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중독(Overdose)(2)
불길한 예상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고, 결국 이름도 몰랑한 분홍 팀의 팀장이 되어버렸다.
솜뭉치들이 이걸 보면 또 얼마나 신나게 놀려댈까….
자고로 팬이란 내 가수의 흑역사를 나노 단위로 분해해서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는 것이라 전생의 누나에게 배웠다.
그리고 실제로 주변의 무수한 솜뭉치들이 그렇게 즐기는 모습을 봐왔다.
그걸 보며 낄낄대고 즐거워했던 내가 이제는 그 대상이라니.
어쩐지 인생이란 무상한 것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슬픔을 뒤로하고 당장 눈앞에 닥친 과제들을 해결해나갔다.
무대에 설 곡을 고르고 편집 방향을 논의하고 틈틈이 아웅다웅하는 키스 형과 인하 형을 말리고.
마냥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이온과 태인에게 해명해야 했다.
모든 사람이 이렇지 않다고.
형님들이 아무래도 많이 신난 것 같다고.
머릿속으로는 비웃는 포잉에게 투덜대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내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마냥 든든하다는 듯 바라보는, 편곡할 때 빼고는 쓰임이 없는 경환 형도 달래야 했다.
관심을 주지 않으면 자꾸 시무룩한 분위기를 풍겨대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다른 팀원들을 쳐내는 것도 필요했다.
이럴 때는 키스 형과 경환 형이 유용하게 쓰였다.
대부분 키스 형 선에서 정리가 되어 마음이 편했다.
‘다했어?’ 하면서 은근슬쩍 우리 팀 정보를 캐려던 사람들은 키스 형의 삐딱한 시선에 ‘아 뜨거!’ 하고 도망쳤다.
다음에 만날 날짜는 각자 일정을 확인하고 조율하기로 했다.
그룹채팅방을 만들어 초대하느라 둘에게 번호를 물었지만, 이내 ‘아’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미안하다고 해야 했다.
1위 하기 전에 핸드폰 못 받을 거라는 걸 그새 깜박한 것.
서글픈 눈을 한 둘에게 너희도 금방 1위 하고 핸드폰 쓸 수 있을 거라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의 매니저를 통해 연락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후에야 조금 틈이 생겼다.
다른 팀에 있는 우리 애들 걱정이 슬며시 치고 올라와 목을 길게 빼고 살피자 키스 형이 갑자기 시야를 가렸다.
“형?”
“우리 팀 주장이잖아. 다른 팀은 왜.”
“아니, 그냥 우리 세빈이….”
그때, 파랑 팀에서 하겸 형에게 붙들려 시무룩한 얼굴을 했던 세빈이와 시선이 닿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반짝거리는 우리 예쁜 막내.
그런 막내를 바라보던 준이 형까지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세빈이를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리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듯 준이 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잘 챙기라는 말을 이해한 듯했다.
역시 준이 형은 믿음직스러워.
“어디 도망간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맞아. 우리가 잡아먹진 않잖아.”
키스 형과 인하 형의 중얼거림에 손을 내저으며 그거 아니라고 대충 무마시켰다.
나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니, 이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은데?
‘계약자 놈아, 적당히 해라.’
‘내가 뭘.’
포잉은 우진 형 머리 위에 앉아 내내 구경하다 이제야 내 곁으로 왔다.
느릿하게 살랑이는 꼬리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가 노랑 팀 쪽을 살폈다.
혼자 노랑 팀에 들어간 찬이가 걱정되었지만, 단우 형과 함께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영빈 형은 세비 형이 잘 챙겨주겠지….
멤버들의 상태를 한번 확인한 나는 그제야 팀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태인 씨는 춤이 특기라고 했죠?”
“편하게 말해주세요, 선배님.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태인은 서글서글한 타입이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게 강아지 같기도 했고, 목소리도 둥글둥글한 느낌이었다.
이온은 세빈이가, 태인은 준이 형이 생각나서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면 저랑 동갑이었죠? 말 놓을까요, 우리?”
