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63)화 (363/456)

363. 꿈꾸는 마음으로(2)

콘서트 양일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한동안 허무함에 허우적거렸다.

그 열렬한 환호와 온전히 우리에게 집중된 시선, 녹을 것처럼 뜨거웠던 온도.

모든 것들이 진득하게 남아 현실로 돌아오기가 무척 힘들었다.

연습에 몰두하고, 곡 작업에 집중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현실로 돌아올 수 없었다.

자꾸만 무대 위의 모든 것들이 떠올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얘들아, 이번 한 번만 하고 끝낼 거야?”

그런 우리를 보다 못한 팀장님이 한 소리 할 때쯤 돼서야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콘서트에 관해서는 멤버들끼리조차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입을 벌려 무언가 말을 하면 내 안에서 그날의 느낌이 빠져나가 버릴 것 같아서.

혹은 그게 단순히 꿈이었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팀장님의 질책에 겨우 정신을 차린 우리는 그날 저녁, 며칠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어 콘서트를 되새겼다.

종이비행기를 만지작거리고, 인증사진까지 남겼던 슬로건을 매만지고.

차마 때 탈까 봐 마음껏 만지지도 못 했던 것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우리 대화는 두런두런 작은 소리로 이루어졌지만, 콘서트 이전보다 더 끈끈한 무언가가 남겼다.

우리가 다 같이 해냈다는 진한 만족감.

그리고 그만큼 거대한 아쉬움.

“다음에는 더 잘하자.”

“응. 꼭.”

그 말이 전부였고, 우리 중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 우리는 다음번엔 더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낼 테니까.

홀린 듯했던 며칠이 지나, 우린 또 다시 새로운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낭만가객’의 출연 날짜가 정해진 것.

워낙 쟁쟁한 분들이 많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지금은 마냥 무섭진 않았다.

콘서트 직후 우리가 조금은 더 실력이 늘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기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 때문일까.

승부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자 살자 경쟁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준이 형과 승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사이’ 때를 잊지 말자고.

비록 우승하지 못했지만, 호평받는 무대를 만들었던 것 자체만으로도 기뻤던 그때.

1위 몇 번 했다고 방만해지지 말라는 준이 형 나름의 경고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가 이어지다 결국 찬이와 경환 형의 공격에 준이 형은 항복을 외쳐야 했다.

“우리도 이제 좀 알거든!”

“형은 너무 걱정이 많아. 가끔은 우리를 믿어도 되잖아.”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놔, 얘들아….”

어찌 되었든 승패가 갈리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동생들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는 건 다들 알았다.

하지만 너무 어리게만 보지 말라는 막내 라인의 반격은 제법 거세기도 했다.

준이 형이 경환 형 밑에 깔려 허우적거리는 건 솔직히 조금… 음.

벌건 얼굴로 놓으라고 버둥거리는 형의 모습이 무척, 하찮… 아니 불쌍했다.

하지만 막내 라인이 말도 틀리지 않기 때문에 영빈 형과 한 발 떨어져 관망했었다.

형, 미안해….

늘 그렇듯 저 상황에 얽히면 결국 체력이 제일 약한 쪽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막내 라인은 우리 중 가장 체력이 좋은 사람들이고.

후줄근해진 모습으로 벽에 기댄 하준 형의 모습이 재차 떠올랐지만,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출연 일자를 듣고 프로그램의 이전 영상을 점검하며 준비하던 그때, 팀장님이 나와 경환 형을 불렀다.

우리 둘이요?

조금 낯선 조합이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회의실에 들어가자, 팀장님은 또 그 미소를 지었다.

“인당수….”

“응?”

나도 모르게 공양미 삼백 석을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팀장님이 되물어왔다.

“아, 아니에요.”

“싱겁긴.”

늘 도망가고 싶은 프로그램에 나를 꽂을 때마다 저렇게 웃고 계셨는걸!

피식 웃고 만 팀장님은 경환 형과 내 쪽으로 종이 하나를 밀어주셨다.

“‘잘 먹겠습니다’…?”

“이번에 너희 둘 지명해서 섭외 들어온 거야. 진성 씨가 널 추천했다더라.”

“이거 그거 아니에요? 시골에 감금돼서 밥하는?”

