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 Black swan(2)
푸른 불꽃은 다행히 그 뒤로 보이지 않았다.
포잉도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면서도 한참 동안 불안해 보였다.
정령계에는 잘 가지 않던 포잉이 그 뒤로는 틈만 나면 정령계를 다녀왔다.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 내 요정님이 고생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포잉의 노력이 제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걸 안다.
포잉은 소원 요정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뿌듯한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그런 포잉을 알기에 믿는다고, 난 연약하니 포잉이 지켜주라고 장난치며 흘려보냈다.
당연하다는 듯 늘 내 옆에 있던 포잉이 없으니 곁이 무척 허전했다.
고개만 돌리면 나를 지켜보고 있던 포잉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건 조금 쓸쓸한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한국에서 이상한 현상을 보는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렸다.
일본에서는 잠깐 귀신에게 홀렸던 건가 싶을 정도로 평화롭던 일상.
그런 일상 가운데 갑자기 새벽 형들이 태풍처럼 등장했다.
“환이 너! 왜 전화 안 받냐!”
“네?”
연습실로 쳐들어온 다진 형.
왜 자기를 피하냐며 억울함 반, 서러움 반을 담은 얼굴로 들이닥쳤다.
가영 형과는 다른 종류의 재앙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연습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영문도 날벼락을 맞은 기분.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뒷걸음질 쳤지만, 금방 잡혀버렸다.
아무래도 나는 공포 영화와 같은 상황에 놓이면 제일 먼저 죽는 엑스트라가 될 것 같았다.
“아니, 형 일단 이것 좀 놓고….”
쥐고 흔들어대는 탓에 어지러워서 멤버들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갑자기 난입한 다진 형의 모습에 멍하니 지켜보던 멤버들은 차마 형을 떼어내지 못했다.
다진 형의 기세가 워낙 폭풍 같아서 찬이와 세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은 모양이었다.
“아, 좀!”
“환아, 괜찮아?”
급히 뒤따라 들어온 키스 형이 다진 형을 떼어내고 세비 형이 내 상태를 살폈다.
그제야 옆에 다가온 멤버들은 웃음을 꾹 참는 게 역력했다.
웃으면 내가 뭐라 할 게 뻔하니 억지로 참는 모습들이 참….
이렇게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 없다는 걸 실감하며 축 늘어져 버렸다.
“형, 너는 좀 생각이란 걸 하고 살라고 내가 몇 번 말하냐?”
“내 전화만 안 받으니까 그렇지!”
마치 가영 형을 대하듯 다진 형을 대하는 키스 형과 느긋하게 들어오는 가영 형.
“아니, 일단 저 모르는 번호는 안 받아요. 그리고 형 번호 저장된 거로 전화 온 적이 없는데요….”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다진 형의 말 중에 틀린 말을 정정해주었다.
아무리 번호를 바꾸고 무슨 짓을 해도 어디선가 유출되는 게 핸드폰 번호인지라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안 받았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멤버들도, 새벽 형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어차피 이 중에 사생들 전화 안 받아본 사람은 없으니까.
차단을 해도 해도 자꾸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고 메시지가 왔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전화를 받았다가 기겁하고 끊기도 했고, 이상한 사진에 핸드폰을 던지기도 했다.
덕분에 핸드폰이 고장 나 다른 기종을 구매하려던 경환 형은, 결국 이전과 같은 핸드폰을 사야만 했다.
모두 같은 핸드폰을 써서 좋다는 막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이기지 못한 것.
어쨌든 사실무근의 일로 나를 타박하던 다진 형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핸드폰을 형 쪽으로 밀어주자, 핸드폰을 확인한 다진 형도 멍청한 얼굴이 됐다.
“왜 내 번호 잘못 저장돼있냐?”
“가영 형이 알려준 건데요?”
그렇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가영 형에게 향했지만, 방긋 웃는 가영 형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반다진 번호 같은 거 있어봤자 우리 병아리한테 도움 안 될 거 같아서.”
“와, 이 미친 자가….”
가영 형의 대답에 멍해진 다진 형은 차마 우리 앞이라고 욕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던 한마디에는 참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말하지 않았는데 들린 기분?
“그럼 이건 누구 번혼데?”
