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97)화 (397/456)

397. Next level(1)

새하얀 빛이 가득한 공간에는 언제나처럼 새까만 광택을 뽐내는 문이 홀로 서 있었다.

문 주변에는 꽤 많은 사진이 허공에 떠 있었다.

문을 감싸고 둥실거리던 사진 중 일부가 희미한 빛에 감싸여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

사진은 여태까지 등장한 언래블의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들이었다.

또 어떤 사진은 콘셉트 사진이기도 했다.

두둥실 떠다니던 사진은 빛을 뿌리며 모여들더니, 점차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빛무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몽글몽글하게 생긴 덩어리가 되었다.

티저 영상에서 들렸던, 나무로된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문에 흡수되어 버리는 빛의 덩어리.

빛을 흡수한 문은 되레 새카만 어둠을 뱉어냈다.

먹을 들이부은 것처럼, 화면이 위에서부터 주르륵 흘러내리는 어둠에 잠식되며 전주가 시작되었다.

현을 튕기는 소리와 지그시 눌러 떨리는 소리까지.

텅 빈 공간에 파동을 그리듯 연주는 묘한 울림을 주며 느릿하게 퍼져나갔다.

현의 울음을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낮고 먹먹하게 퍼지던 그때.

홀로 울던 거문고 곁에 다른 현의 소리가 슬그머니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소리를 가진 비올라와 풍부한 통 울림을 가진 첼로였다.

[소란스러운 밤, 우리는 눈을 감아요]

꿈꾸는 듯 맑은 미성이 조곤조곤 노래를 시작하며 화면엔 다시 빛이 퍼져나갔다.

붓으로 정성껏 써 내려간 듯한 ‘경성’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며, 나타난 곳은 고풍스러운 가옥과 그 앞마당.

흔들의자에 앉은 유난히 창백한 소년은 하얗고 푸른 한복차림이었다.

정원 가득 피어난 온갖 꽃은 모두 하얀색.

어둠이 내려앉은 밤중에도 탐스럽게 피어난 꽃들은 빛을 뿌리는 듯했다.

하얀 꽃 속에 잠겨 있는 소년은 잠이라도 든 건지 미동도 없었다.

[그 짧은 날을 힘껏 피었으니 이제 쉬어도 된다고]

그때, 짙은 고동색 양장차림의 하준과 하얀 가운을 걸친 영빈이 다가왔다.

[유난스레 바람이 울던 날, 모두 저버린 꽃처럼.]

잠든 소년을 바라보던 둘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단히 걸어둔 새끼손가락,

굳건한 맹세가 있으니 괜찮다 했죠]

속삭이듯 시작된 노래는 부드러운 저음과 만나 점점 호소하듯 변해갔다.

[잠들 수 없는 밤]

[그대를 놓을 수 없어, 잠들 수 없었던 밤]

넘쳐흐르는 감정을 왈칵 쏟아내는 고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피아노와 가야금 소리가 더해졌다.

밤하늘을 잘라내려는 듯 넘실거리는 소리와 함께 장면은 다시 바뀌었다.

무언가 붉은 액체가 넘실거리는 잔을 밀어내는 지환.

그리고 애타는 얼굴을 한 세빈과의 실랑이.

그 곁에서 경환이 침중한 얼굴로 서 있었다.

카메라는 그들에게 멀어지더니 고풍스러운 건물 안을 헤매다 누군가를 찾아냈다.

연구실로 보이는 곳에서 절망에 빠진 듯 머리를 움켜쥐는 영빈.

- 이번에도 실패야….

그 곁에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은 힘찬이 노트에 무언가 써 내려갔다.

언뜻 보이는 작은 수첩에는 실패, 확률, 복잡한 수식들이 적혀있었다.

그들은 무언가에 깊이 좌절하고 있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쏟을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밤들]

언제 밖으로 나간 걸까?

연구실의 창문 끝에 매달려 그 안을 빼꼼 바라보던 지환은 누가 볼까, 금방 자리를 피했다.

나무 아래 앉아 슬픈 얼굴로 품 안의 하얀 꽃송이를 쓰다듬던 지환이 다른 이들을 다독이듯 노래했다.

[보지 못한들, 꽃이 아니 피던가요]

[듣지 못한들, 그대 오는 소리 모를까요]

언제나 중심을 잡아주던 목소리가 넘실거리던 슬픔을 천천히 다독이며 다정히 웃었다.

