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Black swan(4)
결론적으로는 감독끼리의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전달이 잘못되어 연락해도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 정기운이 바로 지환에게 연락했던 것.
이구영은 지환에게 연락 후 기운에게 연락해서 일단 말은 해놨으니 다시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환의 번호를 넘겨주었고.
혹시라도 연락해 왔을 때 모르는 번호라고 안 받을까 봐 미리 알려준 것이었으나….
기운은 본인이 연락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 후 지환의 번호로 연락해 왔을 때 신나서 받았던 기운은 무서운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기운에게도 몇 명 어려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정윤 실장이었다.
그리고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정윤 실장의 목소리였다.
- 감독님, 오랜만이네요.
“아, 네. 오랜만입니다.”
기운은 왜 정윤이 지환의 휴대폰으로 전화했는지 의아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기운이 구상한 장면을 끼워 넣으려면 스케줄이 빠듯했다.
본 촬영의 일부 메이킹 필름처럼 촬영해서 급히 편집까지 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본 스토리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출시 전 홍보의 의미로 넣고 싶은 것.
꽤 많은 투자를 받고 시작된 촬영인지라 기운도 홍보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 저희 소속사 아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할 일이 있으셨나 봐요?
“아니, 그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정윤의 말에 기운은 잠시 당황했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게 능숙하기로 유명한 정윤치고는 날 선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 스케줄 관련해서는 당연히 회사와 이야기하셔야죠. 갑자기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렇게 연락하시면 애들 놀라요.
탓하는 말투에 기운도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졌다.
“구영 감독님 통해서 미리 언질 드린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습니까?”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무뚝뚝하게 답한 기운.
정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코웃음을 치더니 예의 그 차분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 구영 감독님이 연락하셔서 후배 감독을 소개해주고 싶다고는 하셨어요. 그게 정 감독님인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연락하시겠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고요.
그러자 이번에는 기운이 할 말이 없어졌다.
시일에 쫓기다 보니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중간에 전달하는 과정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환 군 번호를 전달받아서 이야기가 다 된 줄 알았….”
- 당사자와 이야기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번호를 넘겼다고요? 구영 감독님이?
기운은 자꾸만 말이 꼬이는 기분이라 속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예전에 ON 엔터의 배우와 제법 큰 충돌이 있었기에 강하게 나가기도 애매했다.
그때는 이 판을 알아가던 중이라 ON 엔터의 배우 풀을 얕봤다.
홧김에 ON 엔터 배우랑은 두 번 다시 일 안 한다고 소리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 후로 몇 년간 고생한 걸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 정 감독님은 저희랑 일 안 하시는 줄 알았는데.
혼잣말인 척 아픈 곳을 쿡 찌르는 정윤의 말에 기운은 얌전히 항복해야 할 시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잘 풀어놔야 추후 일하기 더 쉽다는 것도 알았다.
어릴 때의 혈기 넘치는, 아니 철없는 짓거리로 고생한 건 이제 풀 때도 됐다.
“정 실장,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 정 감독님.
기운이 한발 물러섰다는 걸 확인한 정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들이랑 척을 지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지만, 그때 정 감독의 태도는 불쾌했다.
당시는 지금의 배우실 실장이 오기 전이라 정윤이 배우들을 보살필 때였다.
현장은 감독의 소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를 자기 마음대로 굴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 배우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기에 ON 엔터도 적당히 대화로 풀어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판을 뒤엎은 건 정기운 감독이었다.
정윤이 보기에 당시 정기운은 예술 병 걸린 철부지 같았다.
그런 이들을 한둘 봐온 게 아니었던 정윤이었기에 마음대로 하시라고 강하게 대했던 것도 있고.
“정 실장, 분명히 언래블에게도 나쁜 제의는 아닐 겁니다. 우리 이제 앙금 털 때도 됐잖아요?”
잠깐의 침묵 후 한결 독기가 빠진 정윤의 답이 들려왔다.
- 가능한 날짜와 시간대 알려주시면 저도 스케줄 확인하고 말씀드릴게요.
“그럴 게 아니라 오늘 저녁은 어때요? 우리 작가님이랑 나랑 그쪽 인원들 해서.”
