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05)화 (405/456)

405. 물 만난 물고기(4)

첫날은 인터뷰와 현지 직원들과 만나느라 끝나버렸다.

밖에 나가서 구경도 하고 싶었고 새로운 음식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우진 형과 종범 형은 마지막 날에 자유 시간을 줄 테니 오늘은 일찍 쉬라며 우리를 막아섰다.

다른 나라에 왔다는 설렘과 구경 다녀도 사람들이 모를 거라는 기대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아직 형들도 현지 사정을 잘 모르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처하기 힘들다는 말.

형들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기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찬이를 달랬다.

시무룩한 얼굴로 영빈 형 팔을 붙들고 꼼지락거리는 세빈이 얼굴이 안쓰러워서 형에게 물었다.

“우진 형, 그럼 저희 먹고 싶은 것 좀 부탁드려도 돼요?”

“그럼. 안 그래도 저녁으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밖에 나가서 먹방 찍겠다고 여행 가방을 쌀 때부터 노래를 불렀던 찬이가 다시 눈을 반짝거렸다.

“저는 그럼 소유 라멘이랑, 만두랑 오코노미야키요!”

“튀김이 맛있다던데. 전 튀김 먹고 싶어요. 아, 무슨 고기덮밥? 그런 것도 있다던데.”

“부타동?”

“그게 뭐야?”

“돼지고기에 간장 양념해서 구워서 밥에 얹어 먹는 그런 거.”

찬이가 주섬주섬 메뉴를 읊기 시작하자, 슬금슬금 경환 형이 다가왔다.

언제 다 찾아본 건지 찬이는 경환 형의 질문에도 척척 다 대답했다.

아니, 평소에도 그렇게 열심히 좀 해보지?

준이 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찬이를 바라보았지만, 고삐 풀린 찬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편의점에 뭐가 되게 많다던데. 디저트는 편의점 간식으로 하자.”

한껏 신난 찬이는 멤버들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추천하며 편의점 이야기까지 꺼냈다.

그렇게 끝도 없이 메뉴를 불러대는 모습에 질린 매니저 형들.

빠른 속도로 메뉴를 받아적던 종범 형이 멤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가능할 거 같은데요?”

“사람이 여섯인데, 뭐 괜찮지 않을까요?”

“일단 형이 나가서 적당히 보고 사 올게.”

밖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부르짖은 찬이는 만족한 듯 보였다.

“그래, 일단 팀장님한테 말씀드릴게.”

“아앗….”

방금까지 새로운 메뉴를 먹어본다고 신나 하던 멤버들은 소현 팀장님이 언급되자 움찔하고 몸이 굳었다.

늘 먹는 것에 조심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덕분에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

새로운 도시에 왔다고 그 고삐가 전부 풀릴 수는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우진 형의 눈치를 살피며 애처롭게 바라보자 그 모습이 못내 웃겼던지 종범 형이 피식 웃었다.

“너희 먹고 싶다는 거 대부분 허락해주실 거야.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그래도 조심하긴 해야 해. 혹시라도 물갈이하면 큰일이니까.”

염려가 깃든 형들 목소리에 우리 애들도 배시시 웃었다.

“조심할게요!”

“그럼 다녀올게. 일단 놀고 있어.”

우리를 남기고 호텔 방을 나가는 형들.

“이제 좀 각자 방에 가.”

“왜? 이제 놀아야지.”

“가서 놀라고. 나 좀 두고.”

조금이라도 누워있고 싶었던 내가 멤버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혼자 방을 쓰는 김에 좀 편하게 있고 싶었지만, 이놈의 껌딱지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준이 형과 영빈 형도 각자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옆에 냉큼 앉는 막내 라인.

“우리 내일 스케줄을 점검할까?”

“질문지도 미리 챙겨야죠.”

내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갑자기 일정 대비를 하자며 부산을 떨었다.

‘아무래도 그른 것 같음.’

‘하아….’

익숙한 상황에 나에게 포기하라고 중얼거리는 포잉.

