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 별이 빛나는 밤(3)
“키가 조금 큰 거 같다?”
“응?”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 회사에서는 가족들과 저녁이라도 먹으며 하룻밤 쉬고 오라고 했다.
낮에는 학교로, 그 외에는 회사와 스튜디오에서 녹아드는 멤버들이 어지간히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른 회사에 비하면 무척 자유로웠던 터라 우리가 원한다면 주말에 가족들을 보고 올 수 있다.
다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나도, 우리 애들도 생각보다 욕심이 많았으니까.
하나둘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잘 모르던 이면의 것들을 보고.
그러면서 가까이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팬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다독여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우리는 당사자기에 우리의 일을 가볍게 여기기도 하지만, 지켜만 봐야 하는 팬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일련의 사건들을 겪어가면서 팬덤의 성향이 조금 바뀌었다는 회사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 앞에서는 마냥 아름답게 웃고 사랑스러운 말을 들려주는 솜뭉치들.
그들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새로운 솜뭉치들을 모으기 위해 적극적이었다.
몸집을 불리며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들을 막아서고 싸우기를 꺼리지 않았다.
몽글몽글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담아 솜뭉치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우리 팬들은 솜인형의 겉모습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런 다양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솜뭉치들은 회사에서 놓친 자잘한 디테일을 신경 써주었고, 우리 매력을 잘 포장해서 더 멀리 퍼트려주었다.
1주년을 앞두고 회사에서는 자체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언제 입덕하게 되었는지, 어떤 앨범을 가장 좋아하는지, 어떤 곡을 좋아하는지, 입덕 계기는 무엇인지 등.
앞으로 회사의 방향성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팀장님의 평도 놀라웠지만, 설문조사 결과도 신기했다.
입덕 계기 중에 다른 팬의 사진이나 영상이 있는 건 놀랍지 않았다.
이미 전생에 그런 경우를 무수히 많이 보아왔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해외 팬들은 그 비율이 더 높아서 뭉클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 텐데,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나 애써주고 있다는 게.
내 조잡한 영상을 좋아해 주고 사진을 칭찬해주던 그 세계의 솜뭉치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뿌듯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팬들이 노력해준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저 종이에 출력된 텍스트와 숫자일 뿐인데.
그것이 너무 따뜻해서 몇 번이나 그 문장을 손으로 더듬었다.
우리는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
못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던 찬이 얼굴도 생각났다.
눈가가 촉촉해진 세빈이도 있었고.
회사에서는 늘 우리에게 우리는 직업이 아이돌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팬들의 중요함을 되새겨주었다.
팬들이 퍼부어주는 애정과 노력, 금전적인 부분까지 모두 잊지 말라고 했다.
그걸 간과하고 너희가 특별하다는 선민의식에 빠지는 순간, 팬들도 등을 돌릴 거라고.
소현 팀장님은 다정할 때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엄격함을 잊지 않았다.
회의 때마다 현재 우리가 어디쯤을 걷고 있는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빼놓지 않고 설명해주셨다.
그러니 더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깐의 휴식조차 가끔은 사치라고 느껴져 조급해졌다.
이 시간에 한 글자라도 가사를 쓰고, 음표를 찍으며 곡을 쓰고, 연습해야 하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나는 다른 멤버들에 비하면 더 느린 걸지도.
모두가 뭐에 홀린 것처럼 바쁘게 돌아다녔고, 보다 못한 팀장님이 우리를 억지로 집으로 보내버렸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겠다는 것도 막고 팀장님과 우진 형, 종범 매니저님까지 나서서 태워다주셨다.
“키가 큰 거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뭐야.”
집에 도착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를 살펴보던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가 컸다기보다 몸이 조금 좋아진 건가? 여튼 미묘하게 다르네. 이제는 운동 열심히 하나 봐?”
놀리듯 중얼거리던 누나에게는 차마 멤버들에게 하듯 들이박을 수가 없었다.
“난 원래 열심히 했거든?”
“그래서 나한테까지 네가 움직이질 않는다고 하소연이 들어오냐?”
“그게 다 오해라니까?”
툴툴거리는 내 모습에 어련하겠냐는 듯 비웃음을 짓던 누나.
누나와도 많은 일이 있었다.
이 집에 적응하고 누나를 받아들이고 어린 지환이를 보내고.
낯설기만 했던 지환이 방이 내 방이 되고, 거실의 낡은 소파가 익숙해지고.
그리고 나를 걱정하는 눈길을 감추지 못하는 누나를 더 이상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넌 어릴 때부터 약해서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고 코피 흘렸으니까 조심해. 어쩜 그렇게 저질 체력인지.”
“내가 그랬어?”
“그럼. 너 아기 때 걸핏하면 코피 흘려서 버린 옷이 몇 벌인데.”
피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며 툴툴거리던 누나에 의하면, 어릴 때 나는 빈혈도 있었다고 했다.
그걸 고친다고 어머니가 무척 고생하셨다고.
이건 지환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다.
아마 정말 어렸을 때 일이겠지.
“지금은 튼튼해. 잠도 잘 자고, 다이어트하는 게 힘들긴 한데 그래도 영양제도 꼭꼭 챙겨서 먹으니까.”
“그런 애가 홍삼을 달고 사냐? 네 나이 때 홍삼을 그렇게 물처럼 들이켜는 사람도 드물 거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팩트로 공격하는 통에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왔지만 거기까지였다.
애당초 누나한테 말로 이기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저번에 보내준 보약은 다 먹었지?”
