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90)화 (390/456)

390. 별이 빛나는 밤(4)

1주년 영상은 순서대로 찍진 않았다.

얼개를 짜놓고 스케줄 틈틈이 먼저 촬영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찍고.

그렇게 세 번째 영상을 마지막으로 모든 촬영을 끝마쳤다.

그리고 그날 첫 번째 영상이 공개되었다.

12시 25분.

한밤중의 늦은 시간 공개된 처음 영상.

그 순간 솜뭉치들은 영상 공개 시간을 눈치챘다.

‘애들 생일이구나!’

그 후 9시 20분에 두 번째 영상이 공개되면서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5시 8분, 3시 19분, 8시 5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시 11분.

차례대로 공개된 영상은 하나씩 콘셉트를 잡고 촬영한 건지 각기 다른 장소였다.

공통점이라면 언래블 특유의 편안하고 부들부들한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 톡톡 튀어나오는 진심이 담긴 솜털 같은 말들.

학교, 회사, 숙소(집), 동네 공원, 캠프장, 여행지.

영상의 배경들은 모두의 일상을 대변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학교에서는 덕력 시험지의 풀이를 멤버들과 해볼 수 있었고, 회사에서는 환상 속의 회사 선배나 상사를 볼 수 있었다.

현실에는 신입의 실수에도 화내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사가 잘 없으니 유니콘 같은 게 아닐까?

일단 현실은 외모부터가….

어느 회사 부장님이 영빈처럼 생겼을까.

집에서 친구들과 잡담하듯 나누는 편안한 파티는 두말할 것 없이 즐거웠다.

동물 잠옷은 무척 귀여웠지만, 병아리 잠옷이 아니라 아쉽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새벽의 가영이 언래블의 공식 SNS 계정에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자기가 선물한 잠옷은 안 입어주는 거냐고.

그리고 슬프게도 그 메시지에는 언래블 멤버가 아닌 매니저의 답변이 달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는 단호한.

동네 공원은 데뷔 초, 멤버들이 말하던 진실의 공원인 듯했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두운 밤, 낡아서 삐걱거리는 그네를 타며 그들은 연습생 시절의 추억을 말했다.

언젠가 팬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면서 치열했을 그때를 웃으며 이야기해 주었다.

수영장이 있는 펜션에서의 하루는 다 같이 여행을 간듯한 느낌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푸는 게 아니라 던져놓고 수영장으로 달려가는 경환과 힘찬, 세빈.

한숨을 쉬며 짐을 수습하는 하준과 지환.

이미 모든 기운이 빠진 건지 소파에 늘어지는 영빈.

배경은 지금이 아닌 한겨울이었다.

언제 이런 걸 찍어서 준비했던 걸까.

아주 오래전부터 1주년을 기다려온 듯한 모습에 팬들은 영상을 보면서 뭉클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조용한 숲속 자리한 텐트와 모닥불.

그 앞에 모여 앉아 있는 영상은 언제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긴 팔, 긴바지를 입었으니 최근 영상은 아닌 것 같은데.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멤버들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가까운 미래가 아닌 아주 먼 미래.

모두가 한마디씩 덧붙여서 그리는 그들의 미래에는 솜뭉치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었다.

다양한 계절, 다양한 배경의 영상은 그들이 함께한 일 년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1주년이 되는 당일.

저녁 10시 14분.

정식 팬클럽 창단식이 있었던 날짜였다.

6명의 멤버들과 솜뭉치까지 꼭 그렇게 모두가 한 팀이라는 듯이.

언래블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었다.

* * *

이번 라이브 방송의 분위기는 오두막 안의 여행자들 콘셉트였다.

긴 여행을 나서는 사람들처럼, 커다란 배낭이 6개 준비되어 있었다.

스튜디오를 오두막처럼 꾸미고 작은 나무 테이블 위에는 과일과 단순한 디자인의 컵이 놓여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방송 시작을 기다리던 우리는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환하게 웃었다.

“오, 시작됐다!”

“된 건가? 아, 됐어요? 솜뭉치들 들려요?”

평소처럼 파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웃어버렸다.

일 년이 돼도 우리 애들은 참 변함없구나 싶어서.

솜뭉치들이 어느 정도 들어온 것 같자, 준이 형 시작 멘트를 읊었다.

“언래블의 한 살 생일 파티에 와주신 솜뭉치들, 반가워요!”

“언래블이 한 살이 됐어요! 와아!”

