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01)화 (401/456)

401. Next level(5)

찬영은 언래블의 상담 일지를 작성하다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이전 사건으로 인한 언래블의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

멤버 개개인의 태도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불안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아물어가는 게 짧은 대화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직업 특성 때문인지 사람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무뎌지는 것도 좋은 건 아니었다.

사실 이 부분은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진 찬영에게도 늘 어려운 문제였다.

감정은 쉽게 옮는다.

집단생활을 하는 멤버들은 특히나 서로의 감정에 쉽게 휩쓸릴 수 있다.

유난히 결속이 강한 아이들이니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강하게 느낄 터.

실제로도 상담 중, 본인의 이야기보다 다른 멤버 이야기가 나오는 날이 더 많았다.

여전히 멤버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힘찬과 지환.

막내인 세빈조차 그 둘을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 둘의 룸메이트들은 자신들이 함께 방을 쓰며 이상해 보였던 일을 빼놓지 않고 물었다.

반면, 지환은 경환과 힘찬을 가장 염려했다.

그 점이 독특했지만, 심리 상태를 고려하면 가장 예리한 사람이 지환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언래블 멤버들 중 이제 찬영에게 날을 세우는 사람은 없지만, 이 부분이 늘 곤란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결핍을 겪은 멤버들이 많지만, 그에 비해 멤버들은 단단했다.

찬영은 상담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떠나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아이들이 기특했다.

물론 자신이 겪은 결핍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외면해온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건 누구나 두려울 수밖에 없으니까.

간혹 과거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이 단계를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핍과 트라우마를 안겨준 대상을 이해하거나 용서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에 발생하는 일들이었다.

특히나 경환은 이 구간에서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의 자신을 다독여 주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설득했다.

무력함을 느꼈던 스스로와 회피만 했던 누나에 대한 분노.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생부에 대한 분노는 단시간에 풀어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본래 이런 상황에서는 가족 단위의 상담이 가장 적절했지만, 경환이 거부했다.

어머니에게 당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싫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누나에 대한 분노도 아직 남아있었다.

그럭저럭 무난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지만, 그림은 솔직했다.

경환이 어설프게 그려낸 가족 그림에선 언래블과 어머니가 가까이에 있었다.

반면 그와 조금 떨어진 어머니 뒤쪽에 있던 누나.

‘이해는 해요. 어쨌든 누나는 아빠한테 자랑스러운 딸이었고, 좋은 추억도 많으니까.’

경환 특유의 담담한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찬영은 그래서 안타까웠다.

속 깊이 밀어 넣는 것에 이미 너무 익숙해진 얼굴이었으니까.

반면, 힘찬은 가족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라 경과도 좋았다.

회사에서는 상담 시작 전, 가족에게도 해당 사실을 알렸다고 했었다.

정신 건강 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상담을 진행할 거라는 내용으로.

어느 정도 멤버들이 회복하고 회사를 통해 힘찬의 어머니가 찬영을 찾은 일도 있었다.

힘찬의 상담 상황을 알고 싶어 했지만, 찬영은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을 내려 거절했다.

힘찬과 찬영의 상담은 내담자와 상담사만의 영역이다.

힘찬이 원한다면 함께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힘찬의 어머니는 찬영의 설명을 듣고 충분히 이해했는지 짧은 말만을 남겼다.

잘 부탁한다는 그 한마디.

여러 감정이 녹아들어 있던 목소리에는 후회도 진득하게 남아있었다.

걱정스러웠던 멤버 중 하나인 지환은 상담을 진행할수록 무어라 단정 짓기 어려웠다.

상담 초반 불안정했던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숨겨놓은 것들이 많아 보였다.

멤버 중 자신의 감정에 가장 둔하고 솔직하지 못한 타입이라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유난히 두려워하는 멤버였기에, 확신을 주기 위해 찬영도 노력했다.

하지만 찬영은 지환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지지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담 방식을 조금 바꿔볼까….”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던 찬영은 키보드를 톡톡 두드렸다.

많은 내담자를 경험한 찬영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크게 마음을 준 사람은 드물다.

