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75)화 (375/456)

375. 중독(Overdose)(3)

복작거리던 촬영이 끝난 우리는 그대로 회사로 복귀했다.

진이 빠지고 지친 내 손에 자기 사탕을 쥐여주는 세빈이.

이놈의 레몬 사탕.

초반에는 사탕만 보면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먹기 힘들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소중한 자기 사탕을 내 손에 쥐여주는 막내가 고맙기만 했다.

내게 내밀기까지 저 작은 머리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지 알았다.

여태까지 나는 세상이 몇 번이나 부서지고 재조립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사이 겪은 좌절이나 고통, 상실의 감각은 사는 내내 남아있을 것도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남은 건 조각조각 난 나를 단단히 붙여주었던 이들의 헌신과 신뢰.

피곤할 만도 한데 회사로 돌아가 새로운 무대를 준비할 생각에 신난 멤버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낭만 가객에서 선보일 무대 구성, 조금 전 팀별로 고민했던 무대 등.

천상 아이돌 재질의 내 새끼들 모습이 이렇게 뿌듯하다.

어떤 이야기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제는 아니까.

“다음부터는 꼭 형들한테 납치하기 전에 예고해달라고 할게.”

멤버들을 살펴보고 혼자 뿌듯해하던 그때, 준이 형이 말했다.

“일단 납치를 안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거기까지는 안 들어줄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말한 세빈이는 준이 형의 서글픈 대답에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다른 형들이 납치해도 형이 지켜줄게.”

몸만 컸지 아직 아가 같은 세빈이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켜주었다.

멤버들이랑 떨어지는 걸 싫어하는 세빈이에겐 그런 상황이 스트레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만 믿으라고 우진 형의 듬직한 미소를 흉내를 내보려 했지만,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세빈이 표정이 영 아니었다.

“에휴, 우리 형, 또 어디서 달랑달랑 들려서 납치 안 당하게 제가 더 힘낼게요.”

“응?”

갑자기 납치의 대상이 나로 바뀌었다.

달랑달랑 들려가다니, 세빈이의 언어 선택이 점점 찬이를 닮아가는 것 같아 몹시 슬퍼졌다.

“이 형이 그렇게 못미덥니….”

“일단 납치된 횟수가 형이 더 많으니까요.”

조곤조곤 팩트를 날리는 세빈이 말에 반박하지 못한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 귀여운 막내가 이제는 나를 구박하다니.

“그래도 엄한 사람한테 안 잡혀가는 게 어디야.”

영빈 형은 시무룩해진 내가 안쓰러웠던지 어깨를 토닥이며 편을 들어주었다.

“형, 일단 잡혀간다는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닐까?”

“모지리는 조용히 해.”

“맞아, 찐빵 형은 가만히 있어.”

“니네는 왜 나한테만 그러냐!”

모처럼 찬이가 정상적인 의문을 제기했지만, 나와 세빈이의 협동 공격에 금방 침몰해버렸다.

토라진 찬이를 달래주어야 했지만, 다 같이 회사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유쾌했다.

이런 게 행복 아니겠어?

* * *

섬을 나온 경우, 진성, 오수.

그들은 다음 촬영일을 기약하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진성아, 집 도착하면 연락하고!”

“네, 형님.”

“형도 도착하면 연락 남겨요. 아주 집에만 들어가면 사람이 나오질 않아.”

“너는 어째 잔소리만 자꾸 늘어가냐.”

오수는 진성과 경우에게 집에 도착하거든 꼭 연락을 남기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유독 잔정도 많고 사람을 잘 챙기는 오수였기에 진성도, 경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진성아.”

“네.”

경우와 진성은 사는 곳이 가까웠다.

어차피 근처에 머무니 큰일이 없다면 차 한 대로 다니기로 이미 이야기를 해두었다.

땅끝마을이라는 해남에서도 더 들어가야 하는 섬이었다.

근처에 공항이라도 있다면 국내선을 탔겠지만, 가장 가까운 공항이 무안과 광주다 보니 자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기다리던 경우의 매니저와 인사를 나누고 차에 탄 두 사람.

