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 외전 - 제주도의 푸른밤
“진짜로 이런 날이 오긴 왔어. 좋지?”
“너의 그 입은 얌전히 있을 생각이 없음?”
“이제 와서?”
드디어 포잉과 단둘이 첫 여행을 오고야 말았다.
언젠가는 꼭 해볼 일이라고 다짐했던 것 중 하나.
남들 보기엔 홀로 여행 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괜찮다.
어차피 난 이번 생 내내 혼자였던 시간은 거의 없으니까.
잔뜩 들뜬 나와 달리 포잉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깊디깊은 한숨을 내쉰 포잉은 소파 위에 털썩 누워버렸다.
“포잉, 츄르 줄까?”
“가져와 보셈.”
유달리 비행기 타는 걸 내켜 하지 않는 포잉.
처음에 포잉이 너무 지쳐 보여서 정령계에서 쉬다가 내가 내리면 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도 사생들에 시달리는 날 본 포잉은 그 뒤로도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보고 맨날 달걀귀신이냐고 하얗게 질렸다고 혀를 차던 포잉.
정작 자기도 움찔거리며 긴장한 게 품 안에 고스란히 느껴졌는데.
이 작은 고양이 요정님은 본인의 그런 모습이 더 나를 뭉클하게 한다는 걸 몰랐다.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데 늘 나보다 어른인 척하는 요정님.
지쳐있는 포잉을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빠르게 캐리어를 열었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실체화할 수 있게 된 포잉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간식을 맛보는 것이었다.
처음 실체화해서 놀랐던 날, 밖에서 포잉이랑 놀고 있던 걸 준이 형에게 들켰던 일.
어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냐옹 하고 울던 포잉과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던 나.
그동안 포잉에게 주고 싶었던 온갖 간식을 남몰래 포잉 입에 넣어주는 게 행복이었다.
멤버들은 아직까지 포잉이 동네 고양이인 줄 알고 있었다.
워낙 포잉이 귀엽고 예쁘게 생긴 터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린 멤버들.
특히나 영빈 형은 자기도 모르게 흐물흐물해졌다가 본가에 있는 자기 반려묘를 부르며 미안하다고 했다.
잠깐 홀린 거라고, 자신은 한눈팔지 않았다고.
세비 형과 아직도 툭하면 서로 반려묘 사진을 보내며 서로 주인님 자랑하는 형.
새초롬하게 앉아서 내게 간식을 받아먹는 포잉을 보며 세빈이는 만져보고 싶어서 손을 꼼지락대기도 했다.
종종 멤버들이 서로 몰래 밖에서 포잉을 찾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포잉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꼭 내게 말하고 움직였으니 모를 수가.
멤버들은 포잉을 숙소에 들이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포잉이 반대했다.
앞으로도 쭉 내 곁을 지켜야 하는데 숙소에 머물게 되면 그게 어렵다고.
누군가는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번에 포잉과 단둘이 여행을 오면서 그 문제를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멤버들은 개인 스케줄을 크게 늘리진 않았지만, 종종 허전함을 느끼는 듯했다.
늘 적어도 둘, 셋이서 함께 하는 게 익숙해진 우리니까.
그럴 때 우리 포잉이 있어 주면 무척 든든할 텐데.
게다가 포잉도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예쁨받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과 온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하지만 그마저도 내 욕심인 걸 알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반려동물을 들이는 건 아직도 처음과 같은 이유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가끔 우리가 단체로 집을 비우면 남은 아이는 외로울 거라고.
다른 멤버들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다른 아이가 오면 포잉이 싫어할 것 같기도 했고.
우리에게 새 식구가 생긴다면 행복할 게 분명했지만, 욕심을 부리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게 없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모든 상황이 안정되면서 최근 나는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해보고 있었다.
버킷리스트라고 해야 할까.
이번 여행도 그중 하나였다.
누나와 술을 마셔보기도 했고, 멤버들과 술자리를 가지기도 하고.
물론 지금 내 주량이 쓰레기라는 걸 깨닫고는 맥주 한 캔 정도로 끝이었지만.
그래도 그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모두가 나사 하나 빠진 듯 늘어져서 시시덕거리는 그 분위기.
가끔은 형들이 끼기도 하고, 내가 형들 술자리에 불려가기도 했다.
다만, 술에 취해 형들에게 무슨 실수를 한 건지 형들은 내게 술을 금지했다.
평소 주사는 잠드는 거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유를 물어도 좀처럼 답해주지 않아 답답했다.
맥주 한잔은 괜찮다고 했지만, 여전히 형들은 내 앞에 탄산음료를 밀어놨다.