그래선 안 되기도 하고.

상담사가 내담자에게 깊이 동화되면 정상적인 상담이 불가능하다.

그건 상담사에게도 내담자에게도 불행한 일을 초래하기도 한다.

훈련받은 전문 상담사들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찬영도 그들도 사람이니까.

이미 그들의 팬이기도 한 찬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보통 팬들보다 더 날것의 모습을 많이 봐온 찬영은 이런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응원 안 할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찬영에게는 많은 경험과 사례들이 있어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보다 멤버들의 경과가 좋아지면서, 찬영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더불어 최근 찬영은 멤버 개개인과의 면담 후 소현 팀장을 만났다.

처음에는 가능하다면 주에 한번, 최소 이 주에 한 번 만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스케줄 때문에 지켜지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이제 발판을 다지고 있는 그룹이니 좋은 일이 들어오면, 거절하기 어렵다는 걸 찬영도 이해했다.

더불어 그만큼 ON 엔터에서 지급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어느 정도 심리 상태가 나아지면서 점차 그 간격을 늘려갔다.

그리고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상담하도록 일정을 변경했다.

생각을 정리한 찬영은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 * *

언래블을 지칭하는 이름이 다양해졌다.

그 이름의 변화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나타내고 있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댔다.

우리 애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기에, 눈에 보이는 성과들이 더 가슴을 저리게 했다.

이제는 먼저 제의해오는 여러 프로그램과 광고, 그리고 개개인의 스케줄들.

새로운 앨범으로 얻어낸 1위가 우리가 더는 운으로 살아남은 그룹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질시에 찬 시선은 있어도, 우리가 일궈내고 있는 결과가 부정당하진 않는다.

이제는 다른 가수들에게 이번 노래 좋더라, 다음에는 같이 하고 싶다, 곡 줄 수 있냐 같은 이야기도 듣는다.

숫자에 휘둘리지 말자고.

우리끼리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엔 준이 형의 걱정이 담겨있었다.

1위를 하면 하는 대로, 못하면 못 하는 대로 그 숫자에 휘둘려 우리가 무너질까 봐.

그 마음을 알기에 더 자신을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할 일들을 찾아냈다.

준이 형이나 경환 형이 잠들지 못하고 밤새 작업하는 날도 이제는 드물지 않다.

연습하느라 새벽 별을 보며 숙소에 돌아오는 날도 흔했다.

촬영하다 날을 넘겨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숙소에 도착하는 날도 있다.

나는 여태까지 항상 멤버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담담한 척, 괜찮은 척했다.

우리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우린 잘 하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불안하고 무섭다.

여러 의견을 내고 회의에 참여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걱정스럽다.

이 선택이 우리 애들 미래에 해가 될까, 괜찮을까.

내가 가만히 있는 게 더 도움 되는 건 아닐까.

어설프게 미래 지식을 활용하려 하기보다 연이 닿은 것들만 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 고민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욕심날수록 두려움도 커져서 조절이 잘 안 됐다.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그때마다 나를 안아주는 포잉의 체온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인사했던 가족을 떠올리기도 하고, 지금 누나를 생각할 때도 있다.

버겁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단단한 손이 어깨를 쥐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경환 형이 슬며시 웃는다.

아까까지 피곤해서 축 처져있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또 생기 넘쳤다.

아무리 피곤해도 팬들 앞에서는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우리 애들.

나도 모르게 잠시 느슨해졌던 마음을 조이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치밀어오르는 상념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눈앞의 풍경에 집중할 때였다.

연습실 바닥에 앉아 솜뭉치들의 질문을 읽고 있는 멤버들이 있었다.

1위를 만들어준 솜뭉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진행하는 GIVE 앱 라이브.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먹는 게 되어 있었다.

우리 애들이 먹는데 진심인 만큼, 솜뭉치들도 그러했다.

역시 그 가수에 그 팬.

방금까지는 다이어트 방법을 묻던 솜뭉치들이 이제는 무얼 먹는지 묻고 있었다.

- 다이어트 기간에도 환이가 밥해줘요? 평소엔 어떤 거 먹어?

