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73)화 (373/456)

373. 중독(Overdose)(1)

촬영이 시작되고 MC 역할을 맡은 아이돌 수미 선배님이 활달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퍼졌다.

“수미와 함께하는 파워 아이돌 게임! 오늘은 초대 손님이 어마어마합니다. 기대해 보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카메라를 향해 윙크하는 모습, 또박또박 이어지는 발음 등 혼자 카메라를 받는 것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런 게 바로 선배들이 말하던 연차가 쌓인 아이돌의 모습이겠지?

수미 선배님이 자연스럽게 큐 카드를 넘기며 진행을 이어가는 동안, 우리는 풀 메이크업 상태로 얌전히 서서 대기 중이었다.

어쨌든 원래 주인공은 새벽과 골든아워.

우리는 어른들의 사정과 형들의 푸시로 추가된 게스트니까 방긋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우리 애들도 이제는 제법 의젓해져서인지 아니면 후배 앞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얌전했다.

기특한 내 새끼들.

반면, 오리진은 카메라 밖이라 그런지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동안 출연한 프로그램을 몇 개 확인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긴장한 기색들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주입식 교육의 한계인 것 같았다.

잘게 손을 떠는 이온의 모습에 우리 찬이와 세빈이 처음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쯤에서 리더나 다른 멤버가 챙겨야 할 텐데 다들 각자 긴장을 어떻게 하지 못해 정면만 보고 있었다.

쯧.

제일 약해 보이고 작아서 그런 걸까?

유독 이온에게는 눈이 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우리 막내가 자꾸 겹쳐 보이니 모른 척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슬그머니 손을 뻗어, 쉴 새 없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떨림을 참는 이온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을 잡아주자마자, 마주 잡은 이온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처음에는 힘들지.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하기도 하고.

동그랗고 순해 보이는 눈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정면 봐요.”

“네….”

손을 꼭 잡은 상태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게 잡은 손 너머로 다 느껴졌다.

놀랐는지 행동이 워낙 커져서.

우리 애들이 힐끔 나를 보더니 준이 형은 웃고 말았고, 영빈 형과 경환 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대 둘은 불퉁한 얼굴이 되었고.

“표정.”

“칫.”

옆에 있던 준이 형이 주의 시키자 금방 표정 관리를 하는 막내들.

우리 애들이 못마땅해하는 걸 알아챈 이온은 조금 울상이 되었다.

“괜찮아요. 어지간한 건 선배들이 다 커버해주니까 우린 말만 조심하고 카메라만 잘 보면 돼요.”

“고맙습니다….”

선배들에게 밉보이면 여러모로 불편한 사회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이 어린 애도 아는 것 같았다.

그게 안쓰러워서 별거 아니라고.

그냥 우리 멤버들 신경 쓰지 말라고 잘 달래며 방송도 괜찮을 거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어느새 오리진 멤버들이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붙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보였다.

후배라는 건 제법 귀여운 거구나.

나랑 동갑인 사람도, 한 살 많은 사람도 있었지만, ‘후배’라는 단어 안에 묶이니 전부 어려 보였다.

수미 선배님의 오프닝 멘트가 끝나고 골든 아워 형들과 새벽 형들이 등장해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두 그룹의 형 자리 쟁탈전이 꽤 큰 화제가 됐었죠. 재밌기도 하고 생소한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MC의 은근한 질문에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한 두 그룹 리더들은 마이크를 들었다.

“솔직히 이 대결 자체가 좀 말이 안 되죠. 저희가 훨씬 먼저 언래블이랑 친했으니까요.”

“원래 정이라는 게 같이 있는 시간보다 서로 교감한 시간이 더 중요하죠. 물론 당사자들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만요.”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멘트에 나는 작게 탄식했다.

작가님, 저 유치한 대본 뭡니까….

심지어 우리한테 선택을 떠넘기는 것 같은 저런 멘트, 아주 위험하다고요.

고개를 살짝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낸 나는 이온의 손이 더는 떨리지 않는 걸 확인했다.

이제 괜찮나 싶어 손을 빼려고 힘을 풀었더니, 이온이 더 꽉 내 손을 잡았다.

“?”

“아,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아직 많이 떨려요?”

어느새 오리진 멤버들은 우리 쪽으로 많이 붙어있었다.

아무래도 선배들을 직접 선택하고 무대를 구성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라 많이 긴장한 듯 보였다.