- 확인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제 번호 드릴 테니까 저희 애한테 연락하지 마시고 저한테 해주세요.
정윤은 감독들의 이런 태도가 지쳤다.
분명 예의를 아는 감독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감독이 급했다.
영상에 미친 그들은 당장 느낌이 왔을 때 찍어야 했고, 작품 관해서는 불도저 같은 면이 있었다.
평소에는 게을러빠진 인간들이.
속으로 ‘참을 인’ 자를 되새기며 가까스로 기운에게 욕하지 않은 정윤은 무난한 답을 내놨다.
정윤이나 소현 모두 오늘은 외부 스케줄이 없다.
그러니 바로 답을 했어도 무방했지만, 하는 짓이 얄미워 뜸을 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난 기운은 바로 선배인 이구영 감독에게 연락했다.
자신 때문에 피해 보는 일이 없어야 하니 빨리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선배, 네. 접니다.”
한바탕 대차게 깨질 걸 각오한 기운은 조심스럽게 방금 있었던 일을 고했다.
예상대로 구영은 크게 화를 냈다.
가뜩이나 가드가 높은 회사인데 그렇게 성급하게 움직이냐고.
왜 평소처럼 진득하게 기다리질 못하고 일을 그르치냐며 크게 타박했다.
일정에 쫓기는 기운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정 실장과 만나기로 했고 잘 풀겠다, 후에 꼭 밥을 사겠다 하고 달랜 후에야 간신히 끊을 수 있었다.
편성일이 당장 다음 달이라 홍보 물량이 풀리고 있었지만, 어딘가 부족했다.
다행히 기운은 차근차근 앞길을 잘 다져왔고, 이적 후 몇 편의 드라마를 흥행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높이 오를수록 매번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부담은 커졌다.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기운은 과거 자기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공채 출신인 그는 어린 날의 자신이 오만했음을 지금은 안다.
PD라는 직함이 얼마나 번쩍거렸는지, 그 빛에 눈이 멀었었다.
여러 선배가 그런 기영의 태도를 걱정 반 놀림 반으로 대했던 것도 이해한다.
당장 자신이 지금 후배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부디 구상한 대로 잘 풀리기를 바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약간의 행운이다.
* * *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늘 그렇듯 회사 분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주시리라 믿었다.
개인적으로 일을 받아오는 건 좋은 일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회사에 좋지 못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어차피 회사 몰래 일을 할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러니 그냥 믿고 맡기는 게 맞다.
얼마 후, 소현 팀장님이 휴대폰을 가져다주셨다.
연락한 사람이 누군지, 왜 연락을 했는지 등 현재 파악된 내용을 공유해주신 것.
자세한 내용은 더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라는 말과 함께 채팅방은 확인해도 괜찮다고 하셨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나는 소현 팀장님의 얼굴에 담긴 흐뭇한 미소에 갸우뚱했다.
“우리 지환이는 가만히 있어도 일이 막 달려드네.”
“좋은 거예요?”
“일 없어서 손가락 빠는 것보다야 낫지. 근데 너무 일복 많으면 안 되는데.”
지난번 진성 형을 통해 연결된 예능 PD님의 일, 그리고 이번 일.
둘 다 소개로 들어온 일이라 소현 팀장님이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일복이 많으면 본인이나 정윤 실장님처럼 야근하는 일상을 보낸다며 금방 시무룩해지셨다.
“저희는 지금도 별 보고 집에 가잖아요, 괜찮아요.”
“너희는 일이 많은 게 좋은 거긴 하다만….”
스케줄이든 연습이든 곡 작업이든 하다 보면 자정을 넘기는 일은 우습다.
그래서 회사 분들과 인사할 때 ‘내일 봬요’가 아니라 ‘조금 있다 봬요!’하고 농담 삼아 인사하곤 했다.
그때마다 질색하면서 몸서리치는 모습이 재밌어서 놀리는 거기도 했지만.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게 훨씬 슬픈 일이라는 건 모두가 안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소현 팀장님의 목소리에 희미한 연민이 묻어났다.
대다수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본인 발로 이 세계로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가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또래가 학교생활을 즐기고 친구들과 노는 동안 우리는 연습실 거울을 친구삼아 연습한다.
