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가자(5)
부드럽게 뺨을 스치는 바람이 무척 후끈후끈했다.
하지만 세상 가장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웃어야 하는 터라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컷!”
감독님의 ‘컷’ 소리가 나오자마자 주변에서 멤버들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다닥 달려온 서포트 팀 분들이 선풍기를 대주고 수건으로 감싼 얼음을 목에 대주고.
“으으…. 고맙습니다.”
“고생한다, 진짜. 쫌만 더 찍으면 끝날 거야.”
희주 누나는 안쓰럽다는 듯 우리를 달랬고, 가희 누나는 품 안 가득 들고 있던 손 선풍기를 하나씩 쥐여주었다.
“저쪽 가서 좀 앉아.”
“네에….”
몇 시간 동안 계속된 촬영 때문에 지친 우리는 간이 의자에 다시 빨래처럼 널려있었다.
더위에 유독 약한 멤버들은 입에 얼음을 물고 숨만 쉬고 있었다.
“이 한여름에 가죽이나 레자로 의상 입은 선배님들을 존경하기로 했어….”
“멋짐을 위해 나를 버려야 하다니.”
그나마 살아있는 찬이는 준이 형과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너희는 왜 학습이란 게 안 됨?’
‘아냐, 그냥 알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야….’
포잉은 혀를 차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한겨울 시상식에서 멋진 거만 외치다 얇은 의상 안에 핫팩을 넣고 달달 떨던 일을 콕 집었다.
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는걸.
멋지게 보여야 하니까 춥거나 더운 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했다.
포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늘 작고 작았던 우리 포잉이 갑자기 조금 자랐다.
꼬리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길어지고 통통했던 뺨이 조금 홀쭉해졌다.
자랐다! 라는 느낌이 아니라 조금 컸나…? 싶은 정도의 느낌.
잠들기 직전 품에 안으니 확실히 조금 컸다는 게 느껴지는 그 정도 성장이었다.
그래서 포잉에게 갑자기 이렇게 크는 거냐고 물었고, 포잉은 너 빼고 다 크는 거라고 비웃었더랬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언제 크는지 묻는 걸 잊었다.
뭐, 우리 요정님 조금씩 잘 자라면 다행인 거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크는 게 문제가 되진 않겠지 하고.
“지환아, 너 세빈이랑 찍을 차례야.”
“넵….”
아직 6월인데 이렇게 바람이 뜨거울 일인가.
절로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꾸역꾸역 잘 참았다.
지금은 광고 촬영 중이니까.
광고가 꽤 인기 있었는지 앙퀴라에서는 처음 영상 외에 추가 영상과 사진을 요구했고, 이번이 그 마지막이었다.
푸릇푸릇한 초원, 그리고 자유로운 듯 이곳을 뛰어다니는 우리.
신나서 풀밭 위를 구르기도 하고 하면서 청량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물론 현실과 촬영본 사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었지만, 일단 영상이나 사진은 잘 나오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무척 흡족한 얼굴로 웃고 계셨으니 좋은 징조가 아닐까?
“세빈이가 앞에서 뛰고 뒤에 지환이가 쫓아가자. 너무 빨리 뛰지 말고!”
처음에는 내가 먼저 뛰고 세빈이가 쫓아오는 그림이었는데, 신나서 뛰는 게 아니라 쫓기는 모습 같다고 하셨다.
세빈이가 나보다 커버려서 그림자가 생기기도 하니 반대가 더 괜찮을 것 같다고.
나도 모르게 울적한 표정이 돼버렸는지, 세빈이가 슬쩍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빈아?”
“헷, 이제 저도 형 머리 쓰다듬을 수 있어요.”
“쓰다듬을 수 있어도 형을 위해 하지 말아줘….”
형들이 쓰다듬어주고 업어 키운 우리 막내가 이제는 형들을 쓰다듬어주고 있다니.
한숨을 푹 쉬자 이번엔 어부바해준다며 업히라고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만해, 그거 아냐.”
“아니에요?”
“응. 안돼. 얼른.”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자 유순하고 동글동글한 세빈이 눈매가 시무룩해졌다.
마음이 약해졌지만, 다행히 금방 다잡고 손을 잡아 일으켰다.
왜 자꾸 세빈이한테서 찬이가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잘 자라기만 했으면 좋겠다.
우리 중에 가장 많이 변한 건 세빈이일까 나일까.
무사히 내 몫의 촬영을 끝내고 가희 누나가 쥐여준 얼음물을 홀짝거리니 내 곁으로 준이 형이 다가왔다.
“환아, 박온이 연락했다며.”