누가 누굴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말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대형 기획사 출신이라고는 해도 아직 애들이다 보니 걱정이 되는 건 이해됐다.

그러니 그나마 1년 차이 나는 선배들에게 의지하고 싶겠지.

살짝 손을 놔주고 우리 형들이 내게 해줬던 것처럼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가 한 말 기억하죠?”

“네…. 선배님들이 잘 이끌어가 주실 테니 멘트와 카메라 잘 챙기면 된다고.”

조그맣지만 분명한 이온의 말소리에 오리진 멤버들도 우리 애들도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 몇몇 스태프들이 흥미롭다는 듯 우리를 관찰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맞아요. 작가님, PD님 그리고 모든 스태프분이 우리가 큰 실수하지 않는 이상, 이상해질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잘 짜놓는 게 프로그램이에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자 우리 애들은 흡족한 얼굴이 되었고, 오리진 멤버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 후배님들이 걱정되는 모양인데, 선배님이 잘 챙겨주는 거 어때?”

우리 애들을 향해 농을 섞어 말하자 피식거리던 멤버들이 움직였다.

오리진 멤버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든 우리 애들.

아이돌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인 우리 애들이 그들 사이에 서니까 더 형님 같아 보였다.

물론 겉으로만.

속은 아직도 말썽꾸러기들이지.

걱정하던 오리진 멤버들이 우리 애들에게 조금씩 속닥거리면서 분위기가 훨씬 살아났다.

세빈이도 이온에게 다가가 무언가 속닥거렸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선배가 되어 후배를 챙긴다는 이 마음을 다시 더듬어보았다.

새벽 형들이 그랬고 골든 아워 형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우 형이나 진성 형님도 끊임없이 내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셨다.

늘 좋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좋은 사람들이 너무 귀하다는 것도 안다.

받은 것들을 다시 베풀어줄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이 건강하고 좋은 선후배 관계를 만들어가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나는 이번 생에 좋은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을 배웠다.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한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나면서 괜히 쑥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자, 그럼 새로운 손님들을 불러볼까요? 이번 대결을 빛내줄 분들입니다.”

수미 선배님의 멘트에 다들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제 우리가 등장할 차례였다.

* * *

“안돼, 이건 거짓말이야….”

“돼.”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손안에 든 작은 종이 끈을 바라보는 가영 형.

그런 형을 향해 키스 형은 산뜻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두 형뿐만 아니라 색이 칠해진 종이를 쥔 사람들은 각자 서로를 바라보며 둘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오리진과 우리가 각각 두 팀으로 나눠 선배들을 뽑는 방식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소개가 끝난 후 잠시 촬영을 멈춘 PD님이 다가오면서 뽑기 방식을 바꿨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선택하는 것보다 랜덤이 더 재밌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급하게 준비한 작은 상자에 네 가지 색으로 칠한 종이를 넣어두었다고 하셨다.

그 색상을 뽑은 사람들끼리 한 팀을 이루면 된다고.

그 말을 들은 오리진 멤버들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이었다.

부담이 많이 줄어들어 편해진 모양이었다.

반면, 우리 막내들은 약간 실망한 듯한 눈빛이었다.

뭔가 재밌는 걸 궁리했는데 실패한 듯한?

아무래도 나 몰래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잠깐 끊어가는 틈에 우진 형에게 다가가 재롱을 떨어주고 돌아오는 찬이와 세빈이.

우리는 틈나는 대로 우진 형에게 다가가 안정을 되찾곤 했다.

늘 푸근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봐주는 우진 형.

형이 우리를 보고 웃으면 이상하게 안심되고 다 괜찮을 것 같았다.

늘 우리를 위해 고생하고 화내고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주는 사람.

긴 대기시간 내내 힘들거나 지치지 않도록 우리도 틈나는 대로 형에게 치댔다.

우리 잘하고 있다고.

형 덕분에 우리 힘내고 있으니까 응원해달라고.

말로 하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듬뿍 담아 늘 형에게 다가갔고, 우진 형도 다 안다는 듯 한 명 한 명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우진 형을 충전하고 더 기운차진 막내들.

막내들은 서로 손에 쥔 종이 끈이 다른 색인 걸 보며 안심했다.

“화나, 넌 무슨 색이야?”

“저 분홍색이요.”

“나랑 같은 팀!”

희비가 갈리는 기묘한 현장을 바라보며 ‘허허’하고 웃던 나는 찬이 물음에 답했다.