“응. 그거 먹을 때는 홍삼 먹지 말라고 했잖아. 잘 지켜서 먹었지.”
“그게 약빨이 잘 받나 보네. 용하긴 용하네.”
누나는 아까부터 내가 부쩍 큰 것 같다며 뿌듯한 얼굴로 나를 살폈다.
약빨이라니….
“누나, 올해 휴가 때 여행 갈래?”
“너랑 가서 뭐 해. 넌 종일 잘 거잖아.”
“아니, 나랑 말고 친구랑 가든가, 아니면 작은아버지네 모시고 가든가.”
뜬금없는 내 의견에 누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순순히 내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냥 음, 돈이 꽤 많이 쌓였거든? 그걸 보니까 효도란 걸 해보고 싶어서?”
“효도? 야 이,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선물이라고, 선물!”
효도라는 말에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가는 누나.
다급하게 선물이라고 말을 바꾼 나는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작은어머니 수술 끝나고 요양 중이니 휴양지 같은 데서 좀 쉬시는 것도 좋지 않겠냐.
작은아버지와 어머니께 받은 은혜도 조금 갚고 누나도 쉬었으면 좋겠다고.
초호화 여행까지는 안 되더라도 편히 쉬다 왔으면 좋겠다고.
“됐어, 그 정도는 누나 선에서도 가능해.”
“내가 해야 나도 보람을 느끼지!”
일정이 되면 나도 함께 갔으면 좋겠지만, 휴가철이라 불리는 그 시즌에 과연 시간이 날까 싶었다.
자꾸만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누나의 모습에 답답해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내가 선물하고 싶단 말야!”
“앉아. 이게 어디서 목소릴 높여.”
무섭게 말하는 누나 모습에 기가 죽은 나는 결국 소파에 얌전히 앉아야 했다.
내 누나들은 어떻게 둘 다 이렇게 단호한 사람들인지.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되잖아. 누나한테 어른들한테 선물하고 싶어. 칭찬받고 싶어, 하고.”
“부끄럽게 그런 걸 어떻게 말해….”
누나가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낯간지러운 말을 직접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전에도 지금도 나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힘드니까.
“자꾸 숨기고 감추려고 하면 상대방이 오해할 수도 있어, 환아. 넌 네 마음을 좀 더 솔직하게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해. 적어도 네 사람에게는.”
진지하게 말하는 누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잃지 말라고 누누이 말하던 사람이다.
가장 좋은 건 솔직하게 상대방에게 감사를 표하는 거라고 말하기도 했고.
누나는 연예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 안 좋은 이야기가 많이 떠도는 곳이라, 내가 그곳에서 오해를 사고 비난당하는 걸 염려했다.
건너건너 방송가의 일을 여럿 들었던 것도 있고, 악플 사건과 공정한의 일을 겪었으니까.
방송국의 작가와 PD가 개인의 가정사를 그런 식으로 악용했던 건 누나에게도 충격이었을 터.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누나는 좀처럼 믿지 못했다.
내가 그저 무르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혔고.
아직도 마냥 나를 아기로만 보는 사람이니 이런 걱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자란 환경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이 평화롭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누나.”
“왜?”
“누나 생각보다 동생은 적응도 잘했고,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야.”
고심 끝에 부끄러운 말을 조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본가에 가는 걸 알고는 오랜만에 요정계에서 하룻밤 쉬고 오겠다던 포잉.
이런 상황이 되니 포잉이 없는 게 되려 다행이었다.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놀렸을까.
“다행히 회사 분들도 엄청 좋아서 곁에 별걸 다 배우고 있어. 앞으로 어딘가서도 호구 당하지 않을 것 같아.”
핸드폰 살 때도 호구 잡히지 않을 것 같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실없는 농담에 엄하기만 했던 누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어릴 때 워낙 비실거려서 누나가 걱정하는 거 아는데, 알다시피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 내가. 그래서 착실하게 잘 배우고 있어.”
늘 나를 걱정하느라 가슴앓이하는 누나에게 이제는 정말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열심히 돈도 벌고 있고, 좋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배우고 있다고.
남들과 다르다는 건 개성 있는 거고, 특이하다는 건 특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
무언가 이루어 낸다는 뿌듯함.
알아가는 것에 대한 기쁨.
사랑받는다는 행복한 기분.
노력이 보상받는다는 것.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 수 있는 마음.
이 많은 것들을 나는 두 번의 삶을 살면서 겨우 깨우치고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무사하게 누나의 또 다른 동생이 잘 크고 있다고, 안심해도 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로 여행을 기획했던 건데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는 네 누나야.”
“알아, 그래서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
나는 누나가 더는 공지환의 누나라는 역할에 매여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너무 긴 시간 고통받아야 했고, 책임감에 짓눌려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공연희로서의 인생을 더 즐기고 조금 더 행복하기를 바랐다.
“나는 누나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하루하루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누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이제 그만 고생하라고.
먹먹하게, 하지만 고집스럽게 자신을 나의 누나라고 말하는 이 사람이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감정이 복받치는 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누나가 이상하게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내가 누나 옆에 앉아 어깨에 기대자, 마주한 피부 너머로 떨림이 느껴졌다.
“누나.”
“….”
“누나아….”
어릴 때처럼, 칭얼거리듯 조르듯 누나를 부르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 말썽꾸러기야.”
“내가 더 잘할게. 그러니까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아무튼 입만 살아서는.”
어깨에 기대 온기를 나누며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가족이 되어 줘서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소리로 꺼내지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분명 오늘 어렵게 꺼낸 이 마음들이 누나에게 잘 전달되었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