“아, 네. 리우 형이 휴이 때문에….”
준이 형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네가 너무 신경 안 썼으면 좋겠다.”
“괜찮아요. 그냥 얘기만 하는 건데요 뭐.”
나와 다른 크고 단단한 손이 머리 위에 얹어졌다.
처음에는 기자들도 방송국에서도 우리와 DCL을 라이벌 구도로 붙였다.
우리도 DCL도 거기에 휘둘리는 일 없이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인연을 쌓아갔다.
하지만 점점 컴백 시기가 엇갈리면서 만나기 어려웠고, 얼마 전 간신히 휴대폰을 받았다고 연락해왔다.
그렇게 그룹채팅방이 하나 더 생겼고, 며칠 후 리우 형에게 개인적인 연락이 왔다.
휴이랑 한 번만 이야기해 주면 안 되겠냐고.
이상하게 여긴 내가 캐묻자 리우 형은 휴이가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건지 조금 어두워졌다고 했다.
유난히 나를 좋아했으니 자기보다는 나와 조금 더 진솔하게 이야기할 것 같다고.
그 연락 이면에 숨어있는 팀 내의 크고 작은 다툼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팀 내의 일들은 대부분 그 안에서 해결된다.
사소한 다툼이라도 밖으로 나가면 불화설이 돌고 팬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니까.
DCL의 소속사가 멤버들에게 그렇게 살갑지 못한 것을 알기에 발을 빼기도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내게 부탁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고.
더불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휴이에게는 약간의 부채감이 있다.
두 맏형의 친구가 리더인 그룹이라 가까워졌던 DCL.
DCL의 멤버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호감을 보이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우리 멤버들을 모두 좋아했고, 그 행동이나 말 모두가 진심으로 느껴져서 낯선 기분이 들기도 했고.
패션쇼 당시에는 한없이 반가운 눈을 했던 휴이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의 행동이 순수한 호의라는 걸 믿지 않으려 했던 내 모습을 깨달아서.
그 후로는 복잡한 생각을 던져두고 그냥 보이는 대로 이해하려 했고, 그렇게 우리는 쭉 잘 지내왔다.
악플 사태의 도화선이 된 사람 때문에 회사에서 혼날 때도 휴이는 솔직하게 이야기해왔다.
DCL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도와왔으니 이번에는 내가 돕고 싶었다.
준이 형의 걱정도 이해했다.
어찌 됐든 형에게는 우리가 제일 우선이라는 게 느껴져서 이상하게 기분 좋기도 했고.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냥 손 놓고 있는 것도 싫었다.
“그냥 밥 한 끼 하면서 이야기나 들어주려고요. 흑염룡이 깨어난 우리 휴이가 무슨 헛소리 하나 좀 들어볼 겸.”
“그놈의 흑염룡.”
다정한 하준 형, 하지만 그 다정함이 우리에게만 허용되어 더 좋은 우리 형.
“인하 형한테 휴이 추천한 것도 저니까 겸사겸사 밥 한 끼 얻어먹고 오죠, 뭐.”
“그래, 비싼 거 사달라고 해라.”
“한우 사달라고 하면 화낼까요?”
“음, 그건 좀 양심이….”
“뭐야! 왜 둘이서만 웃는데!”
모처럼 준이 형과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찬이가 저쪽에서부터 소리 지르며 뛰어왔다.
이놈도 참 한결같아, 진짜.
“비밀이다, 이놈아.”
“아, 왜! 나도 알려줘!”
칭얼거리는 찬이를 떼어내며 준이 형과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 * *
휴이는 지환의 연락에 흔쾌히 밥을 사겠다고 답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언래블 멤버들이 자신들을 도우려 했다는 걸 알기에 정말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었으니까.
지환이 알려준 장소에 도착한 휴이는 버릇처럼 마스크를 더듬어 확인하고는 주변을 확인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에 만난 덕분에 가게 안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층으로 올라가자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구경하는 지환이 보였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생겨놓고 의외로 단단한 지환.
입가에 미소가 어린 걸 보아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날카로운 얼굴선, 깊어 보이는 눈.
휴이는 그런 지환의 얼굴이 부러웠다.
늘 웃고 다녀서 그런지 휴이 주변에는 온통 자신을 얕잡아보는 사람들뿐인데.
하지만 휴이는 지환에게 절대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지환 역시 얼굴 때문에 이유 없이 욕먹었던 것도, 그 때문에 지환이 그 얼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속으로 노래라도 부르는지 까딱거리던 고개가 스륵 돌아가며 눈이 마주쳤다.
