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물 만난 물고기(1)
1위 공약을 열심히 궁리하던 우리는 뮤직비디오 때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는 것으로 보답하기로 했다.
우리가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 입은 의상이 여러 가지여서 그중 조금 더 그럴싸한 것으로 골랐다.
나는 이번 무대 의상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그거나 이거나 치렁치렁하긴 마찬가지니까.
우리가 적극 추천해서 가운을 걸쳤지만, 영빈 형은 내내 어색해했다.
입고 춤추기 좋은 옷은 아니지….
은색의 안경까지 낀 영빈 형을 찬이가 유독 좋아했다.
영빈 형이 박사님 같다고 손뼉까지 치면서 반짝거리는 눈을 했다.
그 후에는 칭찬인 듯 놀리는 듯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옆에서 조잘대며 붙어있었고.
그러다 영빈 형 얼굴이 핼쑥해지자, 준이 형이 ‘힘찬아’하면서 다정히 부른 뒤론 얌전해졌다.
나는 언제쯤 준이 형처럼 찬이를 제압할 수 있을까?
양장을 갖춰 입은 준이 형이나 멜빵을 멘 찬이는 익숙한 듯 몸을 움직였다.
여태까지 무대 의상에는 제복이나 슈트가 많았기에 이미 적응한 상태.
호위무사 같은 한복을 입은 경환 형은 나무젓가락을 들고 칼이라고 흔들어댔다.
좋다고 똑같이 젓가락을 들고 칼싸움마냥 휘두르던 막내 라인.
한껏 신나게 놀던 막내 라인은 가희 누나의 불호령에 다시 얌전해졌다.
무대 올라가기도 전에 의상 망가지면 어쩔 거냐는 타박에 공손한 몸짓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게, 내가 혼날 줄 알았다고 한마디 덧붙였더니 얄밉다고 궁시렁거리기도 했고.
세빈이는 도련님 같은 한복을 입었다.
기존 대형과 춤의 분위기를 고려해서 최대한 맞출 수 있는 것으로 고르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됐다.
“솜뭉치들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의 바람을 영빈 형이 대신 입 밖으로 꺼냈다.
마주 보며 방긋 웃은 우리는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 * *
“솜뭉치들, 너무 고맙고 사랑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언래블 되겠습니다!”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1위’라는 말.
이제는 왈칵 눈물을 터트리진 않았지만, 그만큼 더 많이 웃었다.
다른 가수분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보낼 수 있었고, 신나게 응원봉을 흔드는 솜뭉치들을 볼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 하나, 하나에 적응해가는 우리가 모두 대견했다.
‘계약자 놈아, 너 진짜 할 수 있음?’
‘할 수 있다니까!’
본무대에서 뮤직비디오 의상을 본 솜뭉치들은 평소보다 더 크게 응원해줬다.
평소의 1.5배 정도 신남이 느껴지는 환호성.
그 환호를 먹고 자라는 우리는 그만큼 평소보다 텐션이 훅 뛰어올랐다.
1위 발표 이후 이어진 앵콜 무대.
동생 라인들이 형 라인을 어부바해주기로 했다.
멤버들은 내가 형들을 업지 못할 거라고, 그 상태로 노래 부르는 건 무리라고 말렸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다고 떼를 쓰자 심각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몇 킬로그램인지 묻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그렇게까지 고민할 일이야?
산산조각이 난 내 자존심….
포잉마저 자신이 힘을 좀 쓰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다 넘어지면 둘 다 다친다고.
형 중에 가장 가벼운 준이 형을 직접 업어주는 걸로 증명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해했다.
물론 비틀거리고 버겁긴 했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만 업었다가 내려주라고.
영빈 형과 준이 형이 몸무게는 비슷하지만, 준이 형이 조금 더 날렵하니 다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오늘은 여태까지 고생한 형들을 저희가 업어주기로 했어요!”
활짝 웃는 찬이는 어렵지 않게 경환 형을 업었고, 세빈이도 영빈 형을 업었다.
“형, 진짜 나 믿죠?”
“그럼. 형은 언제나 널 믿어.”
파들거리는 입꼬리가 준이 형의 불안을 대신 알리는 듯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해하는 형을 업자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솜뭉치들이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형들이 다리가 길고, 어정쩡하게 업다 보니 얼마 못 가 다시 내려왔다.
그 상태로 각자 파트를 찾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까지 목표였는데.
그래도 이제는 솜뭉치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최약체 아니라고.
형들도 업을 수 있다고.