아무리 내가 너희 팬이라지만, 개인 시간도 필요하다고….

터덜터덜 걸어서 비워둔 자리에 앉자, 피곤해진 내 얼굴과 반대로 멤버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후딱 끝내고 각자 가서 씻어요. 씻고 밥 먹어야지.”

“밥은 같이 먹을 거지?”

“그래야 다 같이 다양하게 먹지.”

그래, 어림도 없구나.

아무래도 혼자만의 휴식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 * *

아직 일본 공식 앨범이 발매된 건 아니기에 활발한 활동은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장님을 통해 들은 말에 따르면 달리 꽤 많은 접촉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왜요?’하고 되물어 볼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기 있다는데 그걸 왜냐고 물어보는 우리 모습에 실장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셨고.

머쓱해진 우리가 우물쭈물하자 옆에서 소현 팀장님은 신나게 웃어버렸다.

늘 그렇듯 푸근하게 웃는 우진 형과 이제는 일상처럼 한숨을 내쉬는 종범 형.

엉망진창인 상황 속에서 정윤 실장님이 이마를 부여잡고 무언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도 소현 팀장님에게 욕한 것 같았다.

“너희가 고생했던 과거 일들이 그들 취향이었던 것 같아.”

유난히 영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일본의 아이돌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재능있고, 끼 있는 사람들이 연습생이 되고 그중 가장 잘하는 사람이 아이돌로 데뷔한다.

물론 노래는 기본으로 잘해야 하고, 춤과 연기도 배운다.

기본 매너와 다양한 외국어도 어지간한 규모의 기획사에서는 가르치고.

우리끼리 자조를 섞어서 말하길, 만능이 돼야 아이돌이 될 수 있다고 하기도 하니까.

캐릭터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 소양이 부족해도 대차게 욕먹는다.

하나하나 발언을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반면, 일본은 성장형 아이돌을 선호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얻은 우리 인기의 내막을 듣고 나서는 두 번 다시 묻지 않았다.

우리가 겪었던 여러 사건·사고를 그네들은 고난으로 받아들였고, 이겨낸 것을 승리로 표현했다.

불우한 가정사와 악의 핍박을 이겨낸 소년들.

심지어 준이 형과 영빈 형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는데도 그 내용은 모두 묻혔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자기들 입맛대로 우리를 재단하는 듯한 태도와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지기에.

하지만 정윤 실장님은 시무룩해진 찬이와 세빈이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결국 그들을 붙들어 놓은 건 우리 실력이라고.

계기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너희 노래를, 너희가 찍은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거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물론 말도 안 되는 프로그램은 여기서도 출연하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네. 저희야 실장님도 팀장님도 믿죠.”

그동안 회사는 우리 이미지를 하나로 낙인찍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과격한 발언이 주를 이루는 예능은 아무리 시청률이 높아도 출연하지 않았다.

최대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엉뚱할지언정 우스꽝스러워지지 않는 프로그램을 골랐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른 아이돌보다 방송 출연이 적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라디오나 자체 제작한 영상으로 팬들의 갈증을 달래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상 영상뿐만 아니라 미션 영상도 가끔 우리가 보고 놀랄 만큼 많은 뷰 수를 자랑했다.

더 가끔은 출연한 프로그램의 게스트나 MC분들이 우리 미션 영상에 관해 묻기도 했다.

그런 회사 분위기를 알기에 낯선 나라에 와서 다시 적응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눌러둘 수 있었다.

긴장과 설렘 사이.

우리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멤버들의 얼굴에 다시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가 서로를 믿는 만큼 이제는 회사 분들도 믿으니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던 멤버들의 얼굴이 편안해지자 실장님도 함께 다정히 웃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한 팀이니까.

그리고 이어진 실장님의 질문.

“얘들아, 근데 너희 무서운 이야기 좋아하니?”

방금까지 굳건했던 믿음은 실장님의 질문 한마디에 바사삭 금이 가버렸다.

