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 꿈꾸는 마음으로(1)
“솜뭉치! 재밌었어요?”
- 네!!
- 와아아!!
“진짜로? 다 즐긴 거 맞아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죠?”
우리가 데뷔 앨범부터 지난 일 년간 이야기했던 모든 내용을 담아 만들고 싶었다.
모두가 똑같이 두렵고, 걱정되지만, 함께면 이겨낼 수 있다고.
무겁기만 한 무대가 될까 봐 걱정했지만, 나름대로 멋있게 풀려고 노력한 덕분에 솜뭉치들도 행복해 보였다.
반짝거리는 무수한 눈동자가 우리에게 집중해 있었고, 손에 든 응원봉이 눈동자만큼 반짝거렸다.
군데군데 건전지가 다 닳은 건지 빛이 희미해진 응원봉도 보여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발광력이 좋아지려면 어쩔 수 없이 전력을 많이 먹는다.
그래서 늘 여분 건전지를 챙겨 다니던 일이 떠올랐던 것.
몇 번이나 메이크업을 손봤지만, 무대를 한번 하고 나면 후드득 쏟아지는 땀방울에 씻겨 내렸다.
우리끼리 처음 약속했던 것처럼 그동안의 노력을 다 쏟아부었다.
이렇게 보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번 콘서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우리가 공고해질 때 다음 콘서트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보다 더 간절할 수가 없었다.
콘서트는 무대 아래에서의 즐거움만 알던 내가 이제는 이 무대 위의 행복도 알게 되었는걸.
거의 맨얼굴이 되어버린 찬이는 그저 마냥 좋은지 사방의 솜뭉치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찬이뿐만 아니라 멤버들 모두가 한껏 들뜬 얼굴로 사방의 솜뭉치들과 인사하기 바빴다.
사실 나도 그렇고.
“혁명이 성공했으니 이제는 축제가 뒤따라야겠죠?”
“다 같이 따라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1부는 우리가 여기 있으니 지지 않겠다는 혁명이었다면, 2부는 그 후의 신나는 축제였다.
이번에 셋 리스트를 작성할 때, 우리는 우리 앨범의 문제를 다시 한번 느꼈다.
앨범의 분위기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그것 때문에 편곡하느라 죽을뻔했던 주영 팀장님과 에단이 중얼거렸다.
다음 앨범은 무조건 청량한 거 하자고.
실제 회의에서는 또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일단은.
1부에서 사용하지 못했던 졸업식, 준이 형의 ‘어쩌면’을 끝내고 ‘마지막 이야기’ 무대를 준비하던 때였다.
공식 팬 송인 만큼 더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 하고 싶다는 세빈이 의견이 있었다.
파스텔 색상의 셔츠에 연한 색상의 청바지로 의상이 정해진 것도 그로 인한 결정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암전된 무대 위에 오른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마음을 가득 담아 부르리라 다짐했다.
본 무대와 돌출 무대를 오가며 뛰어다니던 그때.
영빈 형이 하이라이트를 터트려야 할 타이밍에서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반주가 멈췄다.
뭐지?
당황한 멤버들은 버릇처럼 나와 준이 형을 바라봤고, 그 순간 다시 불이 켜지고 사방에서 종이비행기가 날아들었다.
“여러분, 이게 뭐예요?”
“아, 진짜! 엄청나게 놀랐잖아요!”
심장을 쓸어내리는 찬이와 눈이 휘둥그레지 세빈이.
무대 위로 날아든 수많은 종이비행기.
아니, 왜 이걸 잊고 있었지?
콘서트 때마다 여러 방식으로 언래블에게 이벤트를 해주던 걸 무대에 몰두한다고 잊고 있었다.
“이거 가리느라 그렇게 열심히 움직였구나.”
경환 형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발치에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주웠다.
그제야 끊어졌던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지만, 영빈 형은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다.
울컥 치밀어오른 감정을 삼키느라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것.
그 모습에 나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지만,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The truth is I‘m in a little bit of a funk
그리고 이젠 비밀이 아냐
너에게 고백할 거니까]
찬이가 슬쩍 영빈 형 옆에 가서 토닥이며 종이비행기를 하나 더 쥐여주었다.
[여섯 송이 새하얀 백합을 들고
부는 바람에 살랑이는 네 뒷모습을 보고 있어]
하준 형이 다음 파트를 받아줬고, 영빈 형이 겨우 다시 마이크를 쥐던 그때.
- Can you please stay with me?
솜뭉치들은 역시 똑똑했다.
한방으로 끝내지 않고 확인 사살까지 하다니.
다음 파트를 부르며 펼친 종이 슬로건.
‘우리 이야기는 끝나지 않아.’
짙푸른 색의 종이 위에 적힌 팬들의 대답에 결국 나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영빈 형은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고, 세빈이는 품 안 가득 종이비행기를 안고 멍한 얼굴로 객석을 바라봤다.
준이 형과 찬이가 불러야 할 파트였지만 둘의 목소리도 멀쩡하지 않았다.
곁에 다가온 경환 형이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나도 주저앉을 뻔했다.
그만큼 사방을 가득 채운 솜뭉치들의 푸른 물결과 또렷하게 들려오는 노래는 가볍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경험을 하고 무대를 떠날 수 있을까?
“형들이 너무 놀란 것 같아요. 아휴, 진짜.”
“울보래요~.”
막내들은 금방 평소의 텐션으로 돌아와 나와 영빈 형을 놀리느라 바빴다.
