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아껴줄게(1)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이냐.”
포포는 이제는 자신의 앞발보다 조금 더 커진 포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지간하면 요정계에 잘 오지도 않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자신에게까지 왔다.
늘 계약자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혼내야 할 때도 따로 호출해야 했던 포잉.
오늘은 무언가 포포에게 용건이 있는 모양인지 먼저 찾아와 앞에 앉았다.
자세가 늘 자유분방하고 방만하던 아인데 어쩐지 조금 곧아진 것도 같았다.
‘계약자의 영향인가? 옥사의 말로는 굉장히 반듯한 아이라던데.’
포포는 흥미로운 기색을 속으로 잘 감추며 담담하게 말했다.
계약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저 조그만 녀석이 얼마나 성질을 낼지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이 상당한 아이라 그런 성질머리에 질색한 요정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포잉이 관대하게 대하는 건 옥사 정도일까.
요정 나무에서 태어나는 어린 요정들은 모두 다양한 환생을 거듭한 영혼들이니 성격도 다양했다.
“다른 게 아니라….”
포잉은 무언가 못마땅한지 조금 뚱한 얼굴이 되었지만, 포포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은 했다.
“중급 요정이 되어야 실체화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맞는데.”
“전 되는 거 같은데요?”
“음?”
포포의 짙고 하얀 눈썹이 꿈틀했다.
나이만큼이나 새하얀 털들이 잘게 움찔거렸다.
“실체화가 가능하다고?”
“넹. 오래는 안되고 하루 한두 시간쯤?”
“확실히 네놈이 뛰어나긴 하네.”
“제가 쫌.”
뚱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잔뜩 으쓱거리던 포잉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잘난 척을 해댔다.
그래봤자 포포에게는 병아리가 삐악거리는 거로밖에 안 보였지만.
“고 버릇없는 입은 언제쯤 자라려는 지, 원.”
“제 입은 다 자랐거든요? 그래서 왜 이런 거예요?”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고얀 포잉의 모습에 포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놈한테 내가 무얼 바라겠냐. 하아, 최근에 좀 뭔가 깨달은 게 있느냐.”
포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포잉이 꼬리를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우리 병아리를 보다가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죠.”
“그때 빛도 나고 몸도 좀 컸을 거고.”
“네.”
“너도 알다시피 요정은 나이를 먹는다고 크지 않는다. 깨달음이 쌓이고 그것들로 자라지.”
“그건 이미 다 배운 거잖아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부루퉁하게 대꾸하는 포잉의 모습에 포포는 참지 못하고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말을 하면 좀 듣고 있어! 다 듣고 질문하면 누가 쫓아오냐, 이 고얀 놈아!”
“빨리 계약자한테 가야 한단 말이에요!”
이 조그만 아이는 포포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있었다.
자신의 계약자를 중히 여기는 것은 좋은 마음가짐이지만, 포포는 왠지 섭섭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부터 오냐오냐하며 고이 키워온 놈이 이제는 자신을 귀찮아하다니.
물론 원래 갓 태어난 요정 아이들을 모든 장로와 유모 요정들이 함께 키우는 거지만.
그래도 포잉은 포포에게 꽤 특별했다.
태어나자마자 빽빽 울면서 자신에게 오려고 버둥대던 작은 아이였는데.
그래서 친히 이름도 지어주었거늘.
한숨을 푹 내쉰 포포는 다시 근엄한 얼굴로 포잉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완전한 중급 요정이 되는 건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계약이 완료된 후다. 하지만 종종 계약자와 유대가 강하고 깨달음이 빠르면 조금 이르게 능력이 개화하기도 한단다.”
“수업 시간에는 그런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잖아요?”
포포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포잉의 이마에 다시 한번 딱밤을 놓았다.
“예외적인 상황이니 정규 수업에는 빠져있는 게 당연하지.”
“예외적인 상황들도 알아야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죠!”
포포의 설명에도 포잉은 지지 않고 또박또박 따져 물었다.
