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Desperate(2)
“종범아.”
“네, 선배님.”
기합이 바짝 들어간 종범의 태도에 만족한 우진은 후배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던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공적인 자리에서 네가 한사람 몫을 다 할 때까지는 존댓말을 쓸 거다.”
“네, 선배님.”
종범은 자신에게 허락된 대답이 그것뿐이라는 듯 우진 앞에 서서 반듯한 자세로 답했다.
우진이 고리타분하고 고압적인 상하 관계를 싫어한다는 걸 알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우진은 평소에는 한없이 넉넉하고 푸근한 사람이지만, 공사 구분이 뚜렷하고 룰을 어기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적어도 종범이 아는 ‘정우진’이라는 선배는 그랬다.
그 후로 우진은 종범에게 회사에서 주의해야 할 것들, 멤버들에게 말할 때 조심해야 할 것 등을 말했다.
식성이나 취향에 대해서는 사전에 따로 서류로 전달받았기에 외우기만 하면 됐다.
단순 경호가 아닌 일상의 대부분을 매니저 손에 맡기는 편이라 신경 쓸 것이 많다고 했다.
처음에는 걱정하기도 했다.
이전 직장에서 클라이언트의 비이성적인 갑질에 넌더리 내며 퇴사했던 종범.
엔터사와 일하는 선후배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어왔기에 더욱더.
그쪽 일을 하느니 경호 일이 낫다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연예계에 한발 담근 사람들은 쉽게 이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진의 연락을 받고 면접을 봤던 건, 우진을 존경하는 마음 외에도 호기심 때문이었다.
어떤 세계인지, 어떤 일들이 그렇게 매일 다사다난하게 일어나는지.
우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다른 직장인들이랑 비슷하다고 했다.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우진은 지금 직장이 마음에 들고 이대로 쭉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종범은 결국 긴장한 얼굴로 면접을 봤고, 오늘 드디어 당사자들을 만났다.
아이돌답게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소년들은 어린 얼굴이었고,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우진에게 다시 한번 교육을 받은 종범은 우진을 따라 콘셉트 회의를 진행하는 곳으로 갔다.
우진은 단순 매니저라기보다 회사 내에서 팀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
급여나 발언권, 그 밖의 복지도 전부.
우진의 여태까지 경력과 언래블과의 깊은 유대감을 높이 산 결과라고 했다.
실질적으로는 서포트 팀이라 불리는 언래블 전담팀의 실무를 하는 것도 우진이라고.
종범의 직속 상관은 우진이고, 우진의 상관은 소현이었다.
소현은 언래블과 연관된 모든 프로젝트와 스케줄의 선택을 대부분 전담했다.
그 위로는 정윤이라는 실장이 있다.
종범도 면접 때만 만났던 그녀는 잘 벼려진 칼날 같은 서늘한 느낌을 풍겼다.
단련된 몸이 아닌 것 같은데도 이렇게 기세가 날카롭다니.
종범은 우진이나 소현보다 정윤이라는 실장이 제일 무서웠다.
정장 입은 괴물들.
경호 일을 하던 사람끼리 두려움을 담아 부르던 그런 종류의 사람 같은 느낌.
종범은 직속 상관이 정윤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기존 세계관과 분리보다는 역시 어느 정도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분리된 세계는 차후에 시도해도 될 것 같은데, 지금 나눠버리면 팬들 입장에서는 좀 아쉽지 않을까요?”
제일 작았던 멤버가 진지한 얼굴로 눈앞의 어른들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일 년 동안 내놓은 앨범들을 보면 대체로 무겁다는 평이 많아. 이후 앨범까지 비슷한 분위기면 질릴 것 같은데.”
“세계관만 가져오는 거고 곡은 무겁지 않으면 되죠. 어차피 윤회를 섞은 이상 또 다른 어떤 세계를 만들어도 엮을 수 있으니까요.”
분명 싸우는 건 아닌데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날카롭게 대립하는 의견들이 오갔다.
아직 이쪽 업계 일을 잘 모르는 종범이 보기에도 멤버들의 발언이 꽤 구체적이라는 느낌이었다.