[내 걱정일랑 지는 달 아래 묻어두고 내 손을 잡아요]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든 멤버가 곱게 옷을 차려입고 카메라 앞에 모였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멤버들은 모처럼 다들 즐거워 보였다.

여러 높낮이를 가진 목소리는 화음이 되었고, 흥얼거림 같기도 하고 자장가 같기도 한 허밍이 들린다.

기쁜 듯 웃는 그들의 모습이 찰칵하고 찍히고, 환한 빛과 함께 장면이 다시 바뀐다.

점점 잦아드는 허밍 소리.

천장이 높은 어느 동굴, 빛이 내리쬐는 유일한 자리.

온갖 색을 가진 꽃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화면에서 색을 가진 건 꽃과 작은 비단 주머니뿐.

풍경도, 사람도 모조리 색을 잃었다.

[소란스럽던 밤, 함께 눈을 감아요]

비단으로 엮은 화려한 두루주머니를 품에 안은 세빈은 통곡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꽃무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힘찬은 꽃 더미에 손을 뻗어보지만, 차마 만져보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틀거리며 꽃 더미 앞에 주저앉은 멤버들.

[기나긴 밤, 혼자는 외로울 테니 함께 꽃잎을 세어보아요]

그들은 각자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그 주변에 내려놓았다.

하준은 호박 장식이 달린 부채를, 영빈은 내내 들고 있던 곰방대를 내려놓았다.

경환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환도를 풀러 내려놓았고, 힘찬은 손목에 감고 있던 비단 끈을 풀었다.

세빈은 품에서 작은 향낭을 꺼내 그 앞에 두었고 이내 모두가 결연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분명 들려오는 노랫말과 영상 속 인물들의 표정은 애달팠지만, 멜로디는 보드라웠다.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벨벳 같은 멜로디.

화면은 점차 빠르게 흘러갔다.

하준과 영빈이 서로의 등에 고통스러운 얼굴로 주문을 새겨넣었고, 경환이 도왔다.

힘찬과 세빈은 그들의 거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둘이 지환의 방에서 낡은 편지 한 장을 발견한다.

‘한 해, 한 달, 한 날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기를 원하니.’

낡은 편지를 소중히 매만지던 둘.

얼마 후, 둘의 양팔에도 기하학적인 그림과 문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세빈의 머리칼은 하얗게, 힘찬의 머리칼은 새카맣게 변했다.

꽃무덤 앞에 다시 모인 그들 손에는 옥가락지와 작은 잔이 쥐어져 있었다.

세빈은 사진을 들고 와 비단 두루주머니에 넣는다.

살짝 보인 사진은 이상하게도 긴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지환의 모습이었다.

힘찬이 하나 남은 반지를 꽃무덤 위에 얹었고, 이윽고 한 번에 잔을 들이켜는 멤버들.

이윽고 드르륵하고 필름이 되감기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부서져 내렸다.

[온 세상 눈물 그러모아 강을 만들까, 바다를 그릴까]

[일렁이는 숨을 잡아 저 달을 채울까]

따뜻하고 귀한 것들로 가득한 방.

휘장이 쳐진 침상, 그 안에는 비단 이불을 덮은 지환이 있었다.

여전히 어딘가 아픈 건지 안색이 좋지 못했다.

누워있는 지환도, 그를 둘러싼 멤버들도 모두 고운 한복 차림이었다.

손톱달이 뜬 밤, 정자에 앉아 만개한 매화를 보며 다 같이 즐거워하고 있었다.

달 밝은 어느 날.

하준이 거문고를 뜯고 힘찬이 피리를 불자 세빈과 지환, 경환이 춤을 추고 영빈은 곰방대를 문 채 흐뭇하게 웃었다.

[오래된 달이 뜨는 밤, 나는 이미 그대 앞에 있을 테니]

그렇게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 사이로 두 래퍼의 결이 다른 저음이 나른하게 흘렀다.

평소보다 훨씬 힘을 뺀 듯했지만, 그만큼 더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계속해서 어떤 잔을 지환에게 권하는 멤버들, 거부하는 지환의 모습.

장면은 점점 더 빨리 바뀌기 시작했고,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넘어갔다.

[기나긴 밤, 혼자는 외로울 테니 함께 꽃잎을 세어보아요]

후렴구가 시작되는 장면은 깊은 숲속 한가운데였다.

굵은 나무에는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그 아래는 붉은 비단을 치렁치렁하게 두른 지환이 있었다.

흑단같이 새까맣고 긴 머리에 붉은 눈동자.

앞에서와 달리 무척이나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매화나무에 기대있던 지환을 찾아온 듯한 멤버들.