포잉의 의문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포포는 앞발로 턱을 문지르다 설명을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소원 요정은 기본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 본성이 선하나 지극히 일부 타락하는 때도 있지.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교만이다. 나는 다른 개체보다 우월하다는 마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겠지?”
타락한 소원 요정의 위험성은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 끊임없이 알리는 이야기였다.
그 불행한 일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알고 있는 포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많은 논의 끝에 특별함이란 것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저 보편적인 것들을 가르치고 개별적으로 하나씩 일러주는 거지.”
포포의 얼굴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깊은 슬픔과 그리움이 드러났다.
“우리는 그런 불행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기를 바란단다, 얘야. 그러니 너도 늘 주의하거라.”
뜨끈한 포포의 앞발이 작고 작은 포잉의 머리를 조심조심 매만졌다.
늘 인자하게 빛나던 포포의 눈동자가 오늘은 너무 슬퍼 보여서 포잉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실의 고통은 포잉이 아직 알 수 없지만, 짐작은 조금 할 수 있다.
포잉도 자신의 계약자와 이별하는 순간을 떠올려봤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건 무척이나 아프고 먹먹한 느낌이라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했다.
다른 동식물들과의 계약은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었는데.
더불어 이미 그런 상실을 겪고 살아가야 하는 계약자가 더 안쓰러워졌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부지런히 살아가고, 최선을 다하고, 포잉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곤 한다.
인간은 이렇게 강하구나.
포포는 생각에 빠진 듯한 포잉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이가 자라는 걸 지켜보는 건 포포의 긴 삶 동안 변치 않았던 기쁨이다.
대부분의 어린 요정들이 훌륭하게 자라서 제 몫을 해냈고, 그 아이들이 다음 세대의 요정들을 가르친다.
그렇게 모든 세계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걸 포포도 알고 있지만, 가끔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소원 요정의 수명은 이토록 긴 것인가.
오랜 시간 살아간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일을 겪고, 그 추억 속에서 산다는 것이라 포포는 가끔 이 삶이 지쳤다.
오랜 삶을 산 다른 요정들처럼 삶을 마무리할까 고민하던 중 만난 포잉이 그래서 더 애틋한 걸지도.
포포는 부디 이 작고 어린 요정이 착실하게 잘 자라길 빌었다.
이왕이면 철도 좀 들었으면 좋겠고.
* * *
아니나 다를까.
기뻐서 눈물이 났다는 내 항변에도 그 눈물 한 방울로 사방에서 놀림을 받아야 했다.
멤버들뿐만 아니라 언제 그 방송을 본 건지 새벽 형들, 골든 아워 형들, 멜트 멤버들에게도 메시지가 왔다.
[일주년 축하해! 근데 울었다며?ㅋㅋㅋㅋ]
[우냐? 울어?ㅋㅋㅋㅋㅋ]
[오구오구 우리 화니 울어써?]
등등 무수한 놀림에 부들부들 떨던 나는 단체 채팅방을 나가버렸다.
채팅방을 나가고 형들을 전부 차단했더니 그제야 놀림을 멈춘 형들.
내 주변에는 왜 죄다 이런 사람들만 있단 말인가.
그 뒤로 한동안 차단을 풀지 않았더니 멤버들을 통해 연락을 해오질 않나, SNS에 메시지를 올리질 않나.
도대체 이 사람들은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비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 이제는 정상이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정상인에 가까운 종범 매니저님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종범 형님은 우리 애들과 사방에서 터지는 여러 자잘한 사건 사고들에 혼이 나간 얼굴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우진 형이 자잘한 일들은 웃으며 그 자리에서 다 해치우는 것과는 역시 달랐다.
파릇파릇한 신입의 냄새가 폴폴 풍겼달까.
그런 종범 형님은 특유의 각이 잡힌 태도 때문인지, 신입이기 때문인지 꽤 사랑받는 것 같았다.
회사 분들도, 서포트 팀분들도 종범 형님을 놀리느라 행복해 보였으니까.
“형님, 힘내세요.”
“이제 형이라고 불러줄 때도 되지 않았니…?”
“형님도 좋잖아요?”