* * *
- 오늘 공방 간 뷰어들 좋겠다….
우리 작은화니, 조그만 애긔가 부리 한껏 내밀고 귀여운 짓 했다면서…?
ㄴ (날개를 파닥이는 흰머리 오목눈이 사진) 오늘 자 작은환ㅋㅋㅋㅋㅋ 이거랑 찰떡이야….
ㄴ 준이 업고 다리 후들거리는 데도 웃고 있더라ㅠㅠㅠㅠㅠ 오늘도 귀여움 과다로 사망 ㅠ
ㄴ 그에 비하면 울 막둥이가 둘째 형 휘리릭 업어버려섴ㅋㅋㅋㅋㅋ
ㄴ 영빈이 얼굴 터질거 같더랔ㅋㅋ토마톤줄 알았자나 ~~
ㄴ 영빈이 다리 한쪽 질질 끌리는뎈ㅋㅋ그것까지 넘모 기여운것ㅜ
ㄴ 오늘 뮤비 의상부터 어부바까지 완벽했다 ㅠ 파트 바꿔 부르기 안 해도 괜찮아! 이게 더 좋아!
ㄴ ㅋㅋㅋㅋ뷰어들 그러고 보면 찬이가 경환이 업은 건 너무 자연스럽게 스킵했엌ㅋㅋ
ㄴ ㅎㅅㅎ 그건 평소에도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자나? 신기하지 않음
솜뭉치들은 오늘 자 음악방송에서의 1위 공약을 두고 마음껏 즐거워했다.
언래블 공식 최약체인 지환이 리더 하준을 업었다는 건 솜뭉치들에게는 무척 신기한 일이다.
실제로는 운동을 빠짐없이 하는 데다 늘 격렬한 안무를 소화해야 하는 아이돌이니 체력이 나쁘진 않을 터.
키도 아주 작은 편은 아니고, 객관적으로 보면 작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그런 지환의 주변을 늘 그보다 크고 몸이 탄탄한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일 뿐.
게다가 같은 팀에서 제일 작고 가냘프던 막내가 일 년 사이 폭풍 성장을 거듭해버려 더욱 비교됐다.
멤버들이 모두 자랄 동안 지환은 자라지 못했으니까.
덕분에 간혹 다른 여자 연예인이나 어린 친구들과 있는 지환의 키를 실감하면 놀라곤 했다.
‘우리 애가 저렇게 크다고?’
워낙 선이 가늘고 여린 느낌을 주는 터라 본래 키나 덩치보다 작아 보였다.
예전 커뮤니티는 친한 사람들끼리 복작복작하는 오붓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몇 번의 성장통과 함께 부쩍 그 수가 늘어난 후에는 언제나 상시 개장 중인 아웃렛 같아졌다.
멤버들의 온갖 포인트를 앓는 글과 각자 좋아하는 내용을 쓰며 소리치는 뷰어들.
중간중간 분탕 종자들이 나타나지만, 솜뭉치들은 절대로 먹이를 주지 않았다.
그런 일에 휘둘리기에는 멤버들이 겪어온 일이 작지 않았고, 함께 자라온 솜뭉치들은 단단했다.
압축 솜의 단단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 이번 뮤비 해석은 그래서 누가 할래?
일단 난 아니야….
ㄴ 야… 해석 글인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자나….
ㄴ 22… 이렇게 낚이다니. 자존심 상해!
ㄴ ㅋㅋㅋㅋ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은지! 나두 아닌 거 같아ㅋㅋㅋㅋ
ㄴ 아씤ㅋㅋㅋㅋ 그 궁예 쌤인 줄 알았자나!
이번 뮤비는 유독 무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징들이 넘쳐났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표현들도 적지 않았지만,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많았다.
- 해석 영상 중에 제일 그럴싸한 거 들고 옴!!
난 이게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해!
한 솜뭉치가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영상의 링크를 남겼다.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해석으로 유명한 스트리머였다.
그녀는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와 좋은 발음, 섬세한 해석으로 호평받는 이였다.
영상을 재생시키자 화면에는 이번 뮤직비디오의 검은 문이 등장했다.
- 안녕하세요, 몽당연필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알아볼 뮤직비디오는 언래블의 ‘그믐달’입니다.
스트리머는 해석하는 내내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난해한 뮤비였다며 말을 이었다.
- 사진이나 문을 이용해 공간을 분리해서 장면을 나누는 표현은 종종 볼 수 있는 장치죠. 사진은 어떤 장면, 순간을 의미하고 문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장치고요.