주어진 것들로 일정 기간 밥해서 먹고살기도 하고 농사도 짓고 낚시도 하는 그런 프로그램.

한동안 진성 형님이 연락이 잘 안 된다 싶더니 이 프로에 납치된 모양이었다.

“여태까지 너희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이 대부분 힐링물이잖아? 가서 자리만 지키던 프로그램 말고.”

“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이 프로그램은 힐링 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있지만, 출연진은 꽤 힘든 프로그램이다.

자급자족이라는 모토 아래 인터넷 배송이 불가능한 시간을 살아야 하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어디든 주문하면 하루, 이틀 만에 오는 시대에 다 알아서 해야 하다니.

울상이 된 내 얼굴을 알아차린 팀장님은 정말로 악당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진성 씨가 네가 꼭 와서 같이 자연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적극 추천했다더라. PD도 환영하고 있고.”

거기까지 들은 경환 형이 불길함을 감지하고는 중얼거렸다.

“이거 설마.”

“응. 힐링 캠프랑 같은 하규원 PD야. 새 시즌 시작하면서 넘겨받았다고 하더라.”

평소에 믿지도 않았던 신을 찾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신은 없어도 요정은 내 옆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포잉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우리를 어떻게든 갈아버리겠다고 작정한 인간이었는데 거기에 또 가야 한다니.

슬며시 눈을 굴려 경환 형 얼굴을 보니, 형도 앞날이 캄캄했는지 급격히 피곤해 보였다.

울적한 얼굴로 프로그램의 포맷과 설정에 대해 깨작거리고 있자니 머리 위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하기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아. 어차피 게스트 출연이라.”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좋은 선택지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아직 우리는 멜트처럼 공고하게 우리 자리를 만들진 못했다.

차근차근 발밑을 다지고 있으니 평이 좋은 프로그램은 찾아가는 게 맞기도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리다니, 내가 배가 불렀나 보다.

전의를 다잡고 결국 팀장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할게요.”

“경환이 너는?”

“…어떻게 환이 혼자 보내겠어요. 저도 갈게요.”

역시 우리 애는 날 버리지 않았다.

나는 형을 몇 번 멀리한 적이 있는데.

끈끈한 전우애에 감격한 눈으로 경환 형을 바라보자, 형이 피식 웃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뭐, 어차피 저는 가도 단순노동이나 하다 올 거 같으니까요.”

아무래도 난 또 밥하러 팔려 가는 거겠지….

그렇게 출연 의사를 밝히자 예상보다 빠르게 출연 일자가 정해졌고, 멤버들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와 형을 바라봤다.

‘낭만가객’의 출연 시기와 겹치면 곤란했기 때문에 회사는 최대한 출연 일자를 앞당기길 원했다.

그리고….

형과 나는 깊은 밤 우진 형에게 이끌려 차에 태워졌고, 눈뜨니 낯선 풍경이었다.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돼요.”

“네….”

나는 멀미하면 잠들어버리는 편이라 크게 힘들진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경환 형도 멀미가 심하지 않은 것 같았고.

그래도 몇 번 배를 탔다고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납치되듯 끌려와서는 배에 태워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울적한 얼굴을 한 우리가 재밌는지 우리를 기다리던 PD님이 말을 걸었다.

“어때요? 진성 씨한테 이야기 들은 거 있어요?”

“아뇨…. 형이 양손 무겁게 와서 밥하고 가라고 했어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PD님과 카메라맨 모두 낄낄대며 웃느라 바빴다.

“거기 가면 진짜 먹을 거 없어요?”

“왜 없겠어요. 간단하게 채소도 기르고 있고, 앞에는 전복도 있고.”

“진짜 전복이 있어요?”

경환 형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전복, 그거 되게 비싼 거 아닌가?

“그럼요. 저희가 설마 출연자들 쫄쫄 굶으라고 대책 없이 불렀을까 봐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 우리는 왜 그 무인도에 던져놨냐고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지금 가는 섬은 ‘대장구도’라는 섬인데 어르신께 양해 구하고 저희가 다 살만하게 만들어놨어요.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요.”

“…네에.”

