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 아껴줄게(5)
컨디션 회복을 위해 오늘은 일찍 숙소로 간다는 말에 키스는 혀를 찼다.
일찍이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니.
아직 성장기인 병아리들이 자라려면 진즉 누웠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키스, 그는 정작 자신이 저 나이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병아리들의 성장을 염려하기 이전에 자신들의 과거나 돌아볼 것이지.
그들은 노느라, 혹은 그 당시 몰두한 취미에 푹 빠져서.
하루 이틀쯤은 홀딱 지새우던 기억들은 깡그리 잊고 있었다.
시커먼 남자 넷은 병아리들 숙소 앞에서 낯선 남자를 마주했다.
눈이 마주하자마자 서로를 경계하던 그들.
그 긴장감 어린 대치 끝에 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저는 이 집 사시는 분들 지인인데, 그쪽은 누구시죠?”
날카로운 키스의 발언에 잠시 현관문 앞에서 숨을 돌리던 종범도 날카로워졌다.
연이은 야근도 힘들었지만, 자기보다 더 몸이 축나는 스케줄을 군소리 없이 소화하는 멤버들이었다.
미약한 자존심이 차마 아이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도록 붙들고 있었다.
그나마 이제 가장 힘든 기간이 끝나고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지만 적응하면 괜찮다고 말했던 선배를 원망했다.
조금 힘들다고요? 이게요?
경호를 설 때보다 신경 쓰고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특히 종범은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었으니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 앨범 준비에 바로 투입되어 최근에는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더 늦게 와도 된다고, 먼저 들어가라고 늘 아이들은 미안해하며 말했지만 고지식한 종범은 그러지 못했다.
자기 일을 남에게 미루는 성정도 아닐뿐더러, 다 같이 고생하는 데 혼자 편하게 있을 만큼 뻔뻔하지도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어딘가 불량해 보이는 네 명의 남자는 수상해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지만, 피로한 종범의 뇌는 그들이 새벽 멤버들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서로 별다른 말 없이 대치하던 그때. 닫혔던 문이 열렸고, 종범은 재빨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이전 있었던 다양한 일을 미리 우진에게 들은 터라 안전에 민감해진 것.
하지만 그때, 새벽도 빼꼼 내민 병아리들 모습에 반가워 성큼 다가왔다.
“어라, 진짜 왔어요?”
“종범 형? 아직 안 가셨어요?”
전자는 어딘가 떨떠름한 지환의 목소리였고, 후자는 세빈이었다.
“진짜 아는 사람들이야, 얘들아?”
종범은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고, 그 말을 들은 가영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내가 쟤네 형이거든!”
“가영 형, 조용히 해요. 신고당하겠네. 형은 형인데 그 형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가영의 외침을 한마디로 일축한 지환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룹 새벽의 멤버들이라고 밝혔다.
그제야 신원이 확인된 그들을 향해 종범은 깍듯이 인사하며 사과했다.
워낙 정중한 몸짓이었기에 방금까지의 불쾌한 느낌을 토로하기엔 어색해졌다.
“새로운 매니저님이 생겼다고 들었는데 그분이셨네요. 반갑습니다, 이세율입니다. 활동명이 세비입니다.”
드릉드릉한 가영과 다진을 밀어낸 세비가 먼저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김윤혁입니다.”
키스도 깔끔하게 인사를 건넸고, 세비와 키스는 자연스럽게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형 간 줄 알았는데 바로 안 가실 거면 같이 놀래요?”
“형 피곤할 거야, 직장인은 퇴근만큼 행복한 게 없다고 누나가 그랬단 말이야.”
마치 직장생활을 오래 경험해본 듯,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종범을 두고 눈을 빛내던 힘찬은 지환의 제지에 금세 처량한 얼굴로 종범을 바라봤다.
지환은 평소에 어딘지 모르게 애늙은이 같기도 하고, 생각의 흐름이 통통 튀는 편이었다.
역시 지환은 피붙이인 누님도 범상치 않은 사람인 듯했다.
선배인 우진의 간결한 설명에 따르면 정윤 실장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했는데.
더불어 자신이 귀찮냐고 물어오는 무구한 눈빛에 종범은 말문이 막혔다.
