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09)화 (409/456)

409. Black swan(3)

기어코 가사를 써보라며 곡을 주고 간 새벽 형들.

덕분에 노트를 펼쳐놓고 깨작깨작 생각나는 대로 적고 있었다.

멜로디를 듣고 생각나는 이미지를 적어 내리고.

장면이 떠오르면 장면을 적었다.

컴퓨터로 입력하면 더 금방이겠지만, 왠지 연필로 한자씩 눌러쓰는 그 맛은 또 다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컴퓨터로 타이핑할 때와 직접 자필로 적어 내릴 때 나오는 글이 달랐다.

콜라보 앨범은 새벽에서 두 곡, 우리 쪽에서 두 곡 정도를 넣자고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만들다 어울리는 곡이 있으면 한두 곡 정도는 추가될 수 있는.

평소 앨범을 만들 때와 달리 느긋하게 여유 있게 만들자고 했다.

우리가 이런 색을 낼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자고.

광오하기까지 한 가영 형과 다진 형의 히죽거림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웃고 말았다.

반다진은 제대하자마자 또 이상한 짓을 한다며 소현 팀장님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콜라보 앨범은 또 처음이라 멤버들도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준이 형과 경환 형은 기존 곡의 멜로디 라인부터 다 훑어보고 또 새로 곡을 쓰느라 바빴다.

영빈 형은 찬이와 세빈이를 끌고 가선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리를 내는 법부터 꼼꼼하게 다시 봐주고 있었다.

보컬 트레이너의 레슨과는 사뭇 다른 수업이었지만, 우리 막내들은 무척 만족하는 눈치였다.

모두가 신명 나게 준비하느라 바쁘게 돌아가던 그때, 나는 작업실에서 끙끙대고 있었다.

다진 형이 자기 곡이라며 내게 넘긴 데모 파일 때문이었다.

곡은 듣자마자 다진 형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온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경쾌하고 발랄한데, 밤이 아닌 한낮에 잔뜩 터뜨리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터져나가는 폭죽이 아닌 그저 폭죽이 바라고 바라서 피어나는 것 같은 느낌.

똘기라면 가영 형에게 뒤지지 않는다던 키스 형의 말이 찰떡같이 어울렸다.

처음에는 감도 안 잡혀서 이 곡만 온종일 듣고 다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던 곡은 포잉의 훈수에서 방향을 잡았다.

왜 꼭 처음부터 끝까지를 순서대로 적어야 하냐는 물음.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러게?’하면서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순서를 또박또박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나는 대로 줄줄 써나가다 보니, 내가 왜 굳이 그렇게 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고마움을 담뿍 담아 포잉을 한번 꼭 안았다 놔줬지만, 포잉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내 손등을 때렸다.

조만간 이야기할 게 있으니 아무도 없을 때 시간을 좀 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되어 캐물었지만, 별거 아니라며 앞발을 휘적거리며 요정계로 가버린 포잉.

부디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포잉을 배웅하고 그때부터 연필을 쥐었다.

어떻게 관리하는지 포잉의 털은 늘 빛이 날 것처럼 반딱거렸고, 극세사처럼 보드라웠다.

손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은 요망한 고양 요정님.

이것저것 적느라 지저분해진 노트를 내버려 두고 기지개를 켰다.

한참 동안 연필을 쥐고 있었더니 어깨가 아팠다.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푸는 사이, 핸드폰이 울었다.

“응?”

액정에 뜬 이름은 이구영 감독님이었다.

종종 안부 인사를 드리긴 하지만, 감독님이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네, 안녕하세요, 감독님!”

- 어, 환이냐? 잘 지내지?

“네. 저야 늘 잘 지내죠. 감독님은요?”

그렇게 자잘한 신변잡기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뜸을 들일 분이 아닌데.

워낙 솔직하게 툭툭 내뱉는 분이었는데 무슨 일이길래 이러시나 싶었다.

- 환아, 혹시 요새 너희 바쁘냐?

“저희요? 저랑 멤버들 다요?”

- 어어, 내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좀처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시나 슬슬 걱정됐다.

아직 앨범 준비는 준비 단계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앞으로 있는 스케줄을 몇 개 더듬어보고 많이 바쁘지는 않다고 답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도와드려야죠.”