그렇게 해도 뜨지 못하면 전부 물거품이 되니까.
천장도 바닥도 없는 세계를 부유하는 건 흥분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저는 진짜 괜찮아요. 재밌고,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돈도 잘 벌고 있잖아요!”
장난스럽게 소현 팀장님을 껴안았다.
늘 우리를 걱정하고 더 나은 길로 이끌려고 애쓰는 사람.
물론 내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막상 하다 보니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언래블이라는 그룹의 아빠가 정윤 실장님이라면, 엄마는 소현 팀장님이다.
대표님은 삼촌쯤으로 해두면 맞으려나.
“그래, 우리 지환이가 물고 온 일이니, 팀장님이 단단히 한몫 뜯어낼게. 팀장님 믿지?”
“그럼요! 아주 왕창 뜯어내세요!”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팀장님은 정 감독님이 이번 드라마에 꽤 많은 투자를 받았을 거라며 씩 웃었다.
우리가 공양미 삼백 석을 중얼거릴 때와 비슷한 미소라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후로 팀장님은 씩씩하게 작업실을 나섰고, 포잉이 돌아온 건 그 직후였다.
‘계약자 놈아, 무슨 일 있음?’
‘아, 약간의 소동이 있었어.’
오늘도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품고 온 포잉을 한번 꼭 껴안았다.
익숙한 무게와 체온, 촉감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이후 포잉을 쓰다듬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더니, 포잉은 혀를 차며 내 허벅지를 툭툭 쳤다.
고생했다고 나름대로 나를 토닥이는 행동이라는 걸 알기에 히죽 웃었다.
‘그나저나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 있어?’
돌아온 김에 무슨 일인지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내가 질문을 끄집어냈다.
잠시 고민하듯 앞발을 까딱거리던 포잉은 금방 결론을 내린 듯했다.
‘계약자야, 내가 잠깐은 실체화를 할 수 있게 됐다.’
‘진짜?!’
실체화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포잉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타고난 균형 감각으로 안전하게 착지했지만, 갑자기 움직인 나를 타박하는 건 잊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내게 너무 조심성이 없다며 한참 동안 잔소리 폭탄을 터트린 포잉.
갑자기 크게 움직인 건 내 잘못이니 얌전히 잔소리를 들었다.
이럴 때 괜히 딴청 부리거나 모른 척하면 10분 혼날 걸 한 시간 혼난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잔소리는 시간을 거슬러 망둥이 습격 사건 때 튀어 나갔던 부분에서 멈췄다.
매사에 조심히 행동하라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되물었다.
‘그래서 진짜 실체화할 수 있는 거야? 중급 아직 아니잖아.’
‘하루 두어 시간 정도는 가능함. 앞으로 점차 길어질 거라고 하더구나.’
자기가 잔소리해놓고 지친 건지 한풀 꺾인 포잉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럼 이제 포잉한테 간식 줄 수 있는 거야?’
‘네 놈은 어째 늘 먹을 생각뿐이냐….’
‘나 먹는 거 아니잖아! 포잉 먹는 거!’
포잉은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지금 실체화 해보면 안 돼?’
‘여기서? 그러다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럼?’
‘그럼 언제 해줄 거야?’
‘나중에.’
어차피 늘 포잉을 보고 만질 수 있는 나는 실체화해도 큰 차이를 못 느낄 거라고 했다.
포잉은 간식 같은 사소한 것보다,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게 중요한 거라고 했다.
지금은 무언가 물리적으로 힘을 가하기 위해서 요정의 힘이 필요하다고.
여태까지 했던 녹음이나 카메라를 건드리는 일 등의 행동은 전부 요정의 힘을 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까먹고 다 기억하고 있다니까.’
‘네놈의 기억력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예전에 설명해준 내용이었고, 다 안다고 했지만 포잉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 그러면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응?’
‘내가 봐둔 곳이 있어!’
신난 내가 핸드폰을 꺼내 보여준 것은 고양이용품 사이트였다.
‘여기서 간식 주문하자! 포잉, 골라봐!’
한껏 신난 내 모습에 앞발로 이마를 짚는 포잉.
‘이 망할 놈의 계약자야….’
누가 뭐라고 하든 난 이날만을 기다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