“허, 우리 같이 무인도에서 굴렀던 전우애가 있는데 이렇게 믿음을 못 줬어요?”

아무래도 내가 아는 전우애와 PD님이 아는 전우애는 다른 용어였던 듯했다.

내가 생각하는 전우애는 동지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게 아니었는데….

단순히 조리해 먹는 종류는 전혀 들고 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스박스에 고기를 꽉꽉 채웠다.

고기는 그냥 굽기만 해도 맛있으니까!

섬에는 진성 형님 외에 두 분이 더 계신다고 했다.

그중에 한 분이….

“우리 지환이 왔네! 경환이도 왔구나!”

환한 얼굴에 꽃무늬 냉장고 바지를 입고 뛰어오는 오수 형님.

저 환한 얼굴이 지옥에 들어온 동지를 반기는 얼굴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승탈출’ 때 함께 굴렀던 인연 덕분에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잘 왔다, 잘 왔어!”

“형님, 오랜만에 봬요. 근데 괜찮으신 거예요?”

“응, 괜찮아. 뭐, 여기도 나름 먹고살 만해.”

환하게 웃으며 답하는 오수 형님의 모습에서 그게 정말 좋아서 짓는 웃음이 아닌, 자포자기한 미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아무래도 공양미 삼백 석에 팔린 게 맞는 것 같았다.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음.’

‘응. 여기는 뭐 별일 없을 거야.’

포잉은 배에서 훌쩍 뛰어내리자마자 섬을 둘러보겠다고 먼저 나섰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안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사실 그만큼 든든했다.

오수 형님과 함께 터덜터덜 걸어가다 보니 파란 지붕의 집이 보였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오, 근데 풍경은 진짜 예쁘네요.”

“그렇지? 저 앞에 섬 하나 더 있는 건 ‘소장구도’라고 하더라. 우릴 저기 버리려다 여기에 데려왔대.”

“…어느 게 더 최선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조금 더 넓은 섬이라 다행이라고 해야겠네요.”

더 극한의 상황으로 던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기는 경환 형의 목소리가 슬퍼 보였다.

잘 다듬어진 집 안에는 작은 마당과 평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당에는 늘 ‘선배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던 진성 형님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큼직한 손에 들린 마늘이 그렇게 작고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왔냐?”

“왔어요. 양손 무겁게.”

“역시 믿을 건 너밖에 없네.”

쓸데없이 근사하게 웃는 진성 형님에게 투덜거리며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이거 다 까면 되는 거예요?”

“옷부터 편한 거로 갈아입고 와. 할 일 많아.”

“와, 오자마자 일 많다고 하는 거 봐.”

“일부러 저희 편한 옷 입고 왔어요.”

아무래도 도착하자마자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경환 형과 나는 배 타기 전 옷을 갈아입었다.

앙퀴라에서 제공해준 트레이닝복이었다.

광고가 한참 잘나가던 중이라 제작진과의 교섭도 한결 쉬웠다는 소현 팀장님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두 명이니까 육백 석인가….”

“응?”

“아니에요….”

경환 형은 어느새 짐을 방에 던져넣고 내가 미리 일러두었던 대로 식자재를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다행히 태양열 전지판이 설치되어 있어 냉장고가 사용 가능하다고 했다.

“경환이가 힘이 좋았지?”

“네, 형님. 힘쓰는 건 뭐든 시켜주세요.”

오수 형님은 어느새 경환 형을 누렁소 보듯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든든한 얼굴로 웃는 우리 형.

“홍삼파워 재결성이네요?”

“PD님…. 홍삼은 이제 잊어주세요….”

방긋 웃는 PD님에게 애처롭게 말했지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근데 마늘은 왜 까고 있었던 거예요?”

“경우 형님이 뭘 하든 마늘은 필요할 테니까 좀 까두라고 하셨어.”

“여태까지 경우 선배님이 밥하셨어요?”

“응.”

어쨌든 왔으니 잘해야 했다.

그래도 한 분 빼면 모두 아는 분들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오, 드디어 왔구나! 밥할 줄 아는 동생!”

묵직한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장작을 정리하던 경환 형도, 마늘을 까던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본 그쪽에는 훤칠한 미남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성 형, 저를 그렇게 소개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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