여러모로 연을 만들어두면 좋은 분이니 척질 필요는 없었다.

빚을 지워두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고.

굳이 연기가 아니더라도 드라마나 영화에 삽입되는 곡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꽤 재밌는 작업이니까.

- 어휴, 너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사기꾼 놈들이나 독한 놈한테 붙잡히면 홀랑 잡아먹힐 놈일세.

“에이, 저도 아무한테나 이렇게 말 안 하죠. 감독님이니까 이렇게 말씀드리죠.”

주거니 받거니 서로 덕담을 늘어놓다 감독님이 겨우 입을 열었다.

- 내 후배 중에 괜찮은 놈이 하나 있는데.

“네.”

- 걔가 너희 이번 앨범 곡들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 네 연기도 인상 깊어했고.

“아, 정말요? 정말 감사한 말씀이네요. 부끄럽게.”

평소보다 밝은 톤을 유지하려니 이것도 힘들었다.

포잉이 앞에 있었다면 또 얼마나 비웃었을까….

- 그래서 걔가 너희랑 일을 한번 해보고 싶어 하는데. 시간 되면 한번 만나볼래?

“감독님이 많이 아끼는 후배분이신가 봐요. 직접 이렇게 말씀을 다 해주시고.”

- 얘가 좀 사회성이 부족해서 사람들이랑 부대끼고 그런 걸 잘 못 해. 일이라도 잘하니 여태 먹고 살았지, 에잉….

왜 회사로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은근히 돌려 물었더니, 쌓인 게 많은지 한탄이 쏟아져나왔다.

이구영 감독님은 다 좋은데 말이 좀 많은 편이었다.

적당히 대꾸하며 팀장님께는 직접 말하겠다, 회사로 연락해 주시면 바로 연결될 거 다 하고 감독님을 달랬다.

- 그래, 내가 곧 다시 연락하마! 아, 다음 작품에 나올 생각 없어? 나한테 너랑 아주 찰떡같은 캐릭터가 하나 있는데!

연기는 재밌지만, 본업에 더 충실하고 싶었던 터라 그 뒤로 들어오는 일들은 사양하고 있었다.

에둘러 사양하자 다음에 시놉시스 줄 테니 한번 보기라도 하라며 몇 번이나 아까워하셨다.

그렇게 감독님은 처음보다 훨씬 활기찬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정신없는 통화 후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쉰 나는 작업실을 나와 팀장님에게 곧 그 통화를 알렸다.

하지만 정신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소개한다는 후배가 누군지 듣지 못한 것.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이 녀석아.”

소현 팀장님은 가볍게 눈을 흘기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쉬운 쪽이 다시 연락하겠지. 애당초 소개해주고 싶으면 제대로 이야길 해야지. 왜 회사를 빼놓고 일하려고 굴어.”

팀장님은 애들한테 사탕 주면서 꼬여내는 나쁜 놈처럼 군다며 감독님을 한참 동안 흉보셨다.

그 말에는 공감하는 터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 없다면 다른 분들처럼 회사로 연락하면 되는 게 정석이니까.

그렇게 연락을 잊고 다시 가사 쓰는 것과 개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냥톡으로 무언가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졌다.

처음에는 또 사생인가 싶어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무심코 지나가는 메시지 중 시놉시스라는 단어가 눈에 보였다.

소개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주르륵 사진들이 올라왔다.

“뭐야, 이거 무서워….”

여태까지 사생들이 보내온 메시지와는 어딘가 달랐다.

찝찝함과 이상함을 느낀 나는 그길로 다시 핸드폰을 쥐고 팀장님에게 뛰어갔다.

“팀장님! 이상한 사람한테 연락 왔어요!”

“이상한 사람?”

하루에 두 번이나 네가 날 찾아 뛰어오기도 한다면서 웃던 팀장님.

내가 말한 이상한 사람이라는 단어에 금세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사생인가 아니면 찌라시 기자인가 등등 온갖 추측을 읊으며 핸드폰을 넘겨받은 팀장님.

“스팸이나 그 보이스 피싱?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메시지여도 링크만 안 누르면 되지 않아?”

“막 사진도 보냈더라고요.”

“사진?”