무서운 이야기라뇨, 실장님…?

* * *

“こんにちは、ともに解決していく未来 「Unravel」です!”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간략하게 그룹 이름만 말할 건지, 평소대로 할 건지 고민하던 인사도 결국은 평소대로 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일본에서 처음 하는 인사니까 더욱 제대로 하고 싶었다.

흥미롭다는 듯 우리를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일부 시선에서는 좋지 못한 느낌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쓸 만큼은 아닌 것 같아 반발심을 꾹 눌렀다.

어디에서든 느껴왔던 감정이고 이제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눈빛이니까.

적당히 주고받는 인사와 프로그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에서처럼 소현 팀장님을 통해 들었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한국에서처럼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평소 방송의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역시 여름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죠. 더위를 이기기에도 이만한 게 없어요. 한국에서도 그런가요?]

“한국에서도 여름에는 무서운 이야기에 관한 프로그램이 많아요. 다만, 저희는 자주 즐기지 않는 편이에요.”

[에, 어째지요? 역시 무섭기 때문인가요?]

“저희 중에는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멤버도 있고, 좋아하지 않는 멤버도 있어요. 그래서 서로 배려하는 편입니다.”

MC는 리액션이 굉장히 큰 편이었다.

익살스러운 말투는 기분 나쁘기보다는 유쾌한 편이라 모두가 웃을 수 있었다.

어려운 단어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우리도 듣는 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오늘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시즌제로 진행되는 예능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괴담 프로 정도 되려나?

유명 영 능력자와 연예인 패널들이 나와 자신들이 겪은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는 방송이었다.

혹시 싶어 포잉에게 물었더니 대단치 않은 능력이라고 콧방귀를 끼었다.

다행인 건 실제로 무서운 일을 체험하지는 않고 이야기만 나눈다는 점이었다.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이라 일본 연예인들도 출연을 기대하는 곳이라고.

시청 연령도 고루 분포되어 있어, 대중에게 얼굴 도장 찍기에는 이만한 프로그램이 없다고 했다.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포잉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포잉은 오늘 이 자리가 영 못마땅한 듯 보였다.

이 스튜디오도 마음에 안 들고 사람들도 영 내키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내가 무서운 것에 약한 걸 알아서 그런지 보호자로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런 포잉의 귀여운 모습에 안정을 되찾은 나는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계약자 놈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불러라. 다 터트려버리든가 할 테니까.’

‘괜찮다니까. 포잉만 내 옆에 있으면 난 괜찮아. 지켜줄 거지?’

‘쯧, 희멀건 것이 곧 드러눕게 생겨서는.’

포잉은 정 못 견디겠으면 여기 기기를 고장 내기라도 할 테니 바로 말하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가뜩이나 그런 쪽으로 약한 내가 심적으로 타격받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우리도 한두 가지 정도는 이야기해야 해서 세빈이와 찬이가 준비해 두었다.

오늘 통역은 소현 팀장님이 직접 맡아주셨다.

출발 전, 전문 통역사를 고용하려던 정윤 실장님에게 소현 팀장님이 직접 하겠다고 말한 것.

그편이 더 마음에 놓이는 건 모두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소현 팀장님은 그냥 옆에만 있어도 귀신이 도망갈 것 같아서 든든했다.

물론 팀장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내 목숨은 하나라 무척 소중했으니까.

[제가 드라마 촬영 중에 겪었던 일입니다. 산속에서 추격 장면을 찍느라 다들 지쳐있던 때였어요.]

게스트 중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어떤 분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꽤 인기 있는 남자 배우라고 들었던 게 생각났다.

생각보다 이야기는 훨씬 흥미진진했다.

액션 장면을 촬영하던 도중 갑자기 조명이 나가버렸고, 그때부터 기이한 일이 시작되었다는 내용.

이야기를 통역해주시는 소현 팀장님의 차분한 목소리에 몰입하던 도중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 배우분의 뒤쪽에서 무언가 푸르스름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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