“내가 가서 그놈의 물고기 다 회 떠 먹고 말 거다.”

“형님 날 것 잘 안 드시잖아요.”

“그렇게라도 이 억울함을 풀어야지! 그리고 하도 못 먹으니까 이제는 좀 먹고 싶다.”

계속된 낚시 실패에 경우는 집에 가면 바로 회를 시켜 먹을 거라며 투덜거렸다.

경우는 드라마에서 몇 번 마주하면서 진성과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지간히 무뚝뚝한 놈인가 싶었지만, 알면 알수록 뚝심 있고 의리 있는 진성이 마음에 들었다.

마냥 무뚝뚝한가 싶었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불쑥불쑥 무언가를 내미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받았다는 좋은 술, 맛있는 음식, 책 등 내미는 것들의 종류와 핑계도 다양했다.

하지만 진성의 선물은 하나같이 상대방이 좋아하거나 사려고 했던 것들이었다.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마냥 무른 놈.

그게 경우가 본 이진성이라는 사람이다.

“진성아.”

“네, 형님.”

묵직한 울림이 있는 경우의 목소리에 생각에 빠져있던 진성이 공손히 대답했다.

“진짜 고생 많았다.”

“….”

진성은 경우가 이번 촬영 때 고생했던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형이 더 도와줬어야 하는데 별거 못 해줘서 미안해.”

“아니에요. 정말 많이 도와주신 거 알아요. 되려 제가 형님한테 해드린 게 없는데….”

진성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 깊이 기댔다.

경우는 해준 게 없기는 뭐가 없냐며 픽 웃었다.

이진성은 정말 한 계단 한 계단 차분하게 밟아 올라온, 배우의 정석이었다.

아주 작은 역부터, 조바심 내지 않고 끈질기게 연기에 매달린 사람.

그런 진성을 오랜 시간 지켜본 이구영 감독.

그는 진성을 시험해보듯 단역부터 하나씩 제의했고 결국 ‘별도시’ 때는 확신에 차 진성을 캐스팅했다.

이구영 감독은 배우들 사이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미친 사람으로 유명했다.

디테일에 무서울 만큼 집착하는 사람이라 같이 작품 들어가기 부담스러운 타입이라는 평도 있었고.

하지만 그만큼 작품을 잘 만들어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게다가 한미영은 이미 다수의 흥행작을 써낸 작가.

때문에 ‘별도시’의 캐스팅에는 많은 시선이 몰렸었다.

사람들의 기대보다 드라마는 더 성공했고, 출연진 모두가 사방에서 러브 콜을 받았다.

반면, ‘별도시’의 흥행이 진성에게 꼭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찍던 그쯤부터 진성과 관련된 찌라시가 돌았다.

과거 몸담았던 소속사 사장과의 트러블에 관한 불쾌한 내용들.

진성은 이전 소속사에서 정산금 문제로 싸움이 있었다.

그는 이전부터 단역이라도 최선을 다해 연기했고, 쉬지 않고 덤벼들었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인 후에도 마찬가지로 일에 미친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다 씹어 삼키려는 듯 굴었다.

하지만 진성의 통장에 찍힌 5년간의 대가는 4,382,910원.

먹고 살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도 가리지 않고 해야 했다.

계약에 묶인 진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상황.

그때쯤 지인의 소개로 현 소속사 대표와 연이 닿았고, 무효 소송 끝에 겨우 자유를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 지저분한 일이 얽히고 엮이면서 정말 뒷맛이 더러운 이별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끝을 맺었지만,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많은 일이 있었다.

그게 벌써 5년도 더 된 일.

어느 정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드라마가 잘되니 놓친 물고기가 아까웠던 모양일까.

되지도 않은 사진을 증거랍시고, 진우가 과거에 폭력 문제가 있었다는 식의 소문을 기자들에게 흘려보냈다.

언제나 그렇듯 소문이 나는 건 무척 쉽고, 소문의 거짓을 밝히는 건 매우 어려웠다.

진성은 소문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문은 언제나 관심을 먹고 자랐고, 끊임없이 자가 증식했다.

낯선 사람과 진성이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기 위해 진성은 자신이 출연했던 작품들의 출연진을 모조리 뒤져야 했다.