사진이라는 말에 팀장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변태 새끼일 수도 있으니까 우선 팀장님이 먼저 볼게.”

사생 중에는 제정신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오는 택배도 범상치 않은 것들이 많았다.

편지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우리 번호를 알아낸 후, 이상한 사진을 보낸 사람도 있었다.

해서 우리는 모르는 번호로 사진이 오면 우리가 확인하지 않는다.

처음에 멋모르고 눌렀다가 경환 형이 핸드폰을 고장 낸 후로는 무조건 매니저 형들이나 팀장님에게 달려갔다.

업무 관련 소식이라면 보통 회사를 통해 전달받았고, 지인은 사전에 번호를 주고받는다.

연예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았다.

팀장님의 손짓에 따라 조금 거리를 두 자 심호흡을 한 팀장님이 채팅방을 열었다.

“아니, 이 미친….”

“역시 사생이에요?”

채팅방을 확인한 팀장님은 험상궂은 얼굴로 무어라 마구 중얼거렸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대부분 욕설이라는 건 추측할 수 있었다.

우리 앞에서 욕할 수 없다며 늘 속으로 삼키곤 하시지만, 가끔 저렇게 한두 마디가 튀어나왔다.

“일단 사생은 아닌데. 아니,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이게 무슨!”

사생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한 내가 도대체 누구길래 저러시나 싶어 슬며시 옆으로 다가갔다.

“팀장님, 누군데요?”

“있어, 미친놈 하나.”

“네?”

“지환아, 일단 핸드폰 잠깐 팀장님이 빌려도 되니?”

“네.”

“이 일은 실장님이랑 이야기해야겠다. 작업실에 있을 거니?”

“네. 가사 쓰고 있어요.”

팀장님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아마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듯한 태도였다.

“그, 그럼 저는 가 있을게요.”

“그래. 핸드폰은 조금 있다 가져다줄게.”

결연한 얼굴을 한 팀장님은 사무실을 바람처럼 나섰다.

“팀장님 어딜 저렇게 가시는 거야?”

“아, 도연 형. 실장님한테 가신대요.”

서류뭉치를 안고 들어온 도연 형은 서포트 팀의 일원 중 한 명이었다.

평소에는 시한 누나와 도연 형이 주로 모니터링을 하기에 우리 일도 제일 많이 파악하고 있었다.

팀장님이 가까이 두고 아끼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그만큼 더 잘 챙기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두 분 다 우리를 예쁘게 봐주셨다.

“할 일이 태산인데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형, 힘내요….”

훤칠했던 얼굴이 퀭해진 도연 형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자, 형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내가 우리 지환이 안마도 받아보고.”

“에헤이, 안마야 언제든지 해드리죠.”

“평소에는 내가 널 해줘야 할 거 같은 게 문제지.”

“요새는 운동 열심히 해요….”

주거니 받거니 형과 일상 이야기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처음 형이 굉장히 선을 긋는 느낌이었던 걸 떠올리면 정말 크나큰 발전이었다.

“아, 맞다. 이거 먹어.”

“감사합니다!”

도연 형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복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쓱 무언가 내밀었다.

바스락거리는 포장지가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이렇게 가끔 다른 직원분들이 챙겨주는 간식거리가 유달리 달다.

“넌 좀 많이 먹고 살 좀 찌워야 할 것 같은데.”

“열심히 먹는데 살도 근육도 잘 안 붙네요.”

“열심히 먹는 게 닭가슴살이랑 풀 쪼가린데 살이 붙겠냐?”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형은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고 바쁘게 사라졌다.

작업실에 돌아와 주머니에 넣었던 간식을 꺼냈다.

조그맣게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견과류가 들어있어 가끔 하나씩 먹으면 피곤했던 몸에 활기가 돌았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고 입에 넣었다.

“달다….”

과분하리만큼 사랑받고 있었다.

회사 분들 처지에서는 그냥 캐시카우로 볼 수도 있을 텐데.

서포트 팀 분들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가 언래블을, 나를 아껴주셨다.

입에 넣은 초콜릿보다 그들의 사랑이 더 달았다.

나는 그 초콜릿 조각을 오래도록 입안에서 굴리며 그 사랑을 만끽했다.

이상하리만큼 가슴 근처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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