“우리 같이 축하해요!”

준이 형의 인삿말에 결국 참지 못한 세빈이와 찬이가 한마디씩 보탰다.

우리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에 우리 모습과 솜뭉치들이 보내는 메시지가 나오고 있었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하고 시작할게요.”

영빈 형의 웃음 섞인 대사가 흘러나오고 준이 형의 고갯짓과 함께 익숙한 구호를 외쳤다.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이렇게 한목소리로 외칠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이 연습했던지.

“간단하게 자기소개하고 한 살 된 심정을 이야기해볼까요? 누가 먼저 해볼래요?”

“저요! 제가 먼저 할래요!”

평소보다 훨씬 활기차 보이는 세빈이가 손을 번쩍 들었고, 준이 형이 끄덕였다.

“언래블의 실세를 맡은 막내 세빈입니다!”

막내의 씩씩한 소개에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영해주자 용기 내서 손까지 들어놓고 또 얼굴이 붉어졌다.

귀여운 내 새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동안에도 세빈이는 또박또박 일 년 된 심정을 이야기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서 일 년이 됐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네, 우리 막내는 일 년이 실감 안 난다고 하네요. 그럼 자세한 심정은 조금 후에 하고 다음으로는 씨아이가 해볼까?”

준이 형은 단호하게 막내의 말을 잘랐고, 준이 형이 이럴 리 없다는 듯 바라보던 세빈이는 심통 난 얼굴이 됐다.

“네, 랩 하는 씨아이입니다. 음, 아직 제 PC에는 쌓인 곡이 많아요, 여러분.”

“앞으로 보여줄 곡이 더 많다고 하네요. 이번엔 히스?”

“언래블의 메인 보컬 히스입니다. 함께 일주년을 축하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영빈 형은 누가 대본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정석대로의 대답을 했다.

대답은 정석이었지만, 얼굴에 가득한 기쁨 누가 보아도 진실이기에 같이 웃을 수 있었다.

“이제 노래도 쪼금 늘은 힘찬입니다! 파티는 역시 다 같이 해야 재밌죠!”

찬이는 준이 형의 소개가 있기 전, 먼저 외쳤다.

“언래블의 정상인 환입니다. 함께 하는 이 시간을 무척 기다렸어요. 같이 즐겨요.”

그래서 분위기에 휩쓸린 나도 밝은 목소리로 답할 수 있었고.

“이런, 래블이들이 이제는 제 말도 잘 안 듣네요. 저는 이 말썽꾸러기들의 형이고, 언래블의 리더인 하준입니다. 저도 무척 기다렸어요, 오늘을.”

결국 준이 형도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지금, 이 순간 행복함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대본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우리 방식대로 솜뭉치들을 반겼다.

그렇게 소란스럽게 조잘거리는 시간이 잠깐 흘러가고, 겨우 분위기를 진정시킨 준이 형이 오늘의 콘셉트를 설명했다.

“삶은 기나긴 여행길이라는 말이 있죠. 저희는 언래블과 솜뭉치들이 함께 여행길에 오르는 거로 생각했어요.”

아직 웃음기가 남아있던 목소리가 점차 차분해졌다.

찬이는 경환 형에게 솜뭉치들이 보낸 메시지를 보라는 듯 손짓했고, 세빈이는 눈을 반짝이며 영빈 형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이런 분위기가 나를 한없이 들뜨게 했다.

“그래서 여행의 낭만을 나타낼 수 있는 게 어떤 게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이런 분위기를 떠올렸어요.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화려하지 않지만, 굳세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공간.

입구에는 먼 길 무사히 다녀오길 기원하는 깃털과 크리스털로 만든 부적이 걸려있었다.

한쪽에 쌓인 배낭 옆에는 지팡이로 삼을 잘 깎인 나무 장대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있었고.

“제가 판타지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판타지에서 나오는 그런 여행 장면을 좀 넣고 싶었어요.”

준이 형의 설명에 보충하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단단한 가죽신, 튼튼한 가방과 로브, 그리고 여행길에 만난 친구들과 우정, 그런 로망이 살짝 있거든요.”

“얘가 평소에는 되게 현실적인데 이런 면이 있어서 놀랐어요.”

조금은 멋쩍어서 웃으며 뺨을 긁적이는 사이 찬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판타지 세상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야. 이 파티로는 여행 가다가 도적 만나면 도망치기 바쁠 텐데.”