“가려다 잠깐 숨돌리고 있었어. 늦었으니까 형은 먼저 갈게. 잘 때 꼭 문단속 잘하고. 너무 늦게 자지 마.”
종범은 힘찬에게 절대로 귀찮은 게 아니고 최근 잠을 잘 못 잤다며, 다음에 놀자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자신이 왜 이렇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힘찬의 눈빛에 휘둘려 설명하던 종범.
“저희도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까지 숙소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밖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다진이 물었다.
“아, 네. 들어가세요.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너무 예의 바른 태도라 되레 머쓱해진 가영과 다진은 어딘지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가영과 다진은 천성적으로 진중하고 격식을 차리는 사람들과는 맞지 않았다.
대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반면 종범은 언래블과 가까운 사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들에 대한 경계를 즉시 거두었다.
순순히 숙소에 들어가는 멤버들을 바라보던 종범은 문단속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집으로 향했다.
겨우 주어진 달콤한 퇴근이었다.
* * *
익숙한 회사의 로고가 스쳐 지나가고 화면을 채운 건 이전 앨범에서 보았던 문이었다.
새까맣고 반질거리는 윤이 나는 무거워 보이는 문.
그 문 앞은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었고, 그 앞에는 언래블 멤버들이 애틋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처음 여행을 떠나던 그때와 같은 옷을 입은 멤버들의 얼굴은 어쩐지 그사이 훌쩍 자란 듯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다들 한쪽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내보이듯 내민 손안에는 반지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잊지 말자는 듯, 각자의 반지를 움켜쥔 언래블.
영빈은 슬픈 눈으로 이제는 훌쩍 자란 세빈의 뺨을 매만졌다.
자신보다 작을 때 뺨에 났던 상처를 기억하는 듯, 꼭 그 위치였다.
멤버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한번 꼭 껴안기도 하며 이별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런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멤버들의 목소리가 아닌 나직한 허밍과 여전히 가벼워 보이는 두드림.
톡, 톡…, 토옥, 톡…, 톡, 톡, 토옥, 톡…, 톡, 톡….
언뜻 박자를 세는 것 같기도 한 두드림은 생각보다 허밍과 잘 어울렸다.
공허한 공간을 울리는 묘한 느낌과 함께 멤버들은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갔다.
그렇게 기묘한 문이 모든 멤버들을 먹어 치우자 언제나 그렇듯, 문은 허공으로 녹아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천천히 흐려지는 사이에도 텅 빈듯한 이곳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허밍과 두드림은 지속됐다.
토옥, 톡···, 톡, 톡···, 토옥···, 토옥···, 톡, 토옥···, 토옥···.
* * *
“어우, 진짜 오글거려서 못 하겠어!”
뮤비의 티저 영상이 공개되던 날, 우리는 추가 촬영을 해야 했다.
A&R 팀에서 아무래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실장님을 졸랐다고 했다.
조르다니….
선생님들, 왜 점점 단어 선택이 찬이 같아지시지…?
아무래도 최힘찬의 전염성이 강력한 모양이라며 자신을 달랜 나는 심란한 눈으로 찬이를 바라봤다.
세빈이랑 마주 보며 서글픈 눈을 해야 했지만, 이미 몇 번째 NG였다.
색을 모두 찬이에게 빼앗긴 듯, 우리 막내는 오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이었다.
반면 찬이는 밤바다를 닮은 짙푸른 의상에 새카만 머리를 차분히 내렸다.
이제는 제법 시선도 비슷해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됐다.
둘의 의상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늘하늘하게 늘어지는 천들과 구속하듯 온몸에 치렁치렁하게 늘어지는 끈들.
“감독님…. 쪼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힘찬아, 이번엔 5분이면 되니?”
감독님은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찬이 모습에 측은한 듯 물었다.
“네….”
“그래, 다녀와.”
이미 여러 번 우리와 합을 맞춘 감독님은 이제는 꽤 편하게 우리를 대했다.
가끔 영감이 떠오른다고 혼자 음침하게 웃으시는 걸 빼면 여러모로 좋은 분이셨다.
세트장에서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내 곁으로 다가온 세빈이는 골이 나 보였다.
“아니, 새삼스럽게 왜 저렇게 민망해 한 대요?”
“뒤늦게 사춘기라도 왔나 보지.”
