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 가자(4)
객석에서 병아리들의 무대를 지켜보던 포잉은 겸사겸사 주변 인간들을 살폈다.
자신이야 조그만 아가들이 어떻게 준비를 해왔는지 알고 있지만, 이들은 모를 테니까.
조금 전 흥겨운 분위기의 곡에 들떠있던 사람들이라 차분하게 가라앉는 노래가 어떻게 들릴지도 궁금했다.
사뿐사뿐 도톰한 발이 바닥이 아닌 허공을 밟았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병아리들의 무대와 다른 인간들의 반응을 모두 보기 위해서였다.
기특하게도 연습할 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간 병아리들은 박자에 맞춰 착착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 연습 때, 조금씩 빠르게 움직여 힘들어하던 계약자 놈도 오늘만큼은 잘 맞추고 있었다.
흐릿한 안개를 표현한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몽글몽글하게 아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촉감이 보들보들해서 건드리기 좋았던 옷이 잘 맞는 조그만 병아리들.
정말 인간의 아이들은 빠르게 컸다.
일 년 전에는 다들 갓난쟁이처럼 약하게만 보였는데.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반쯤 내리깐 눈, 감정을 듬뿍 넣었는지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과 속눈썹.
영빈이 입을 열자, 가득 차 있던 주머니의 끈이 풀린 것처럼 소리가 확 퍼져 나왔다.
날카롭던 눈매가 쳐지자 평소보다 더 애틋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그만 것들이 거참.’
계약자인 지환을 제외한 다른 병아리들은 다들 몸이 훌쩍 컸다.
그런 몸인데도 은은한 조명과 부드럽게 하늘거리는 옷 재질 때문인지 연약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풍겼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인간들이 많았지만, 노래가 시작되자 인간들의 표정이 다채로워졌다.
집중한 듯 입술을 꾹 깨문 인간도 있었고, 미간을 좁히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인간은 벌써 심취한 건지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눈가가 촉촉해지는 인간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무릎 위로 얹었던 손에 무언가를 쥐듯 꾹 힘을 주기도 했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이며 흐름을 타기도 했다.
포잉은 늘 이런 인간들의 반응이 신기했다.
어떤 노래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이전에는 포잉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조그만 계약자를 만나고 함께하면서 조금씩 느끼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가끔 숙소에 있는 안전한 계약자를 확인하면 거리를 걷기도 하고 주변을 구경했던 포잉.
이제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언래블의 노래가 들리면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듣곤 했다.
그 노래 한 곡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계약자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즈음 있었던 일들도 기억났다.
그런 경험을 한 후에야 포잉은 추억이 쌓인다는 그 말의 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잠든 기억은 유한하고, 바쁜 삶 속에서 일일이 그 기억을 뒤지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노래, 향, 분위기나 풍경을 접하면 그때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제야 포잉은 왜 인간들이 그토록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고, 노래를 사랑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먼 훗날 지금의 계약자와 이별하게 되어도 포잉은 새벽 바다 내음을 맡거나 안개 낀 숲을 보면 지환을 떠올릴 것 같았다.
함께 여행 가자고 했던, 포잉에게 맛있는 걸 주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던 자신의 첫 인간 계약자.
눈물도 웃음도 헤프고 늘 어설픈 조그만 인간 아이.
포잉은 왜 지성체와의 계약 완료가 중급 요정 시험인지 이해했다.
어떤 인간도 볼 수 없는 은은한 빛이 포잉의 몸을 감쌌다.
깨달음은 요정을 자라게 해준다.
그리고 포잉은 자신의 작은 아이를 통해 오늘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환에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뿌듯함이 담긴 얼굴로 무대와 객석 모두를 관찰한 포잉.
포잉은 자신의 아이가 지금보다 더 크게 자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 물론 키는 자라지 않겠지만.
* * *
“아, 정말 많은 준비가 보이는 무대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신비롭고 슬픈 느낌이었죠, 나중에는 따뜻한 느낌으로 바뀌었고요. 조금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MC의 질문에 준이 형이 열기가 남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연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살면서 자의든 타의든 많은 이별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차분하고 부드럽게 울리는 준이 형의 목소리에 MC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줬다.