“내 서브 번호.”
가영 형은 평소 제정신이 아니다가도 자신이 필요할 때만 철저했다.
작곡 의뢰받는 용도로 쓰는 서브 번호를 다진 형 번호라고 알려준 것이다.
어쩐지 다진 형이 답을 잘 안 하더라니….
가끔 안부 인사를 보내도 답이 잘 없어서 바쁜가 보다 했었다.
“난 환이가 피하는 줄 알았지.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에요! 대뜸 사람 괴롭히고!”
혼란하던 상황이 정리되자 혼자 후련해진 다진 형의 모습에 내가 버럭 성질을 부렸다.
갑자기 붙들려서 한참을 흔들린 덕분에 뇌가 출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놈의 형은 힘이 얼마나 좋은 건지 어지러운 게 가라앉질 않았다.
“형이 오해했네, 미안.”
“네가 고생이 많다.”
“내가 진짜….”
이런 상황을 벌인 주범 둘이 이토록 산뜻하게 말하니 화낼 기운도 사라졌다.
이 형들에게 정상적인 걸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새삼 크게 다가왔다.
좀 평범할 수는 없는 걸까?
한숨을 푹 내쉬며 오늘의 용건을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우리가 언제는 뭐 일 있을 때만 왔나.”
“그래도 연습 끝날 시간 맞춰 오신 걸 보면 얘기할 게 있는 것 같은데요?”
세비 형에게 기대 있던 내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는 사이, 준이 형이 입을 열었다.
새벽 형들의 난입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다진 형까지 더해지자 더 정신이 없었다.
“곡 가져왔지.”
“벌써요?”
처음 콜라보 앨범을 내자는 요청이 왔을 때, 회사에서도 흔쾌히 허락했다.
슬슬 외부에서 곡 작업 관련해서 연락이 오고 있다며 몸값을 더 올릴 필요가 있다고 하던 차였으니까.
준이 형이나 경환 형의 곡을 들어보고 싶다고 찔러오는 사람도 있었고, 내게 가사를 써달라는 사람도 있다고 하셨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우리 앨범 작업을 할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라서.
바로 직전 새벽 앨범의 타이틀 곡 가사를 써준 게 내 이름값에 도움이 됐다는 팀장님의 설명.
그때 팀장님은 웬일로 새벽이 도움이 됐다면서 활짝 웃으셨다.
찬이가 주춤거릴 정도로 어딘지 무서운 느낌의 미소였다.
그러던 찰나에 새벽 형들의 제의는 회사에서도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하지만 바로 작업에 들어가기엔 우리도 새 앨범 활동 중이었던 터라, 곡만 먼저 추려보기로 했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만난 자리에서 가영 형과 다진 형은 곡을 다시 손봐야겠다며 들고 갔다.
그사이 우리는 계속 스케줄을 이어 나갔고 일본까지 다녀온 것.
별말이 없길래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싶었더니 이렇게 쳐들어왔다.
이 모습에 적응하는 날이 오긴 할까….
세빈이가 그런 형들 모습에 한숨을 폭 내쉬더니 한마디 했다.
“우리가 이해할게요. 형들도 고생이 많아요.”
“…내가 우리 막내 병아리한테 이런 말도 듣고. 진짜 저 인간들을 버리고 오든가 해야지.”
키스 형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살벌한 눈으로 가영 형과 다진 형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우리 막내의 위로에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정작 당사자인 그 둘은 찬이랑 준이 형을 붙들고 뭐라 뭐라 떠드느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더 들어봤자 정신없을 테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곡은 나온 거예요?”
“어. 근데 가사는 네가 썼으면 하더라.”
“엥? 왜요?”
세비 형은 온기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다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포잉은 세비 형을 마음에 들어 했다.
올곧은 사람들은 보통 나무 향이 난다고 했었다.
준이 형이 밤나무라면 세비 형은 호두나무 같다고.
한결같고 품이 넓은 사람.
그래서 예민하다는 평을 받는 키스 형도 세비 형에게는 약한 게 아닐까?
“유성우 가사가 너무 좋았거든.”
온전한 믿음이 흘러넘치는 단단한 말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아니, 형들이나 우리 애들도 다 잘 쓸 텐데….”