“찬이 형은 그럼 매년 사춘기게요?”
자기도 민망한 건 마찬가지지만, 이건 일이지 않냐고 불퉁한 얼굴을 한 막내를 살살 달랬다.
평소에는 눈만 마주쳐도 하악질을 해대는 고양이 같은 둘이다 보니, 아무래도 애틋한 눈망울은 힘들었나 보다.
‘저놈이 정말 괜찮은 게 맞음?’
‘응…. 그냥 삽질하는 거니까 무시해도 괜찮아, 포잉.’
포잉은 찬이가 우다다 달려간 곳을 미심쩍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의상이나 소품을 정리해놓는 창고 같은 공간에 들어간 찬이가 무얼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분명 벽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치고 있겠지.
포잉은 찬이가 제정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라고 했다.
가끔 멤버들과 닭살 돋는 연출을 해야 할 때, 그 느낌이 일정치가 넘어가면 찬이는 못 견뎌 했다.
차라리 싸우는 시늉을 하라고 하면 잘할 자신이 있다고 감독님을 붙들고 숫제 애원하기도 했다.
그때 준이 형이 이를 갈면서 속으로 무수한 욕을 삼켰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고.
그날 그렇게 같은 방에서 어떤 정신 공격을 당한 건지 그 후로 찬이는 이전보다 더 오래 참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집중하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아까 형이랑 찍으면서 오늘치를 다 썼나 봐요.”
“그런가 봐. 그래도 어쩌겠니. 저 모지리가 성격이 그런걸.”
한숨을 폭 내쉬는 우리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 나는 아까 찍었던 사진들을 떠올렸다.
내 쪽으로 힘껏 팔을 뻗던 찬이, 그리고 그런 찬이에게 팔을 뻗는 나.
팔을 뻗던 나는 이윽고 포기한 듯 찬이를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바닥으로 훅 떨어졌다.
그때 마주한 찬이 얼굴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창백했다.
내 쪽으로 뻗은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메이크업 덕분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촬영에 너무 몰입해서 놀라기도 한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안전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한껏 몰입해있었던 터라, 나도 찬이도 감정적으로 굴었다.
그래야 했던 장면이기도 했고.
와이어에 의지하고 움직여야 하는 장면이라 여러 번 찍기는 힘들었다.
둘 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촬영에 임했고, 다행히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무사히 우리 몫의 촬영이 끝나고, 찬이는 내 곁으로 다가와 살피며 무사한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괜찮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기에 가만히 두었다.
우리 모지리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발달한 아이니까.
그리고 얼마 후 금방 평소 텐션으로 돌아온 찬이는 새 의상을 갈아입으며 낄낄거렸다.
그게 또 참 힘찬이다워서 뭐라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문득 아까 사진이 후처리까지 끝나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됐다.
아까 감독님이 엄청 신나 하셨는데.
그때 얇은 셔츠를 걸친 영빈 형이 다가왔다.
“찬이는?”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지러 갔어요. 준이 형은요?”
“곧 나올 거야.”
또 그러냐는 얼굴을 하던 영빈 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거 금방 지워지는 거예요?”
“응. 그래도 바로 막 지워지는 건 아니래.”
세빈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영빈 형을 살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빈 형과 준이 형 둘은 상체를 그림으로 채웠다.
맏형들은 이번 뮤비에서 일부 노출이 있어야 했기에, 한동안 탄수화물은 쳐다도 보지 못해 힘들어했다.
지난 촬영에는 우리도 일부 그림을 그려 넣긴 했지만, 형들처럼 전체를 다 감싸는 큰 그림은 아니었으니까.
타투처럼 보이도록 그려 넣은 그림은 우리 이미지를 반전시켜줄 나름의 키 포인트였다.
솜뭉치들이 좋아하려나….
포잉은 질색했는데.
일 때문이라지만 목덜미와 왼손을 차지하던 그림에 포잉은 하악질까지 하며 싫어했다.
“나도 타투 해보고 싶다….”
“…!”
“…?!”
벌써 타투에 흥미를 보이는 막내 모습에 슬쩍 풀어졌던 정신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리고 영빈 형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서로가 하려는 말을 직감했다.
세빈이에게 잔소리해야 할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