중간중간 적절한 추임새와 핵심을 찌르는 질문도 잊지 않았다.
역시 저 정도 말빨과 리액션을 할 수 있어야 MC를 할 수 있구나 싶었다.
몇 가지 질문 후 우리는 세진 선배 옆에 섰다.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세진 선배님은 촉촉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진짜 잘했어, 어쩜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거야.”
노래에 흠뻑 빠졌던 건지 아직도 그 여운이 남은 얼굴로 우리를 마구 칭찬해주셨다.
뜻하지 않은 칭찬에 우리 애들 얼굴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세빈이는 아직도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지 얼굴이 발그레해졌지만, 무척 기분 좋아 보였다.
귀여운 내 새끼들.
인망 있는 선배님께 칭찬도 들었고, 기뻐하는 우리 애들도 보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남는 장사다.
[살아가는 동안의 무수한 이별을 모두 담아 녹여낸 언래블의 이별! 지금부터 언래블의 이별이 마음에 들었던 분들은 버튼을 눌러주세요!]
MC의 외침에 따라 커다란 스크린에는 우리 이름이 떠올랐고, 숫자가 쭉쭉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형들 뒤에 숨을 수 없지만, 서로 손은 잡아줄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막내들 손을 잡아준 나는 빠르게 변하는 숫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경연이라는 부담 때문에 무대에 몰두하느라 객석을 많이 살필 수 없었다.
틈틈이 사람들의 표정이 어떤지 살폈지만, 평소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사실이니까.
쏟아지던 환호성과 박수가 예사롭지 않았어도 우리 상대는 세진 선배였던 터라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지더라도 많이 차이만 안 났으면.
우리를 더 많은 사람이 인정해줬으면.
그런 간절함을 담아 점차 느려지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어느 시점부터 무작위의 숫자를 보여주던 수치가 마지막 자리부터 멈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숫자가 멈춘 그 순간.
“407! 오늘의 최고 득점자가 나왔습니다!”
스크린의 숫자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응시하다 멍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성큼 다가와 손을 잡아준 세진 선배님 덕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잘했어, 진짜로 잘했어, 얘들아!”
“감사합니다….”
자기 일처럼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주는 선배님 모습에 감동한 준이 형은 목이 멘 듯 힘겹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요요, 앙큼한 애기들 같으니라고! 나한테는 그렇게 엄살을 떨어놓고!”
“아니에요! 저희 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선배님이 활짝 웃으며 찬이 볼을 콕 찌르니, 찬이가 파드득 놀라선 양손을 허우적거렸다.
‘무사이’ 때는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
모든 걸 쏟아낸 무대를 인정받았다는 진한 만족감에 멤버들 모두가 흐물거렸다.
실제 방송일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 * *
“얘들아, 괜찮아?”
“네엥…. 아직 살아 있어요.”
“아마도요….”
세진 선배를 이긴 것도 놀라웠는데,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 있었던 것도 우리였다.
기절이라도 할 듯이 놀란 세빈이를 토닥이고 눈을 미친 듯이 깜박이던 경환 형을 붙들었다.
쏟아지는 다양한 색의 꽃가루와 사람들의 축하에 제대로 반응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음악방송에서 1위 했을 때, 신인상을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무언가가 가슴에 들어찼다.
당장 번화가로 달려나가 우리 이제 진짜 가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낭만 가객’은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하는 주말 황금시간대에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다.
거기에 출연한 것도 무척 좋은 기회지만, 마지막까지 무대에 남았으니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
좀처럼 진정하기 어려울 만큼 나도, 멤버들도 모두가 엄청나게 흥분했다.
차마 다른 방송국 분들 앞에서는 티 내지 못하고 억지로 그 마음을 꾹꾹 눌러 감췄지만.
우승했다고 너무 좋아 날뛰면 건방지다는 평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굳이 사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이제는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끼리 그런 것쯤은 알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평소처럼 길고 긴 인사를 끝낸 후,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야 기쁜 마음을 마음껏 표출했다.