회의 자료를 손에 쥐고 PPT를 넘겨 가며 설명하는 모습이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종범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멤버들 뒤에 서 있던 우진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선배님, 이런 회의가 자주 있습니까?”
“언래블이 중심이 되는 모든 프로젝트에는 멤버들도 참여합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예의를 갖추겠다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정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게 보통 아이돌 그룹 모습인지.
늘 회의에 매니저도 참석해야 하는지.
본사 회의가 아닌 다른 현장에서는 어떤지.
우진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종범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지만, 꾹 눌러 참았다.
계속 사적인 질문을 하기엔 회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나중에 따로 질문할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한 종범은 회사 분위기와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투표 결과에 따라 다음 앨범은 동양풍으로 갑시다. 건욱 실장님, 준비 부탁드려요.”
“주영 팀장님, 들었죠?”
정윤 실장의 발언에 옆에 있던 건욱이라 불린 A&R팀 실장 옆에 있던 직원을 툭툭 쳤다.
“아이고,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네요.”
“팀장님만 믿을게요!”
너스레를 떠는 주영 팀장과 그런 다른 팀 팀장에게 스스럼없이 응원한다며 해사하게 웃는 멤버들.
회의가 한바탕 끝나고 나서야 언래블 멤버들은 아까의 소년들로 돌아왔다.
우르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먼저 회의실을 나갔고, 종범은 우진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런 종범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는 멤버들.
왠지 명절에 만난 조카들이 생각나는 눈빛이라 종범은 괜히 등줄기가 오싹했다.
뭔가 뺏어가거나 망가트리지 않을 텐데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매니저님은 원래 우진 형이랑 친했다면서요?”
“우진 선배님한테처럼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힘찬 이라는 멤버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초롱초롱한 얼굴로 질문했다.
종범이 클라이언트들에게 하듯 정중하게 말하자 화들짝 놀란 힘찬이 자기보다 작은 지환 뒤에 숨었다.
지환은 익숙하게 그런 힘찬의 어깨를 토닥이며 타일렀다.
“처음 뵙는 분이니까 우리를 존중하는 뜻에서 존댓말을 써주시는 거야. 그런 거에 일일이 놀라지 마, 없어 보이잖아.”
“그래도 좀 낯설잖아.”
“우진 형도 처음엔 반존대 썼잖아.”
“그건 엄청 오래전이잖아!”
종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우진이 나섰다.
“얘들아, 일단 연습실 가자. 가서 짧게 대화 좀 하고 연습하면 될 것 같은데.”
“앗,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요? 제영 쌤이 오늘 각오하랬는데….”
키만 훌쩍 크고 아직 한참 어린 얼굴을 한 세빈이라는 멤버가 우진의 설명에 시무룩해졌다.
그렇게 연습실로 멤버들을 끌고 간 우진의 뒷모습이 운동을 배우던 때처럼 듬직했다.
종범은 연습실에 도착한 후에 멤버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종범의 전 직장이 경호라는 걸 알게 된 멤버들은 호기심 가득한 질문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몇 가지는 같은 멤버들 선에서 잘리기도 했다.
주로 리더라는 하준과 지환이라는 멤버가 멤버들의 말을 정리했다.
“경호 대상에 관한 내용은 발설하지 않는 거라고 어디서 봤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건 묻는 거 아냐.”
라고 경호해봤던 대상에 관해 물었던 질문을 막아주고.
“얼마나 잘 싸우냐니. 종범 매니저님은 경호 업무가 아니라 매니저 일을 하러 오신 분인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고 답하려던 질문이 잘리기도 했다.
사실 저 나이 때 남자애들이니 당연히 궁금할 만한 내용도 전부 정리하는 둘의 솜씨는 감탄이 나왔다.
그런 멤버들을 내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우진의 얼굴이 낯설다 못해 무섭기도 했다.
도대체 앞으로 자신이 서포트해야 할 이 애들은 뭐 하는 애들인 거지?
종범은 아무래도 오늘 퇴근하면 더 많은 내용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댄스를 담당하는 김제영이라는 분이 들어왔고, 종범은 우진을 따라 연습실을 나왔다.