그러자 경환 형이 손에 쥔 분홍색 종이 끈을 들고 외쳤다.

저번에 세빈이가 분홍색 티를 권한 후로 우리 곰돌이 형아는 분홍색에 심취한 것 같았다.

“자자, 이제 색별로 모입시다!”

“파랑 팀 모여라!”

“분홍 팀 여기로 오세요!”

“노랑 팀은 제 옆으로 모이세요.”

“초록 팀은 모여봐.”

처음 소개 장면과 짧은 토크를 찍은 후에는 우리만 나오는 촬영이었다.

상황을 정리하는 듯한 하겸 형의 말에 따라 색별로 한 명씩 손을 들어 외쳤다.

새벽이 셋, 골든아워가 넷, 우리가 여섯이고 오리진이 8명.

팀당 다섯 명이 기본이었고, 한 팀만 6명이 되었다.

그렇게 나뉘고 보니 랜덤인데도 생각보다 밸런스에 맞게 잘 나뉘었다.

“이거 누가 짜기도 힘들게 이렇게 됐네.”

“그러게. 밸런스는 나쁘지 않아.”

하겸 형과 가영 형이 나뉜 인원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였다.

파랑 팀은 하겸, 하준, 세빈, 요한 다엘.

분홍 팀은 키스, 인하, 나, 경환, 이온, 태인.

노랑 팀은 단우, 힘찬, 유원, 다솔, 엘린.

초록 팀은 가영, 세비, 얀, 영빈, 호안.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는 오리진 멤버들의 정보를 되살려보려 애쓰며 우리 팀원들을 바라봤다.

가영 형이랑 하겸 형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부터 각 팀 주장을 뽑고 어떤 곡으로 공연할지 정하는 겁니다!”

서로 스케줄을 맞추기 힘든 탓에 오늘 모든 촬영을 끝내는 건 무리.

그래서 이후 몇 번의 촬영을 더 거쳐야 했다.

팀별로 조각난 인원들끼리 각자 역할을 해내는 장면을 찍기도 하고, 또 마지막 무대 장면도 찍을 테니까.

오늘은 주장을 뽑고 공연 곡을 정하고 포지션을 나누는 것까지 촬영이기에 한시름 놓였다.

당장 회사로 돌아가서는 다시 ‘낭만가객’ 출연 곡 편집본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어째서인지 내 주변으로 분홍 팀이 모여들었다.

나랑 경환 형이 같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온 건가?

“역시 하늘은 내 편이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

인하 형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오리진의 이온과 태인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때, 경환 형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다가 슬그머니 날 바라보며 ‘이거 아냐?’ 하는 시선을 보냈고.

하지만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던 상황이라 형과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인하 형과 키스 형에게 돌아갔다.

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쉰 키스 형.

“이놈의 병아리들은 언제 크냐.”

“아, 형. 후배님들도 있는데 병아리가 뭐예요.”

“우리가 병아리면 후배님들은 뭡니까!”

우리의 반항에 코웃음 치던 키스 형은 한마디 툭 던졌다.

“저쪽은 메추라기 하면 되겠네.”

“왜 다 조류 못 만들어서 안달이에요….”

우리 투덜거림을 킬킬거리며 듣고 있던 인하 형이 한마디 덧붙였다.

“저쪽은 조류보단 펭귄 같지. 맨날 자기들끼리 모여있으니까.”

“후배들한테 그렇게 눈치 주는 거 아니에요.”

“와, 생사람 잡네. 내가 언제 눈치 줬어! 귀엽다고, 펭귄처럼!”

인하 형이 펄쩍 뛰며 반박했지만, 못 들은 척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는 두 어린 양을 바라봤다.

“이런 형님들이랑 같은 팀이라 불안하겠지만, 실력은 확실하니까 이해해요.”

“우리 환이가 형을 그런 취급 하다니.”

“그런 취급 안 받게 좀!”

인하 형과 투닥거리는 나를 보며 긴장이 좀 풀린 건지, 오리진 멤버들도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자, 그쯤하고 주장 뽑아야지. 누가 할래?”

“전 키스 형이 하면 잘할 것 같은데요. 정리 정돈 잘하잖아요, 형.”

상황을 정리한 키스 형의 말에 냉큼 답했다.

키스 형은 그래도 믿음직스러우니까.

하지만, 그때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왜요? 왜 다 그렇게 봐요?”

“왜겠어.”

낮게 웃던 키스 형의 대꾸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내가 몇 번 느껴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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