정신이 나간 듯 흥분해서 떠들던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진이 빠져서 퍼져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우리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주었다.
정말 잘했다고.
무대 보면서 감동했다고.
우진 형은 늘 이렇게 촬영이 끝난 후에는 하나씩 칭찬할 거리를 찾아서 들려주었다.
항상 아주 작은 것부터 세심하게 챙겨주며 우리가 실수할 때조차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이런 사람을 우리 사람으로 배정받을 수 있다는 것조차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담당하는 아이돌을 귀찮은 짐처럼 취급하는 매니저도, 아이돌의 것을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하는 매니저도 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좋은 사람들의 장막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우진 형에게 마음을 다해 고맙다고, 형이 참 소중하다고 말했다.
준이 형과 영빈 형이 모범을 보였고, 자연스럽게 모든 멤버들이 형들을 따라 했다.
기특한 내 새끼들.
형을 돌려보낸 우리는 평소처럼 부지런히 씻고 우리의 소중한 휴식 공간에 모였다.
내가 씻고 나왔을 때는 준이 형은 벽에 기대 책을 펼치고 있었고, 영빈 형은 노래를 듣고 있었다.
찬이는 잠옷 바지만 입고 러그 위를 뒹굴뒹굴하고 있었고, 세빈이는 야무지게 노트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옷은 어디다 버리고 그러고 있어.”
“귀찮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잘 단련된 상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 졌다.
난 언제쯤 근육이 생기는 거지?
전보다는 단단해졌지만 클 생각을 하지 않는 내 몸이 떠올라 심통이 나서, 찬이를 툭 발로 밀어버렸다.
“보기 흉하니까 잠옷 입어, 인마.”
“아, 귀찮아.”
굴러가 놓고 다시 내 쪽으로 굴러온 찬이는 불퉁한 내 얼굴을 보더니 짓궂게 웃었다.
“부럽냐?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도 괜찮아. 내가 이해해줄게.”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진짜.”
은근한 목소리로 늘어진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찬이.
저걸 콱 발로 밟아줄까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다.
힘이 하나도 없는 몸은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뭐하냐.”
“형은 또 왜 벗고 돌아다녀.”
마지막으로 씻고 나온 경환 형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문지르고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경환 형의 몸과 춤으로 다져진 찬이 몸은 짜임새가 달랐다.
경환 형이 듬직하고 단단한 느낌이라면, 찬이는 오밀조밀하고 꽉 들어찬 느낌?
찬이 같은 몸을 만들고 싶었는데….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래도 멋진 몸을 만들고 싶었다.
약간의 로망이랄까.
하지만 트레이너 쌤이 이상하게 여길 만큼 근육이 잘 붙지 않는 터라 결국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차피, 내 인생에 근육은 글렀나보다 하고 포기해버린 것.
그나마 ‘DEAR’ 촬영 당시 무술 감독님과 불타는 열정으로 움직인 덕분에 아주 약간은 근육이 늘었다.
그래봤자 겉으로는 티도 안 나는 근육이지만, 근육이 조금 생긴 이후부터 춤 연습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격투기 쪽을 배워야 하나….
늘 저질 체력으로 허덕이던 내 고민은 물기만 대충 닦고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지는 경환 형 모습에 끝났다.
“제대로 말리라니까.”
내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끄덕이던 경환 형은 옆에서 깔짝거리던 찬이 위에 털썩 앉았다.
무겁다고 비명을 지르는 찬이와 그런 찬이를 놀리는 경환 형.
평소처럼 난장판인 거실이지만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되었다.
진 빠져서 골골대던 애들이 살아난 게 다행이기도 하고.
“정말이지 우리 애들은 한결같네. 하하.”
경환 형과 찬이의 전쟁에 가만있던 세빈이까지 얽히면서 거실은 왁자지껄해졌다.
책에 집중할 수 없어진 준이 형은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형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 같았다.
형, 우리 포기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