얼핏 차갑게 보이던 얼굴이 꽃이 피는 것처럼 환해졌다.
그래, 휴이는 저 미소 때문에 지환이 유독 더 좋았다.
냉한 얼굴을 하던 사람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는 것.
그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고.
“미안, 늦었어.”
“괜찮아. 오늘 촬영인 줄 알았으면 나중에 만나자고 할 걸 그랬어.”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지환의 어깨를 툭 치며 휴이가 짓궂게 웃었다.
“미안하면 밥 니가 살래?”
“돈가스로 맞아봤냐?”
“헐, 먹는 거로 그러는 거 아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시시덕거리던 둘은 돈가스를 시켜놓고 못다 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휴이는 지환의 추천 덕분에 새로운 프로그램에 고정 MC로 들어갈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DCL이 반쯤 내정된 거나 다름없었다며 자신들의 공이라는 듯 굴었다.
하지만, 결국 50%의 확률에서 51%로 저울을 기울게 한 건 지환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사전 미팅 때와 오늘 현장에서 만난 선배님은 처음부터 그런 눈으로 자신을 봤다.
‘네가 언래블 애들이 말하던 그 휴이구나.’
‘네가 지환이 친구 휴이구나.’
그 눈빛은 유난히 휴이에게 아프게 박혔다.
왜 우리 주변에는 저렇게 좋은 사람들이 드물까.
휴이는 언래블이 좋았고, 지환은 특히 더 좋았다.
휴이가 연예인이 되고 마주한 많은 사람 중 지환만큼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없었다.
늦은 오후의 여유로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선명한 색의 풍경, 은은하게 다가오는 선풍기 바람과 그사이에 스며드는 돈가스 냄새.
느긋하게 의자에 늘어진 휴이와 달리 지환의 자세는 늘 한결같이 곧았다.
휴이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오랜만에 느끼는 친구와 함께하는 한가로운 오후라는 것에 감사했다.
이제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조차 많이 남지 않아서 그래서 더 귀한 것.
“너 사춘기라며.”
“형이 이야기했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휴이와 달리 지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느긋한 얼굴이었다.
“어. 네 안에 잠든 흑염룡좀 재워달래. 준이 형이 가능하면 내 흑염룡도 좀 재우고 오라더라.”
“아, 뭐야. 유치하게.”
아차 싶었던 휴이는 태연한 지환의 모습에 겨우 시큰둥한 척 대꾸할 수 있었다.
리더인 리우가 자신을 걱정하는 건 알았지만, 무어라 말을 하기 힘들었다.
걱정되어 밥이나 먹자고 자신을 부른 지환에게 짜증 내고 싶지 않았다.
휴이는 자신이 그 정도로 염치없는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유 없이 불쑥 치솟았던 분노를 다시 눌러놓고 한숨이 튀어나왔다.
“누가 뒤에서 욕하든?”
“하루 이틀이냐?”
“뭐, 그것도 맞지.”
지환의 물음에 퉁명스레 대꾸해버렸지만, 지환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뒤에서 욕하는 사람도, 앞에서 눈치 주는 사람도, 무시하는 사람도 늘 있었으니까.
그 뒤로 둘 다 별다른 말 없이 돈가스를 끝장내는데 몰두했다.
지환은 왕돈가스를 시킨 자신을 욕하며 휴이에게 자신의 몫을 은근슬쩍 넘겼다.
체구도 작은 게 먹는 것도 이렇게 부실해서야.
“좀 팍팍 먹어, 왜 이렇게 못 먹냐.”
“야, 못 먹긴. 내가 보통인 거야.”
커다란 돈가스 한 장을 끝내고 지환의 몫까지 모조리 끝낸 휴이의 타박에 지환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 뒤로도 지환은 태연한 얼굴로 휴이와 DCL의 일상을 물었다.
레노와 자인이는 여전한지, 숙소에서는 뭐 하고 노는지, 어떤 프로그램에서 무얼 했는지.
노곤노곤해질 정도로 가볍고 편안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렇게 한바탕 이야기가 끝나고 슬슬 일어나자는 지환의 말에 휴이는 망설였다.
“왜 안 물어봐?”
“뭘?”
“리우 형이랑 싸웠냐고 왜 안 묻냐.”
말간 지환의 눈에 비친 자신이 어쩐지 작아 보였다.
“물어봤으면 좋겠어?”
“어?”
“네가 말하고 싶어졌는지 묻는 거야.”
지환이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안 해도 돼. 어차피 난 너랑 밥 먹으러 나온 거니까.”
어쩐지 휴이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