‘불법 도박을 하다 사채를 썼다더라’ 같은 금전적인 부분에 관한 소문도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현 소속사와 강경하고 한결같은 태도로 대응했다.

그중에는 지환과 관련된 소문도 있어서 상황 수습을 위해 ON 엔터와 협력하기도 했다.

차마 이런 추악한 일들을 지환에게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보는 어린 후배에게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ON 엔터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고 직접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지환이 인터넷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찌나 다행이던지.

놀라서 연락한 사람 중에는 여진우도 있었다.

상황 설명을 들은 진우는 지환에게 최소한의 것은 말하는 게 좋을 거라 이야기했다.

뱀 같은 기자들의 혀가 어디서 어떤 식으로 지환에게 속살거릴지 모른다고.

진우의 이야기를 들은 진성은 결국 지환에게 간략히 이야기하는 것을 택했다.

그저 누가 자신에 관해 캐물으면 모른다고 하라고.

그 어린 후배는 추가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저 평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은 연기로 인기를 얻지 못했던 과거 무명 시절보다, 이런 상황들이 더 힘들었다.

일부러 대대적인 기자회견은 진행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와 고소장을 보내는 것으로 입장을 대변하는 게 더 잘 먹힌다는 걸 이미 경험했으니까.

이미 전 소속사 사장과의 분쟁에서 사람에게 질릴 만큼 질렸던 진성에게는 너무 힘든 나날이었다.

다행히 현 소속사의 일 처리는 훌륭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맥을 적극 활용해주었다.

경우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경우는 평소 살갑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다.

때문에 진성에게 경우는 낯간지러운 건 질색이라고 말하는, 멋지지만 조금 어려운 선배였다.

평소 나서서 챙겨주거나 보이는 곳에서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하지만 이번 일이 터진 후, 보여준 경우의 모습은 놀라웠다.

아는 기자들에게 자신이 아는 이진성이라는 사람에 관해 말했고,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응했다.

거기에 더해 주변 지인들에게도 진성의 편을 들어 이야기해 주었다.

경우는 상대방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손을 뻗어주는 사람이었다.

진성은 경우의 색다른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커다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 이러할까.

또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진성에게 호의적이었고, 도움을 주려 했다.

팬들은 하나같이 진성을 염려하고 응원하며 열심히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찾아다 회사에 제보했다.

방영 중인 드라마에 피해가 갈까 노심초사했던 것이 무색하게 감독과 작가는 일체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장 격렬했던 순간이 지나가고 소문이 사그라지던 그때.

지환이 연락해왔다.

지환은 그 사건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했다.

지환의 귀에도 소문 한 자락쯤은 들어갔을 게 분명한데도, 조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둘이 나눈 대화들은 한없이 가벼운 것들이었다.

자신의 일상생활과 멤버들 사이의 소소한 에피소드.

복잡한 생각 없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편안한 이야기들이었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지환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곤두선 진성의 신경을 달래기 충분했다.

연기할 때 이런 게 어렵다, 형이 도와줘서 정말 다행이다 등.

어떻게 이렇게 몽글몽글한 생명체가 있을까.

여진우가 지환을 병아리라 부르며 유달리 예뻐하는 게 이해됐다.

악의적인 소문과 악플 때문에 크게 고생했던 아이라 더 꺼릴 거라 생각했었는데.

언제 그런 소문이 있었냐는 듯 모든 일이 마무리된 그때.

진성은 도움을 준 지인들과 걱정해준 주변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번 일을 통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받은 도움을 꼭 더 큰 은혜로 갚고 싶었다.

한결 후련해진 진성의 얼굴을 살핀 경우는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너도 이 일은 혼자 해낼 수 없다는 거 알잖냐. 그럴 때는 옆에 사람한테 손도 좀 벌리고 의지도 하고 하는 거야.”

“네, 형님.”

“아, 맞다. 지환이 있잖아.”

경우가 지환의 이름을 꺼낸 그때.

진우를 바라보는 경우의 눈빛에 장난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눈동자.

진성은 어쩌면 은혜를 갚을 기회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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