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Next level(4)
일주일이라는 기간 중간에 우리가 온 거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형의 진행은 무척 매끄러웠다.
진행이 생각보다 무척 어렵다는 걸 하겸 형을 통해 들었기에, 키스 형이 신기해 보였다.
저 형은 못 하는 게 뭘까?
가영 형의 헛소리 들어주는 거 빼고는 다 잘하는 것 같아.
담담한 목소리가 사연을 읽어준 뒤 본인의 생각을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과 달리 키스 형은 걱정도 생각도 정도 많은 사람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겪은 키스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라디오를 진행할 때 형의 그런 모습이 조금씩 흘러나와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 앨범 ‘Thanks to’가 조금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멤버들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형을 집중해서 바라보자 멘트를 이어가던 키스 형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세빈이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고 찬이가 물었다.
“선배님,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뇨. 다른 게 아니라.”
평소에 ‘형아, 형님아!’하고 외치며 달려들던 찬이의 어색한 존댓말에 형이 고개를 들었다.
큰 손이 입가를 가리다 손으로 부채질했다.
“아, 제가 이렇게 막 웃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우리가 얌전히 형만 바라보고 있는 게 너무 웃겨서 갑자기 웃음이 터질 뻔했다고.
그래서 급히 고개를 숙인 건데 찬이의 선배님 소리에 결국 참지 못했다며 역시 언래블은 강적이라고 했다.
“너무해요….”
“좋아서 그러죠.”
“와, 이 선배님 또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신다.”
좀처럼 애정이 어린 부드러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가끔 이렇게 내뱉는 말에는 반박하기 어렵다.
키스 형은 가영 형과 다른 타입의 능변가니까.
자신이 필요할 때만 무척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애당초 어지간한 말발은 가영 형을 이기지 못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짧은 소란은 금방 수습됐고, 슬쩍 창밖을 확인하니 우리 솜뭉치들이 어째서인지 더 신나 보였다.
키스 형과 친하게 지내는 게 솜뭉치들 보기에도 좋은가?
‘우리 애가 왕따가 아니다, 친구도 있고 친한 형도 있다.’ 이런 건가 싶어 웃었다.
어쩐지 전생에 일부 지인이 육아하는 마음이라고 했던 것들이 떠오른 것.
“자, 다시 주제로 돌아가 보죠. ‘Thanks to’를 어떻게 적었는지 각자 조금씩 설명해주시겠어요?”
금세 웃음을 수습한 키스 형이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물었다.
입꼬리가 아직 슬쩍 올라가 있는 걸 보면, 다 웃진 않은 것 같았지만.
그건 봐주기로 했다.
일하는 중이니까 이 놀림은 나중에 추궁하기로 했다.
“적을 때면 늘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저희가 팀장님께 조언을 구했었어요. 그랬더니 솔직하게 그냥 다 적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맞아요, 몇 줄이어도 되고 한 페이지 가득 써도 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회사 사람들에 대한 감사는 앨범이 아니라 평소에 하라고 알려주셨어요.”
준이 형과 영빈 형이 우리의 땡스 투가 바뀌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덕분에 저희는 일상에서 조금 더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할 수 있게 됐어요. 평소에는 부끄러워서 자주 못 했던 말이거든요.”
자주 보는 사람들한테는 유독 고맙다고 말하는 게 쑥스러웠다.
당연히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정작 내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아끼게 되는지.
그 말들은 누나가 내게 해주었던 조언과도 같은 이야기라서 금방 수긍할 수 있었다.
“좋은 말씀 해주셨네요. 감사함을 당연시하지 않는다는 건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고 살아가곤 하죠.”
키스 형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건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같은 의미로 미안한 걸 잘 사과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네요. 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대가 상처받았다면 사과해야 하죠.”
키스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우리는 금방 눈치챘다.
비록 상대방이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우리가 상처받았던 걸 헤아리고 다독여주는 거였다.