그러다 보니 술에 취한 형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어느새 내 일이 되어 있었다.
설마 그러려고 나한테 술을 못 먹게 하는 건가?
“님, 뭐함?”
“아, 잠깐 딴생각했어. 미안.”
꼬리로 소파를 탁탁 내리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포잉을 살살 달래며 츄르를 꺼냈다.
작은 혀를 날름거리며 받아먹는 포잉 모습이 왜 이렇게 힐링 되는지.
흐뭇한 얼굴로 간식 조공을 끝낸 나는 포잉을 냉큼 품에 안았다.
귀찮다는 듯 앞발로 내 팔을 몇 번 탁탁 치던 포잉도 이내 포기한 듯 몸에 힘을 뺐다.
포잉과 함께 한 지 벌써 몇 년.
이제는 나도 포잉이 진짜 싫어하는 것과 싫어하는 척하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여전히 윤기 넘치고 보들보들한 털을 천천히 쓰다듬자 마음의 평화가 왔다.
“포잉.”
“?”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는 찬란한 우주.
포잉 앞에서는 웃음이 헤픈 나는 참지 못하고 포잉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쫌!”
“좋아서 그러지!”
포잉은 질색하며 싫어했지만, 품에 꼭 껴안고 있던 나는 굴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볼까?”
“고얀 녀석. 이렇게 또 말을 돌리다니.”
삐딱한 포잉의 반응에도 마냥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포잉을 바닥에 내려놔 준 나는 겉옷을 챙겼고, 숙소를 나섰다.
물론 포잉도 함께.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계절을 고르고.
일부러 인적이 드물고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는 곳을 골랐다.
포잉과 함께 걷는 모래사장.
숙소를 나와 해변부터는 모습을 드러낸 포잉 덕분에 우리가 걸어온 길에는 두 발걸음이 나란했다.
“포잉, 무인도에 버려졌을 때 생각난다.”
“어떤 무인도?”
“그, 왜 우리 처음 섬에 갔을 때 있잖아.”
“아아….”
처음 새벽 형들과 진우 형, 우리가 무인도에서 버텨야 했던 그때.
그때 나는 포잉의 발자국이 모래사장에 찍히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때 포잉은 뭐라고 했었지?
아, 현실 도피하지 말라고 했었구나.
그때 일을 기억한 건지 해변에 오자마자 실체화하고 같이 걸어주는 상냥한 포잉.
나만 아는 포잉의 이런 상냥함이 무척 기뻤다.
언제나 내가 한 말들을 기억해주는 상냥한 내 요정님.
“그때는 포잉도 지금보다 작았는데.”
“그랬지. 너는 더 어벙하고.”
“어벙하다니….”
여전히 가차 없는 내 평가에 아주 쪼금 슬퍼졌지만, 그래도 즐겁다.
은은하게 퍼지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서걱거리는 기분.
잔에 가득한 얼음이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춤추는 것 같기도 했다.
파도가 지척까지 다가오는 곳에 주저앉은 우리는 멍하니 검푸른 바다를 지켜봤다.
우리 콘셉트에는 유난히 바다가 자주 등장했다.
끊임없이 환생해야 하는 우리를 품어주는 바다.
무지할 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윤회의 울타리에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여러모로 즐거웠지.”
“그 섬에서?”
“그 후로 그 정신 나간 것들이 그렇게 여행 가자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냐.”
포잉의 뚱한 목소리에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
포잉이 말한 정신 나간 것들도 누군지, 왜 저렇게 질색하는지도 알아서.
저렇게 뚱하니 툴툴거리면서도 포잉이 새벽 형들을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안다.
우리는 처음 그날 이후로도 두 번 정도 더 무인도에 버려졌다.
자꾸 우리를 오지에 버리려고 하는 방송국 혹은 감독님들과 생존에 점점 특화되는 우리 애들.
처음에는 우왕좌왕하고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 후부터는 점점 포기했다.
한두 번 버려져야 말이지….
이제는 멤버들 모두 텐트 치고 불붙이는 건 달인이 되어버렸다.
밥은 여전히 내 몫이었지만.
그래도 찬이가 라면을 잘 끓이게 된 건 크나큰 발전이지.
세빈이는 불 앞에 가는 걸 모두가 반대했기 때문에 지금도 요리는 못했다.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막내를 그래그래, 하면서 밖으로 밀어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라면도 계란후라이도 실패하는 막내가 침울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다 다치면 정말 큰일 나니까.