무어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웅얼거리자, 세빈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같이 하면 되지! 나도 형이 쓴 가사 좋아해.”
“뭐야, 병아리 왜 또 쪼그라들었어.”
“부끄러워서 그런대요.”
“해요, 한다고요!”
그사이 영빈 형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키스 형이 내 꼴을 보고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이들에게 너무 약했고, 부끄러울 뿐 싫은 게 아니었기에 결국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더 많이 좋아하면 진다는 말이 있나 보다.
포잉이 잠깐 자리를 비워서 어찌나 다행이던지.
* * *
“선배, 걔네 누구야, 언래블 번호 있죠?”
“언래블? 아, 지환이.”
“네. 걔네요.”
“걔네 번호는 왜?”
이구영은 오랜만에 후배가 밥이나 먹자고 불렀을 때부터 무언가 꿍꿍이가 있겠거니 했다.
한참 촬영 중이라 바쁠 텐데 뜬금없이 밥을 먹자는 것부터가 수상했다.
워낙 대중없이 연락하는 놈이라 그러려니 하고 나왔더니 밥보다 술이었다.
늘 있던 일이라 웃으며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잔이 오갔다.
“걔가 시선을 끄는 게 있다면서요?”
“맞아. 미영 씨 알지? 어지간한 사람이냐. 근데 그 한미영이가 마음에 쏙 들어 하더라.”
이구영 감독은 ‘별도시’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피식거렸다.
한미영 작가는 워낙 깐깐해서 감독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걔 연기가 그때 처음이라며.”
“응, 처음에는 확실히 어설퍼서 갸우뚱했는데 아주 악바리야. 매일 매일 달라.”
이구영 감독은 어린 배우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 이구영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기운 감독은 수염이 올라와 까슬해진 턱을 문질렀다.
“너 인마, 내가 그 버릇 고치라고 했지.”
“뭐요?”
이구영은 그런 후배의 모습에 못마땅한 듯 쳐다보다 기어코 한마디 했다.
“호기심 생기면 그렇게 주변 캐는 거 하지 말랬잖아. 차라리 직접 부딪히라니까.”
“아.”
구영의 타박에 정기운은 멋쩍게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정기운은 무척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해 사냥했고, 언제나 실패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런 기운의 레이더망에 언래블이 걸린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노래 하나를 들었는데 드라마랑 잘 어울릴 릴 것 같아서 좀 어떻게 써먹어 보고 싶더라고요.”
“그게 언래블 노래고?”
“네. 근데 또 찾아보니까 거기 멤버가 선배 드라마에 나왔다길래 궁금해서요.”
선배가 사람은 잘 보지 않냐면서 은근히 띄워주는 정기운은 얄미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나쁜 치는 아니었다.
“원래는 되게 잠깐 나오는 역할이었다.”
“그 임지웅이요?”
“어. 한 작가가 엄청 고민했거든. 원래 두 장면 짧게 회상으로 나오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이구영 감독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현장에서 어떤 태도였는지, 무엇을 했는지, 누구에게 연기를 배웠는지.
카메라로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카메라 밖의 공지환은 어떤 피사체인지 한참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던 정기운은 이구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좀 연결해줄 수 있으세요?”
“그냥 회사로 연락 넣지, 왜?”
ON 엔터로 연락해도 될 텐데 굳이? 싶었던 구영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기운이 난처한 듯 웃었다.
“제가 예전에 ON 엔터 배우랑 좀 트러블이 있어서.”
“너 그러게 성질 좀 죽이라고 했지, 내가.”
구영은 기운의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예전에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그 배우도 잘한 것은 없지만, 기운이 사납게 대한 것도 맞으니까.
“워낙 다사다난했던 애들이라 그런지 거기 가드가 엄청 단단하던데.”
“이야기 잘 되면 제가 꼭 밥 살게요.”
“그래 놓고 입 싹 닦으면 가만 안 둔다?”
“에이, 제가 언제 빈말하는 거 보셨어요?”
그렇게 두 감독이 쑥덕거린 다음 날.
지환은 핸드폰을 들고 소현 팀장에게 달려갔다.
“팀장님! 이상한 사람한테 연락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