직 한참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이 슬픈 눈을 했다.
하준은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 지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손길을 받던 아이가 웃었다.
“공부하는 동안 재밌었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열심히 배워두면 우리한테도 쓸모가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무대에서의 표정 연기, 뮤직비디오에서의 연기, 콘셉트 포토, 광고 촬영 등등.
연기를 써먹을 수 있는 곳이 무궁무진하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재밌었다면서 왜 그 후에는 안 하는 거야?”
“연기도 재밌지만, 전 노래가 더 좋고 언래블이 더 중요해요. 아직 노래도 잘하지 못하니까 노래에 집중하고 싶어요.”
자기는 멀티가 안되니 한 번에 하나밖에 못 한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것치고는 연기 연습도 놓치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다지만, 하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인 이상 더 먼 미래를 생각하자면, 자기만의 영역을 갖는 건 중요하다.
팀으로 쭉 함께하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순간이 오니까.
그래서 예능이나 연기 등 다양한 방면으로 각자 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씁쓸하지만 그게 여태까지 대부분 아이돌이 걸었던 길이다.
팀 활동은 활동대로, 개인 활동은 활동대로.
이렇게 되는 것도 운이 좋은 경우에나 가능했으니까.
더 많은 그룹이 쪼개지고 개개인만 살아남는다.
하준은 적어도 운이 좋은 경우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앞으로 일은 모르더라도 언래블 멤버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애들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도 알아야 했다.
최대한 회사에서 얻어낼 건 얻어내고 도움을 받아서 동생들을 크도록 도와야 하니까.
개인의 성장만 생각하기에 하준은 이미 지나치게 멤버들을 아꼈다.
선을 긋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해야 하나.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얼마 전 찬이와 얘기했을 때, 찬이는 예능도 좋지만 나중에 춤을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하준은 내심 지환이 나중에는 연기를 하지 않을까 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야 할 텐데.
“환아, 형은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했으면 좋겠다.”
지환의 마음을 어느 정도 듣고 난 후, 하준은 그동안 여러 번 고쳐 쓴 마음속 이야기를 꺼냈다.
헤헤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하던 지환은 금방 자세를 고쳐 앉더니 시선을 마주쳐왔다.
“다양하게 경험해보고 더 많이 배우고 그래서 네가 진짜 하기 싫어질 때까지 아이돌을 했으면 좋겠어.”
물론 모든 멤버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 삶에 언래블이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짐이라뇨!”
화들짝 놀라서 양손을 허우적거리는 동생의 어깨를 잡아 차분히 눌러주었다.
“우리는 같이 가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지금처럼 우리가 각자 자기 몫을 잘 해내고, 함께 하면 그게 언래블인 거야. 누구 하나가 눈치 보거나 짐을 지고 끌고 가는 건 언래블이 아냐.”
하준은 자신이 생각한 언래블의 정의를 지환에게 이야기해주며 그러지 말라고 했다.
은연중에 자꾸만 팀이라는 테두리 안에 자기를 가두려는 동생이 안쓰러워서.
서로 의지하고 부축해주면서 동등하게 걸어갈 때 비로소 언래블이라는 팀이 완전해진다고 믿었다.
잘게 흔들리는 지환의 눈동자는 잠시 모른 척했다.
모두 털어냈다, 괜찮다, 그렇게 말했지만 하준은 아직 지환이 무언가 부담감을 지고 사는 걸 안다.
어떤 프로그램에서든 지환은 늘 다른 멤버들을 더 많이 노출시키려고 애를 썼다.
다른 그룹은 서로 카메라 받겠다고 그렇게 난리라던데, 이런 거로 걱정할 줄은 몰랐다.
“연기는 나중에 더 열심히 하고 싶고, 지금은 노래에 집중하고 싶다는 네 마음은 알겠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걸 해.”
멤버들이 지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준이 대신 꾹꾹 눌러 전달했다.
“형이 전에 말했지. 우리는 네가 필요하니까 아마 널 찾아낼 거라고. 너한테도 우리가 필요했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는 말에 지환의 얼굴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작은 입술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달싹거리다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을 갈무리한 지환은 어느새 평소처럼 웃었다.
“저한테 우리 멤버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멤버들은 모를걸요. 고마워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