“안녕하세요, 고마워, 미안해, 이런 말들을 쑥스러워하지 않고 평소에 충분히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키스 형의 시선이 우리 너머로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 안에 있는 스태프들과 PD, 작가들을 바라봤을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앨범을 구매한 분들도 있을 테지만, 아직 구매하지 않은 분들도 있을 테니 제가 조금 읽어드릴게요.”
앨범이 나오자마자 사인하고 짧은 편지를 써서 새벽 형들에게 주었다.
본인들이 돈 주고 산다는 걸 뜯어말리는 게 더 힘들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오늘 우리가 온다고 그 앨범을 들고 와서는 유리 벽 너머로 흔들어 보였다.
솜뭉치들의 웃음소리가 이 안까지 조그맣게 흘러들어왔다.
“나를 살 수 있게 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앨범을 준비하는 동안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큰 사랑과 지지를 받는 지도요.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게 소중한 모든 사람도 괜찮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키스 형이 차분하게 읽어내리는 목소리는 참 듣기 좋았지만, 나는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하필이면 왜 내 거를….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히죽거리는 찬이 옆구리를 슬며시 가격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졌으니 여러분도 괜찮아졌으면 좋겠다는 말이 참 좋아서 읽어드렸습니다. 우리 모두 정말로 괜찮은 하루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요.”
억지로 말하는 ‘괜찮아’, 말고 정말로 괜찮아지길 바란다는 키스 형의 눈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지만, 내가 쓴 단순한 문장이 형이 읽어주니 근사한 대사 같아져서 신기했다.
그 후에 한동안은 앨범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희는 진짜로 알콩달콩하고 녹을 것 같은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도 가사에 그런 내용을 조금 녹여보려고 노력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정말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타이틀곡에 대해 토로했다.
실시간으로 보내는 솜뭉치들의 메시지에는 ‘그래, 너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런 내용이 가득했다.
우리 팬들조차 믿지 않아서 서글퍼졌지만.
‘그믐달’ 가사를 쓰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달콤해지고 싶어서 애를 썼는지는 이렇게 묻혔다.
한글로만 이루어진 가사가 좋았다는 칭찬도 있었고, 몽글몽글하지만 슬픈 곡이었다는 소감도 있었다.
뮤직비디오 내의 우리 정체에 관련된 질문도 제법 있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지 묻는 말도 있었다.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편지 내용 때문인 듯했다.
언제나처럼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약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주었다.
준비과정에서 우리끼리 있었던 에피소드도 살짝.
늘 오디오 지분이 낮았던 경환 형도 이번에는 앨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던 건에 관한 이야기도 잠시 흘러나왔다.
작가님이 넣어둔 내용이라 이런 게 궁금했나, 아니면 관심이 없어 그저 최근 기사를 가져온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나도 모르게 뾰족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며 당시 일을 잘 포장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당시 일이 떠올라 웃었다.
홍보대사 임명식 후 회사로 돌아온 우리는 소현 팀장님에게 달려갔다.
궁금한 건 못 참으니까!
우리가 달려올 거라는 걸 짐작하셨는지, 태연한 얼굴로 달려드는 멤버들을 받아준 팀장님.
다크 서클이 짙은 얼굴로 손에 든 텀블러를 잠시 바라보다 내려놓고 설명해주셨다.
저 커피는 오늘 몇 잔째 커피일까….
잠시 속으로 쉬지 못하는 직장인의 비애에 슬퍼해 주다 팀장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일종의 보험 같은 거라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처음부터 팀장님이 기획해서 기부를 시작했다고 하셨다.
아무리 매력적인 빌런이 사랑받는 시대라지만, 현실에서는 영웅이 더 사랑받는 법이라고.
우리가 개별적으로 기부하는 건 그저 선의에서 시작된 행동이지만, 회사가 하는 건 비즈니스라고 하셨다.
우리가 사고 칠 사람들은 아니지만, 보험의 일종으로 선행을 쌓아두는 게 안심될 것 같아 한 일이라고 하셨다.