“음, 되게 다양한데.”

“아침마다 주스 갈아주는 것도 바뀌어요. 맨날 같은 거 먹으면 질린다고.”

“평소에는 메뉴를 미리 정해요. 각자 먹고 싶은 걸 모아서 한 달 전에 식단을 짜거든요.”

찬이와 세빈이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뭘 먹었는지 종알거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준이 형은 다른 곳으로 빠지는 막내들을 토닥이며 질문에 답해주었고.

- 우리 작은 화니는 손도 야무지구나….

- 그럼 오늘 아침에는 뭐 먹었어?

“오늘은 수박 주스요! 진짜 맛있어요!”

“수박 오면 다 같이 앉아서 씨를 빼요.”

“환이가 잘라주고 통에 넣어놓거든요? 한 번만 고생하면 편하게 먹으니까 솜뭉치들도 해봐요!”

여름이라고 수박을 며칠 먹였더니, 신나서 솜뭉치들에게 설명해주는 막내들.

영빈 형은 이제 말을 곧잘 하는 막내들이 기특한지 희미하게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아! 우리 에어프라이어 샀어요! 환이가 그걸로 고구마 구워서 맛탕도 해줬어요.”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괜찮아, 이미 글렀으니까 그냥 말해.”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쪽에서 우릴 지켜보던 우진 형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종범 형이 그 옆에서 노트에 또 무언가 적고 있었고.

분명히 저것도 소현 팀장님한테 보고하겠지?

우진 형이 잘 막아줬으면 좋겠다….

오늘도 내일이 없는 막내들과 이제는 포기한 맏형들.

자신은 그 광경과 관계없다는 듯 담담히 웃고 있는 경환 형.

- 다음 1위 공약 기대 중이야! ☆파트 바꿔 부르기☆

꺄르르 웃는 수많은 솜인형이 생각날 정도로 평화로워 보이는 광경이었다.

“어, 음…. 그건 이미 한번 했으니까 다른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맞아, 우리 또 새로운 걸 해봐야죠.”

지난번, 파트 바꿔 부르기 때문에 울뻔했던 준이 형과 경환 형이 다급히 외쳤다.

아무래도 영빈 형과 내 파트를 부르는 게 둘에게는 부담인 듯했다.

물론 나도 형들 랩을 따라 하는 건 어려웠지만, 이번 타이틀은 랩 파트도 할만했다.

“그래도 우리 솜뭉치들이 원하는 걸 해주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그때까지 얌전히 웃고 있던 내가 한마디 덧붙이자, 경환 형의 얼굴에 ‘배신자’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러자 영빈 형도 한마디 냉큼 얹었다.

“나도 환이 말에 찬성. 다른 공약을 하고 싶으면, 그만큼 괜찮은 걸 찾아서 솜뭉치들한테 허락받아와.”

“너, 이럴 때만…!”

평소에는 말이 많지 않은 영빈 형이 이럴 때만 길게 말하자 준이 형 눈빛이 흔들렸다.

아마 방송 중이 아니었다면, 당장 쿠션 하나 던졌을 얼굴이었다.

막내들은 그런 풍경에 신경 쓰지 않고 이런저런 공약을 궁리하고 있었다.

“동생 라인이 형 라인 어부바요? 전 괜찮은데, 환이 형이 안 될 텐데….”

“환이는 동생 라인이 아니라고요? 왜요!”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우리 세빈이 목소리가 유난히 날 아프게 했다.

우리 막둥이, 형을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방송이 흘러가도 이제는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포잉만 혀를 찰 뿐.

“나도 업을 수 있어요, 솜뭉치들. 나한테 왜 그래요….”

내가 우는 시늉을 하자, 아니라고,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메시지가 우수수 올라왔다.

귀여워, 우리 솜뭉치들.

찬이의 환멸 어린 시선을 무시하며 다음 1위 공약은 열심히 생각해 보겠다고 대화를 정리했다.

언제나 우리 일상을 궁금해하는 솜뭉치들.

가끔은 무서울 만큼 장난기 넘치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럽다.

내게는 솜뭉치들이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언래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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