새벽 형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과보호라고 뭐라 했지만, 정작 형들도 세빈이가 뭔가 하는 걸 보고 있지 못했다.
그걸 보고 포잉은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라면서 혀를 찼다.
“무슨 생각함?”
“우리 애들이랑 포잉이랑 함께 지나온 시간?”
그 한마디에 ‘흐음…’하고 콧소리를 내던 포잉은 조금 더 내 옆으로 붙었다.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덕분에 늘 따끈따끈한 포잉.
“어쩌다 보니까 우리가 꽤 많은 걸 했어. 그렇지?”
“많은 일이 있었지.”
포잉을 쓰다듬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꼬리로 쓰다듬어주는 포잉.
우리는 서로 체온에 기대, 함께 이뤄온 지난날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이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에 적응하고, 포잉에게 적응했던 날들.
아픈 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기쁘고 행복한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제법 크긴 했지.”
“오, 이제는 인정해주는 거야?”
“계약자 놈아, 너는 어떻게 틈을 주면 이렇게….”
드물게도 칭찬하는 포잉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들이댔다가 앞발에 한 대 얻어맞아야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이제는 포잉이 쭉 나와 함께할 거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내 삶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나와 포잉, 멤버들은 휘청일 때도 있었지만, 그 믿음을 바탕으로 천천히 쉼 없이 걸었다.
“돌아가면 다시 투어 준비하느라 바쁘겠지?”
“비행기 타는 건 질색인데.”
월드투어를 앞두고 아주 잠깐 짬을 냈던 거라 돌아가자마자 바쁠 예정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멤버들도 혼자 혹은 다른 멤버와 짧게 여행을 떠났다.
문득 멤버들이 보고 싶어져서 바다 사진을 찍어 그룹채팅방으로 보냈다.
이윽고 그룹채팅방은 각자 지금 하는 걸 찍어 보낸 사진으로 가득해졌다.
“아무튼 너희는 진짜….”
DCL은 벌써 독립해서 각자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들었다.
레노와 자인은 숙소에서 같이 살지만, 휴이와 리우 형은 각자 집을 얻었다고.
새벽 형들도 여전히 셋이 같이 살고 있지만, 키스 형이 몇 년째 독립을 꿈꾸고 있었고.
골든아워 형들도 숙소를 나간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여섯 명이 여전히 함께하고 있었다.
얼마 전, 팀장님이 독립할 생각이 있는지 멤버들 개개인을 붙들고 물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혼자 있는 시간은 어쩌다 한번 여행 갈 때면 족하다고 했다.
어지간하다 싶어서 우리끼리도 웃었지만,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선선한 바람, 바다 냄새와 밤공기의 촉촉함.
포잉과 단둘이 있지만, 단체채팅방이 계속 울어대서 외롭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충족되는 행복한 밤이다.
“슬슬 숙소로 돌아갈까?”
“밥때도 됐지.”
폴짝 뛰어올라 품에 안기는 포잉을 익숙하게 받쳐 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하나뿐이었지만, 결국 나는 혼자이지 않기에 괜찮다.
결국 참지 못하고 포잉의 털에 뺨을 부볐다가 한 대 얻어맞고 그만뒀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내 요정님.”
“흥.”
* * *
포잉은 물놀이하다 지쳐서 침대에 뻗어버린 계약자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놈은 제 나이가 아직도 10대인 줄 아는지, 원.
키만 안 자라나 했더니 정신머리도 안 자란 모양이었다.
이불로 배를 가리지 않으면 탈이 나는 주제에 이불은 챙기지도 못하고 누워버렸다.
한숨을 푹 내쉰 포잉은 정령의 힘을 아주 살짝 이용해서 이불을 잘 끌어다 덮어주었다.
이제 더 클 것은 기대도 안 하니 그저 무사히 살아가기만을 바랐다.
조그만 아이 같던 계약자는 아직도 작았다.
일할 때는 그래도 잘 자란 것 같아 보이는데 평소에는 이렇게 칠칠치 못하니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런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함께 보았던 첫 바닷가를 기억하는 게 그뿐만이 아니어서, 포잉은 내심 기분 좋았다.
헛소리한다고 혼꾸멍을 냈는데 그게 헛소리가 아니었구나 싶어서.
포잉에게 함께 하고 싶은 게 많다고 늘 조잘거리던 게 말뿐만이 아니어서.
포잉은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인간의 감정이 때에 따라서는 독이 되기도 한다던 포포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도 쭉 지켜주마.”
포잉은 여느 날처럼 잠든 지환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소중한 자신의 아이가 행복한 꿈을 꾸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