“우진 선배님보다 내가 더 나이 든 것 같잖아.”
“아, 그도 그렇네요? 근데 우진 형한테 가서 말해도 돼요?”
“내가 잘못했다….”
계속 존대를 사용하던 종범 형님은 경환 형과 찬이가 신나게 괴롭힌 덕분에 드디어 우리에게 말을 놓았다.
거의 온종일 붙어 다니다 보니 이제는 이런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고.
요령 부리지 않고 우직한 성격이라던 우진 형의 설명이 딱 맞는 사람 같았다.
일주년을 준비하느라 빠듯하게 돌아가던 일상이, 이제는 앨범 준비하느라 복잡한 일상으로 바뀌었다.
하루하루 알차게 보내는 이 삶에 나도 멤버들도 적응한 지 오래였지만, 종범 형님은 아직 힘겨운 듯했다.
워낙 짧은 시간 동안 바뀌는 것도, 해야 하는 게 많기도 하고 장기 프로젝트도 있으니까.
개인 레슨을 끝내고 오늘 일정을 위해 이동하는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주차장이었다.
“왔어?”
“얍. 아고, 허리가 쑤셔요.”
“네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허리가 쑤셔….”
“근육을 쥐어짜지는 거니까 당연히 아프죠. 영빈 형, 죽은 거 아니지?”
반겨주는 멤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의자에 폭 기댔더니 온몸이 욱신거렸다.
끙끙거리던 내가 같이 고통받은 영빈 형을 찾았다.
형은 나보다 상태가 안 좋았던 건지, 힘없이 손만 흔들어주고 의자에 기대 숨만 쉬고 있었다.
오늘 꼭 파스 붙이고 자라고 해야겠다.
영빈 형의 상태를 체크한 나는 팔다리를 주무르며 다른 멤버들도 살폈다.
다행히 준이 형은 지치긴 했지만 괜찮아 보였고 막내 라인은 멀쩡했다.
다음 앨범은 부드러운 느낌으로 만들겠다는 우리 다짐과 달리 제영 쌤은 다시 안무 구상에 미쳐버렸다.
찬이와 세빈이의 아크로바틱으로도 부족했던 걸까?
앨범 때마다 자꾸 안무를 어렵게 만들어내고, 우리는 울면서 거기에 적응하고.
왜 춤이 늘고 운동량이 느는데도 매번 힘들까.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나는 울적한 얼굴로 세빈이의 안마를 받았다.
우리 막내가 점점 손이 야무져지는구나….
“그래도 오늘은 일찍 끝날 테니까 가서 좀 쉬어.”
“안 돼요…. 할 게 아직 많아….”
우진 형이 일정만 끝나면 숙소 가서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준이 형이 슬픈 얼굴로 거절했다.
새 앨범을 준비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쌓이는지 알기에 우리 모두 시무룩하게 끄덕였다.
그저 곡을 받아서 안무를 배우고 노래를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돌이 점차 영역을 넓히면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TV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편이 아니기에 더 앨범에 더 공을 들이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를 사랑해주는 팬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거로 생각했으니까.
“나약한 마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지.”
“맞아,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해야 해요.”
막내들까지 조그만 머리를 끄덕이며 답하자 우진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는 지나치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적절한 휴식은 꼭 필요해.”
“우리 완전 괜찮은데!”
찬이의 외침은 우진 형에게 닿지 못했는지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근데 좀 뜬금없긴 한데.”
“그치? 우리가 기부하던 곳이 아닌데 우릴 부르니까 낯설다.”
홍보대사에 위촉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해 온 곳은 멤버들과는 따로 연이 있던 게 아니었다.
팀장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서 사진 찍고 임명장 받고 오면 된다며 가볍게 이야기해 주셨다.
회사에서 알아서 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기에 우리끼리 수군거리자 종범 형님이 수첩을 뒤적이며 설명을 해주셨다.
“소현 팀장님이 너희가 계속 궁금해하면 말해주라고 하셨는데, 회사에서 언래블 이름으로 정기 기부하고 있어. 그것 때문인 거 같아.”
“네?”
회사에서?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