나무 주변을 돌며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무언가 쓰기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꽃바람에 꿈결처럼 웃던 그대]

하지만 곧이어 해가 지고 달도 뜨지 못한 밤.

크게 다친 듯한 멤버들을 안타까운 듯 바라보던 지환.

지환은 품 안에 있던 비단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짧은 칼로 내리쳤다.

그 순간 매화나무는 시들기 시작했고, 지환은 색을 빼앗기듯 점차 하얗게 빛나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깨끗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멤버들.

[손톱 달이 뜬 이 밤에 그대 외롭지 않도록 손잡아줄게요.]

툭, 하고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필름 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점을 잡듯 화면이 깜빡거렸다.

이윽고 하얀 잠옷을 입은 지환이 타박타박 걸어 나와 서재의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 꺼냈다.

새카만 목함.

목함 안에는 오래되고 바랜 비단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단 주머니 안에서는 사진 하나와 곱게 접힌 편지가 나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진 표면을 더듬던 지환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사진을 들어 올렸다.

긴 의자 가운데에 홀로 앉아 매화 가지를 소중히 안고 있던 지환.

텅 빈듯하던 사진은 지환이 손길을 따라 채워지기 시작했다.

지환의 양옆, 그리고 의자 뒤에 나란히.

따뜻하게 웃고 있는 언래블의 모습이었다.

* * *

“쇼케이스 안 하는 건 아쉽다….”

“하면 좋지만, 장소 잡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니까.”

“뮤비, 좋아해 줄까?”

“너무 욕심냈나…. 지금 생각해보면 과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자정,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고, 우리는 새벽부터 졸린 눈을 문지르며 방송국에 도착했다.

거의 수면 상태로 기본 세팅을 하고, 출근길 의상을 주워 입고.

컴백 날인데 솜뭉치들 앞에 못난 꼴로 나갈 수 없다며 미리 골라둔 옷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기다려준 솜뭉치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열심히 눈을 맞추기도 하고.

리허설 사이 텀이 길었기에 잠깐씩 나가서 눈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우진 형에게 막혀버렸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걱정을 한가득하니 도망칠 수도 없었다.

전날까지 안무를 계속 맞춰보고 앞으로 일정을 되뇌다 보니 잠잘 틈이 없었다.

그동안 공중파에 잘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우리는 이번엔 조금 다르게 가기로 했다.

언래블 미션 영상도 좋지만, 폼이 한정되어있으면 보는 입장에서 질릴 수도 있다고.

더 많은 사람에게 얼굴을 알리려면 공중파가 최고였기에 정석대로 공략에 나서기로 했다.

“세빈아, 눈 문지르면 안 된다니까.”

“넹….”

얼마 못 자고 움직여야 했던 터라 막내들은 아직도 해롱거리고 있었다.

메이크업한 걸 깜박 잊고 눈을 만지려던 세빈이는 종범 형님에게 손을 잡혔다.

종범 형님은 이제 우리한테 완전히 적응한 건지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챙기기 바빴다.

한동안 의젓한척하던 막내들은 새로운 사람이 자기들을 챙기자, 한껏 풀어져서 챙김을 즐기고 있었다.

괜히 가서 치대기도 하고, 다 외운 스케줄도 종범 형님한테 가서 또 물어보고.

“우리 뮤직비디오 괜찮았어요? 형, 봤죠? 어때요?”

“내가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보고 울뻔했다.”

“진짜요? 하, 이번에 내가 연기 좀 했죠!”

처음에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방금까지 졸고 있던 찬이는 언제 정신을 차린 건지 호들갑을 떨며 종범 형님과 만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저러다 준이 형한테 혼날 거 같은데….

“경환아….”

“얍.”

아니나 다를까.

수면 부족 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던 준이 형은 결국 경환 형을 불렀다.

이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준이 형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움직이는 경환 형.

“으아아!”

“쟤 입 좀.”

“으으으!”

종범 형님 옆에서 헤벌쭉 웃고 다니던 우리 모지리는 경환 형에게 검거되어 한 마리 짐승이 되었다.

긴장을 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 리더님의 컨디션을 간과한 게 찬이 죄다.

“얘들아, 몸 풀고 준비해야지.”

마침 그때 대기실로 들어온 우진 형.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런지, 경환 형에게 붙들린 찬이를 보고도 우진 형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게 바로 경력자인 것인가.

감탄하는 종범 형님과 한숨을 내쉬는 포잉.

‘이상한 것들이 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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