“아니, 왜 얘기가 또 그렇게 돼요?”

경환 형이 툭 건네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에 찬이는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이 너무 정직해서 그건 그거대로 재밌었다.

별거 아닌 이야기로도 우리는 웃으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중간중간 솜뭉치들이 보내온 메시지도 읽어주면서.

“가볍게 대화도 나눴고, 콘셉트도 이야기했으니 다음 순서를 진행해볼까요?”

“다음 순서는 뭐에요?”

“일단은 생일 파티니까 선물 교환식이 있어야죠.”

카메라를 향해 윙크하는 준이 형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잘 어울려서 더 이상했다.

형, 이렇게 능글맞지 않았잖아…?

역시 우리 형은 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날 놀라게 했다.

“며칠 전에 매니저님을 통해 각자 뽑기를 했을 거예요. 그 상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미션이 있었죠?”

“맞아요. 서로 비밀로 하고 준비한다고 고생했죠.”

그렇게 각자 꺼낸 조그만 상자들.

누구는 책을, 누구는 과자 상자를, 또 누군가는 피로회복제를 준비하기도 해서 그마저도 즐거웠다.

선물을 보면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군지 너무 투명하다고 해야 할까.

영빈 형은 책을 받아 들고 기쁘다며 웃었지만 사실 저 책을 이미 샀다는 걸 아는 나는 조용히 웃었다.

찬이를 위한 과자 상자, 준이 형을 위한 피로회복제, 경환 형이 받은 특정 브랜드의 젤리 여러 개.

어른스러워지고 싶어 하는 세빈이는 만년필을 들고 행복해했고, 나는 섬유 향수를 받았다.

“내가 환기 좀 시키라고 했다고 복수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형은 그런 사람 아니다.”

시원한 숲의 향이라고 해서 골랐다는 진지한 경환 형.

잔소리했던 게 찔려서 물은 건데 저렇게 진지하게 답하면 내가 민망하잖아!

그래도 서로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후하게 점수를 주기로 했다.

그 후에는 솜뭉치들이 연합해서 보냈다는 생일 케이크와 회사에서 준비해준 케이크를 나란히 꺼냈다.

“우리가 이렇게 케이크 부자네!”

“이거 다 먹어도 돼요?”

오두막치고는 호화로운 케이크였고,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예쁜 케이크였다.

“풀어나갈 모든 미래에 함께할게.”

솜뭉치들이 보내준 생일 케이크에 적힌 문구를 세빈이가 천천히 소리 내 읽었다.

그 한 문장을 적어 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을 두고 고민했을까.

마음을 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모습을 알아서,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갑자기 눈물이 툭 떨어졌다.

“어?”

“야, 왜 울어.”

당황한 멤버들이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눈가를 쓱쓱 문질러 닦은 후, 다급히 그런 멤버들을 말렸다.

“그냥. 갑자기 울컥해서 그래요.”

“좋은 날 왜 울고 그러냐. 솜뭉치들 놀랐겠다.”

찬이가 슬그머니 옆에 붙어 내 얼굴을 살폈다.

“원래 사람이 너무 기쁘면 울기도 한 대요.”

“그러게.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나 봐요. 솜뭉치들 미안해요.”

온갖 장면과 감정들이 흡사 주마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덕질했던 시간과 처음 이곳에서의 삶, 우리가 쌓아온 많은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떠올라 버거웠다.

‘괜찮다, 계약자 놈아.’

‘포잉….’

‘너는 잘해왔고, 또 잘할 거니까. 내가 네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이 모자란 놈아.’

유일하게 이곳에서 온전히 나를 이해하는 내 요정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고, 너는 무척 잘해왔다고.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애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걱정과 안타까움이 담긴 온갖 눈길 속에는 한결같은 나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우리 솜뭉치들이 너무 예쁘게 말해줘서 감동해서 눈물이 다 나네요. 어휴, 이거 또 짤로 퍼트리면 안 돼요!”

걱정스러운 메시지가 빠르게 화면을 채워갔기에 부러 더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미 캡쳐 떴다는 메시지와 이미 늦었다는 말들이 채팅창에 올라왔다.

“앗, 저도 보여주세요!”

“보여주긴 뭘 보여줘, 인마!”

당황했던 것도 잠시, 우리는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장난치며 시간을 이어 나갔다.

앞으로 영원히 기억할 하루가 한겨울 눈처럼 소복하게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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