짧은 시간 동안 혼이 쏙 빠진 기분이었다.
그런 종범의 모습에 우진은 슬쩍 웃더니 어깨를 툭 쳤다.
“커피나 한잔하자.”
“네, 선배님.”
오늘 제일 많이 한 말을 다시 꺼내며 다행히 지금은 사적인 얘기를 하려는구나 싶어 안심했다.
아까부터 자꾸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손에 땀이 고여서 힘들던 참이었다.
더불어 종범은 오늘 하루가 무척 길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영빈은 신나서 조잘거리는 동생들 모습에 남몰래 웃었다.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사람에게 상처받았을 텐데도 자기 동생들은 여전히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우진의 후배라는 새로운 매니저를 소개받았을 때도 잠깐 경계하는 듯하더니 금방 신이 나서 마구 치댔다.
우진이 그동안 언래블을 제 몸보다 소중히 여겨줬다는 걸 모두가 알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우진이 소개해주는 사람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그런 근거 없는 믿음.
영빈은 아직 순수한 동생들이 신기하기도 했고 지켜주고 싶었다가도 걱정스러웠다.
하준만큼이나 영빈도 생각이 많은 편이라 늘 많은 것들을 염두에 뒀다.
언젠가 한 번은 하준과 그런 이야기도 했었다.
나중에 재계약을 생각해야 할 시즌이 오면 그때 우리는 어떨까 하는 얘기들.
지금까지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때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는 진지한 의견이 오가고 결국 동생들의 생각을 듣고 결정하자는 것으로 끝냈다.
누군가는 이제 고작 일 년 차 주제에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냐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빈은 친분 있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배웠다.
더불어 선배들을 통해 들은 많은 정보와 사건·사고는 영빈을 계속 고민하게 했다.
맏형이니까 자신이 더 단단히 준비해야 동생들을 잘 챙길 수 있다.
하준은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있으니 이런 것들은 영빈이 고민하는 게 옳다.
언래블에게는 늘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형들.
하지만 그 형들이 하는 이야기의 끝은 늘 같았다.
이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
‘사람을 너무 믿지 마, 영빈아. 그게 나든 누구든. 어차피 결정은 네가 하는 거고 그 결과도 네 몫이니까.’
언래블이 지금처럼 바빠지기 전, 회사에 놀러 왔던 가영에게 들었던 말이 늘 가슴에 남아있었다.
보컬로서의 테크닉도 훌륭했지만, 가영은 무서울 정도로 예민한 청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고.
가영은 자신은 정석과는 거리가 있는 타입의 보컬이라는 말을 웃으며 꺼냈다.
영빈이 자신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시기.
영빈은 새벽의 메인 보컬인 가영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가영은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영빈에게 퍼부어주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은 정석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받아들일 때도 잘 거르면서 받아들이라고.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의 가르침과는 여러모로 달랐고, 그 덕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줬다.
그렇게 다양성을 가르쳐준 가영은 그러면서도 영빈에게 경고했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누구나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간다는 걸 잊지 말라고 했다.
진지하지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듯 가볍게 웃으며 말하는 가영의 얼굴이 낯설어서 영빈은 잠시 굳었었다.
그런 영빈을 보고 가영은 또 낄낄거리며 놀려댔고.
하지만 가영이나 세비, 인하, 하겸 뿐만 아니라 키스도, 얀도, 단우도 하다못해 리우도.
모두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지키고 사람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예전처럼 피하기만 해서는 지킬 수 없다는 걸 영빈도 이제는 안다.
“형, 왜 그러고 있어요?”
“응?”
막내가 어느새 옆에 와서 영빈의 손등을 콕 찔렀다.
“무슨 걱정 있는 얼굴이라서요.”
“아냐. 그냥 늘 하던 고민이야.”
“자꾸 고민하고 인상 쓰면 늙는대요, 환이 형이.”
영빈의 손등을 콕콕 찌르는 무의미한 동작이 재밌었는지 세빈은 계속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지환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르르 녹을 것처럼 웃는 동생.
그 모습에 영빈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앞으로 다 같이 단단해지면 된다.
영빈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손 장난치던 막내의 머리를 헝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