사랑받는 건 어렵지만, 미움 사는 건 한순간이니까 미리미리 대외 이미지를 구축해두는 거라며.
늘 진실이 이기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분명 다수 있다며 실제 사건 몇 가지를 간략히 풀어주셨다.
그때 꾸준히 기부하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애써왔다는 이미지가 있다면, 어떻겠어? 하면서.
헛소문에 혹시 쟤네가? 하고 흔들릴 사람을 줄일 수 있을 거라며 짓궂게 웃었다.
그러니 우리가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하지만 팀장님 말처럼 이런 전략적인 기부가 아주 큰 힘을 내기는 힘들다는 것도 안다.
많은 사람이 본인이 받은 건 금방 잊지만, 자기가 준 건 작은 것들이라도 잊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 회사가 본인들의 이익 일부를 포기하고 투자라고 생각해주는 게 고마웠다.
팀장님이 으쓱거리며 너희가 벌어다 주는 돈의 극히 일부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속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수익 일부를 마음대로 사용한 것도 아니고 회사 몫의 일부를 나눈 것.
나중에 대표님과 실장님께 인사만 한번 하라고 하셔서, 그 길로 당장 달려가려다 붙잡히기도 했다.
언젠가 정윤 실장님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 팀장님은 쑥스러움을 너무 많이 탔다.
감동한 막내들은 팀장님을 붙들고 한참을 방방 뛰었고, 결국 팀장님이 살려달라고 소리친 후에야 그 난리가 끝났다.
“생각해보면 언래블은 기부와 연이 많은 것 같네요. 자선 패션쇼에도 참여했었잖아요?”
“저희 그때 같이했잖아요. 왜 새벽은 쏙 빼고 말씀하세요.”
“오늘은 언래블이 주인공이니까요.”
당시 회상은 키스 형의 목소리에 끊겼다.
키스 형의 진행은 가끔 사람의 속을 쿡 찌르는 말 때문인지 여태까지 출연과 다른 느낌이었다.
작가님이 준 대본을 들고, 대답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고르고.
민감한 주제를 피하고자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 하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겸 형이 진행하는 라디오는 친정 같다면, 오늘은 정말 형과 수다를 떨다 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가끔 튀어나오는 키스 형의 평소 말투도 그런 느낌을 주는 데 크게 한몫했다.
“언래블 멤버 중에 누가 제일 좋냐고요? 질문하신 분, 지금 핸드폰 액정에 누가 비치죠?”
여기까지 말했을 때는 다음으로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윤혁은 역시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 얼굴이 보이죠? 누가 좋냐는 질문도 같은 겁니다. 날 쥐고 있는 사람이 더 좋겠죠. 우리가 왼손 몇 번째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다고 안 하잖아요. 그냥 핸드폰을 잡았다고 하지. 저한테 언래블도 그렇습니다. 그냥 다 좋아요.”
빠르고 정확한 발음으로 다다 말을 쏟아내는 터라 스튜디오에는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너무 놀라서 눈이 평소 두 배로 커진 세빈이는 귀여웠지만, 방송사고는 낼 수 없으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실시간 질문을 했던 그 사람이 억울하다는 듯 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
“샛별이시라고요? 우릴 아는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합니까.”
새벽의 팬클럽 이름이 ‘샛별’이었다.
감수성 넘치는 이름의 그룹과 팬클럽 명이지만, 덕후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팬덤은 내 가수, 내 배우 따라간다고.
키스 형은 짧게 혀를 차더니 그 사람의 닉네임을 읽어주며 말을 덧붙였다.
“한가영세번째손가락 님, 지금 신나게 웃고 계신 거 아니까 억울한 척 금집니다.”
세 번째 손가락이요…?
음, 아무래도 전해지던 그 말은 진실인 듯했다.
부스 밖에서 PD님이 미친 듯이 웃고 계셨다.
이제 집에 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