여태까지 언래블의 컨셉 포토와 뮤직비디오에서 사용했던 사진이 흩어져 있는 장면과, 문이 등장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 언래블은 세계를 점차 확장시켰고, 이제는 언제 어디에서 언래블이 나타나도 개연성이 훼손되지 않아요.
스트리머는 개연성을 훼손시키지 않고 세계를 확장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처음부터 계획을 짜놓는 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빈틈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뮤직비디오는 계획했던 일부만을 하나의 세계관에 넣고, 주기를 끊어서 사용한다고 했다.
- 무척 좋은 시도이지만, 세계관의 확장이 지나치면 지루해져요. 그걸 ON 엔터에서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짧게 이어지는 장면의 설명 사이 본인의 감상도 조금씩 섞여 있었다.
처음 콘셉트 사진에서 등장한 사진들과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한 정원이 비교하는 장면.
사진을 조작해 흐릿한 윤곽만 남겼던 건물과 뮤직비디오상의 건물이 일치하는 것을 밝혔다.
더불어 백색의 꽃들은 지환과 지환 같은 삶을 선택하는 멤버들을 의미하는 듯하다고.
홍매화 정령으로 추측할 수 있는 후반의 지환 모습과 다양한 옷차림의 멤버들.
그리고 지환의 희생과 멤버들의 회복.
하지만 붉게 변한 멤버들의 눈동자를 토대로 추리하자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한 해 한 달 한 날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기를 원하니]
낡은 편지를 소중히 매만지는 힘찬과 세빈의 모습이었다.
- 유명한 구절이죠. 삼국지연의의 도원결의 장면입니다. 이걸로 언래블은 오래전 의형제를 맺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지환이 희생했고, 멤버들은 긴 삶을 지속하며 지환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스트리머는 뮤직비디오를 역순으로 하나씩 되짚어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환은 매화나무 정령 같은 게 아닐까 한다는 말에는 약간의 웃음도 묻어났다.
그들의 다짐을 상징하는 듯한 장신구와 편지, 한쪽에 고이 걸려있던 족자.
‘이번에도 실패’라는 문장으로 미루어보아 오래전부터 반복된 일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무덤으로 보이는 꽃 더미가 주는 애잔함과 그 앞을 자신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감싸는 장면.
다른 장면을 통해 그 상징물들이 과거에도 멤버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임을 추측할 수 있다며 여러 장면을 잘라 보였다.
심지어 이전 ‘samsara(輪廻)’ 뮤직비디오에서의 장면을 이번 뮤직비디오와 나란히 놓고 설명하는 예리함을 보였다.
중간에 눈동자 색이 변하는 것을 보아 그들은 인간이 아니며, 지환에게 권하는 붉은 액체는 그가 자신들처럼 변하길 바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설명으로 이 스트리머가 왜 인기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간혹 나타나는 그림의 상징적인 의미와, 문신처럼 멤버들 몸에 그려진 문양의 뜻까지 풀어냈다.
카메라 렌즈로는 멤버들이 보였지만, 정작 찍은 사진에는 없던 멤버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지환의 손길에 따라 나타난 멤버들의 모습.
이런 상황을 미루어볼 때 결국 그들은 원하는 결말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한다고.
그렇게 영상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 후에는 가사와 멜로디에 관해서도 풀어냈다.
- 솔직히 놀랐어요. 처음에는 어떤 악기 소리인가 했는데, 그게 모스 부호일 줄은 몰랐거든요.
이 부분에서 많은 수의 솜뭉치들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 이 곡은 그믐달이라는 제목과 멜로디 라인에 깔아둔 모스 부호로 줄곧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원, 무한대 이런 것들이죠.
가사에 나온 오래된 달, 지는 달, 손톱달 모두 그믐달을 의미한다는 말.
더불어 모스 부호가 의미한 ‘Infinity’.
아마도 무한히 이어질 그들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한다며 영상의 설명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영상을 모두 본 솜뭉치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상의 주소가 입력된 글에 댓글을 달았다.
- 모스 부호라고? 나만 몰랐어?
- 삼사라 때 그 진주 브로치가 저 검 장식에 달린 진주라고? 난 왜 목함만 알았지?
등등.
그리고 그날 같은 영상을 본 언래블도 솜뭉치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드디어!”
“우리 말고도 이제 많은 사람이 안다!”
열심히 숨겨둔 내용을 다른 팬들도 안다는 사실이 언래블에게는 마냥 기뻤다.
솜뭉치들 속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