“엇,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더 감사하죠.”
이온이 17살, 태인이 19살.
이온은 팀의 막내였고, 태인은 중간 나이.
이왕이면 지내는 동안은 편하게 대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을 꺼내자,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저, 저한테도 말 편하게 해주세요!”
한껏 용기를 낸 듯 늘 조그맣게 말하던 이온도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럴까요? 그럼 저희는 그렇게 하고 형들하고는 차차 정리하는 거로 해요.”
키스 형은 워낙 허들이 높은 사람이고, 인하 형도 생각보다 벽이 높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내 마음대로 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 정리하라고 슬쩍 미뤘다.
우리는 타이밍도, 운도 꽤 따라줘서 지금의 관계가 만들어졌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만들어야 하는 거니까.
일단, 그건 그거고 할 일은 미리 정리해두는 게 좋으니 일을 먼저 하기로 했다.
“온이랑 태인이가 춤이 특기라고 기억하는데, 맞아?”
“네. 기억해주셨네요.”
이온과 태인은 어딘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선배에게 인정받는다는 기분을 느껴서일까?
내가 만든 곡을 형들이 칭찬해줄 때가 떠올라 한결 더 유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럼. 그래도 우리가 같이한 시간이 있는데. 그럼 둘이 우리 댄스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구상해보는 건 어때?”
“저희가 해도 괜찮을까요?”
“태인아, 말 편히 하자며.”
“아, 맞다! 응, 그럴게.”
“좋아, 뭐든 경험이니까 선택하든 하지 않든 곡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로 만들어줘.”
대화하는 동안 이온도 태인도 부담을 느낄지언정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무리 낯을 가리고 순둥하게 굴었다고 해도 그들도 나름대로 연습생 기간을 거친 사람들이니까.
“난 춤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키스 형도 그 분야는 낯설 테니까. 인하 형도 그렇죠?”
“응. 난 잘 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두 형님은 내게 팀장을 떠넘긴 후로는 지켜보며 가끔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우리한테 최대한 분량을 몰아주려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착하기만 해서는, 에휴.
“자, 그럼 다시 만나는 날까지 각자 맡은 것들 잘 준비해옵시다. 알았죠?”
인하 형이 내 머리를 헝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형들이랑 같은 팀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는 내 등 뒤에서는 가영 형과 얀 형의 목소리가 쏟아졌고, 가끔 세비 형 특유의 독설이 들렸다.
그래, 분홍 팀이 이 사람들이라 다행이다.
적어도 여기는 전쟁 같은 토론이 아니라 대화로 조율이 가능하니까.
* * *
대충 팀원들끼리 논의가 끝나고 마이크도 모두 떼어낸 시간.
힘찬은 단우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만해?”
“넹. 재밌기도 하구요.”
“너도 많이 컸네.”
“이제 형보다 크죠?”
“아주 혼이 나 봐야 정신 차리지?”
“와, 이제 막 때리려고요?”
“야,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때린 줄 알겠다.”
격 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단우와 힘찬은 굉장히 친근해 보였다.
단우는 생각보다 자신과 죽이 잘 맞는 힘찬을 귀여워했고, 힘찬은 어딘지 모르게 지환과 비슷한 재질인 단우를 잘 따랐다.
단우는 예능에서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꾀가 많은 브레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톡톡 쏘는 말도 밉지 않게 하는 캐릭터는 흔하지 않은 편이라 힘찬은 그런 단우가 무척 신기했다.
날카로운 말을 매끄럽게 다듬어서 핵심만 콕 찌르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
무심히 흘리듯 하는 말들도 생각해보면 걱정이고 염려였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사람.
개인적으로도 자주 연락하는 터라 힘찬은 긴장하고 있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숨이 좀 트였다.
낯선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건 누구나 그렇듯 평소보다 배는 더 힘들다.
후배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힘찬은 옆에 단우만 남고서야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촬영장 구석이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았다.
아직 다른 팀은 팀원들끼리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멤버들도 걱정하지 않을 것.
“챙기느라 바빠죽겠지?”
“그러게요. 근데 당사자만 몰라요.”
“쟤가 그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이냐.”
“에효….”
앓는 소리를 내며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힘찬의 모습에 단우는 짧게 웃었다.
“애정이라는 게 그렇더라. 아예 모를 때면 모를까, 손에 쥐면 더 쥐고 싶어져.”
툭 던지는 한마디에 힘찬은 멈칫했다.
그런 힘찬을 바라보지 않은 체, 단우는 자신의 팀원들을 눈으로 더듬었다.
겉으로는 같은 팀 형들이 귀찮다는 듯 구는 단우지만, 그가 형들을 무척 아낀다는 걸 친한 이들은 안다.
십여 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인데 오죽할까.
하겸이 세비에게 무어라 말하자 얀이 벌떡 일어나 성질을 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장면에 단우의 시선이 멈춰 섰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힘찬은 종종 지환이 멤버들을 바라보며 저것과 비슷하게 웃고 있는 걸 안다.
이상하게 손발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라 간질간질했다.
“너희는 괜찮을 거야.”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디서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는 힘찬도 안다.
그래서 단우가 짧게 짧게 툭툭 던지는 문장들의 앞뒤를 자연스럽게 추측했다.
친구를 뺏길까 걱정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과 언래블은 앞으로도 잘 지낼 거라는 말을.
힘찬은 지환과 다툰 날, 우연히 연락해온 단우를 붙들고 하소연했었다.
단우는 두서없는 힘찬의 이야기를 끝까지 끊지 않고 들어주었고.
이미 맏형에게 털어놓았던 이야기지만, 그냥 그날은 자기도 모르게 투정하듯 쏟아냈다.
아마 마음이 아프고 버거워서, 무서워서 그랬던 건 아닐까?
묵묵히 이야기를 들은 단우는 가서 욕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서운해 죽겠다고 쌍욕이라도 해보라고.
자신들은 주먹질하고도 싸우니까 괜찮다면서.
날아갈 듯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그렇지 못한 이야기를 툭툭 건네주었다.
힘찬은 그날 이후 단우와 빠른 속도로 더 친해졌고, 지금은 DCL 멤버들만큼이나 단우가 좋다.
그 때문에 단우는 힘찬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형, 고마워요.”
“우리 사이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필요 없어.”
틱틱거리는 단우의 모습에 힘찬은 되려 크게 웃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오리진 멤버들이 쳐다볼 만큼.
인맥 관리라는 걸, 정보 수집이라는 걸 해보려고 다양한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힘찬이다.
그래서 단우가 더 고맙고 좋았다.
어떻게든 포장하려 애쓰지 않고, 인사치레라면 질색하는 그가.
힘찬은 지환이 언젠가 했던 이야기가 조금씩 이해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경험해야 나쁜 사람을 거를 수 있다는 그 말.
그때 힘찬은 ‘좋은 사람을 고르는 게 아니라?’라고 되물었었다.
그러자 지환은 부스스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은 내가 고른다고 골라지는 게 아닌 것 같다고.
그러니 내가 좋은 사람일 때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지 않겠냐며 힘찬의 등을 두드렸었다.
여태까지 도망치기만 했던 힘찬에게는 무섭고 무거운 말이었다.
물끄러미 멤버들을 바라보던 힘찬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멤버들은 힘찬이 보기엔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 가끔은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그래서 자신은 조금 못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멤버들을 지키려면 그래야 할 것 같았으니까.
“무슨 소리야, 요새 세상에서 착해빠져가지고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단우는 무슨 해괴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힘찬에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힘찬은 그런 단우의 모습을 보자마자 크게 웃었다.
“아, 진짜 형은 최곤 거 같아요.”
“그래, 난 늘 최고지.”
뻔뻔하게 웃는 것까지 정말 그답다고 생각했다.
역시 단우는 자신의 친구처럼 좋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