겨우 눈물을 수습하고 노래를 이어갔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옆에서 놀리고 있는 찬이를 응징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한바탕 소란스럽던 무대 위를 잘 수습한 우리는 그 뒤로 날아다녔다.
쏟아낸 땀보다 더 큰 사랑을 쏟아부어 주는데 지친 모습을 보일 수 없었으니까.
종이비행기 안에 적힌 이야기를 읽고 답하기도 하고, 더 기운차진 찬이가 세빈이를 끌고 볼을 콕 찍기도 하고.
현장 스태프분들이 종이비행기를 챙겨가는 모습에 영빈 형이 한껏 아쉬운 표정을 했다.
경환 형도 꿀단지 뺏긴 곰처럼 하염없이 그쪽만 바라봐서 준이 형이 한마디 할 정도로.
“숙소 가서 보면 되잖아! 뺏는 거 아니라니까!”
촬영금지지만 난 오늘 일이 사진으로 돌 걸 확신했다.
하, 눈물 사진이 또 돌다니.
적어도 홍삼 짤처럼 액자로 주진 않을 테니 다행이라고 애써 마음을 달랬다.
2부에 앵콜까지 신나게 뛰어다닌 우리는 헤어지기 싫어하는 막내들과 솜뭉치들을 잘 달래며 내일을 기약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온 우리는 현장 스태프들과 댄스팀에게 빠짐없이 인사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 같은 무대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게 되었다.
머릿속 상상을 현실로 이끌고 와주는 멋진 분들.
그동안 같이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낸 댄스팀은 두말할 것 없었다.
제영 쌤이 기른 제자분들이라는 데 춤에 대한 열정이 무서울 정도였다.
찬이랑 세빈이는 그분들에게 반한 눈치였고.
“우리 병아리들! 고생했다!”
“잘했어, 멋있더라.”
대기실로 겨우 돌아온 우리는 대충 땀을 닦아내고 의상을 벗어 던졌다.
피자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경환 형을 위해서인지 대기실에는 피자가 놓여있었고.
와구와구 입에 피자를 집어넣던 막내 라인은 팀장님과 우진 형 등장에 멈칫했지만, 금방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아, 이거 몰래 먹는 거 아니지!’
하는 표정이 너무 선명해서 준이 형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희 잘했어요?”
“그럼. 역시 내 새끼들이야.”
“우오아왕!”
“뭐야, 그 이상한 소리는.”
칭찬받고 한껏 어깨가 들썩거리던 찬이는 이상한 소리를 질렀고, 막내에게 경멸 어린 눈빛을 받아야 했다.
우리 착한 막내가 이럴 리 없는데…?
“일단 대충 허기만 채우고 이동하자.”
“넵.”
미리 듣기도 했고, 경험으로도 알고 있었다.
우리 퇴근길을 보기 위한 팬분들이 또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었으니까.
“숙소로 갈 거지?”
“아뇨. 회사 가서 한 번만 다시 맞춰보고 갈게요.”
“힘들지 않아?”
팀장님의 물음에 준이 형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무대에서 큰 실수는 없었지만, 자잘한 실수는 있었다.
이 무대를 뛰어다니는 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후반에는 체력이 가장 약한 나와 영빈 형이 이동하다 동선이 겹치기도 했고.
“힘든데 내일도 실수할 수는 없잖아요.”
“맞아. 실수하면 창피하니까 안 돼요.”
“한 번만 맞춰보고 숙소 갈게요.”
입에 먹을 걸 넣더니 살아난 멤버들.
조금 전까지 해변에 떠밀려온 해파리 같던 애들이었는데.
쫑파티는 내일이니 오늘은 연습하고 가고 싶다는 말에 팀장님도 결국 허락해주셨다.
기특하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팀장님과 우진 형의 시선이 괜히 간지러웠다.
“회사 가는 길에 GIVE 앱 잊지 말고.”
“네!”
남은 피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경환 형을 질질 끌고 나온 우리.
퇴근길에서 팬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잔뜩 충천해서는 한결 업된 기분으로 GIVE 앱 라이브를 진행했다.
“우리도 헤어지기 싫었어요, 진짜로.”
“더 오래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새 요망함까지 배운 찬이는 솜뭉치들을 상대로 잔망을 떨고 있었다.
대사는 물론 진심이겠지만, 안타깝다는 듯 저러는 건 솔직히 보기 힘들었다.
평소에는 까불고 장난치느라 바쁜, 그래서 혼나기 바쁜 친구의 애처로운 얼굴이라니.
아, 이게 바로 극한 직업이구나.
멀쩡한 정신으로 내가 저 꼴을 봐야 하다니…!
다시 한번 현실의 벽을 느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빈 형과 내게 자꾸 왜 울었냐고 묻는 말이 올라왔지만 꿋꿋하게 버텼다.
안 울었다고, 눈에 뭐가 들어간 거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지만 내 입으로 울었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메시지 창을 가득 채운 메시지를 읽고 답하며 아직 남은 콘서트 여운을 즐겼다.
그리고 도착한 회사 연습실.
방금까지 들떴던 건 어디 가고 멤버들 모두 진지한 얼굴이 됐다.
“처음이라고 해도 우리 너무 잔 실수가 많았어. 그렇지?”
“응. 생각보다 더 못한 거 같아.”
방금까지는 행복한 꿈속이었다면, 지금은 현실.
첫 무대이니만큼 더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경험 부족이 이렇게 뼈아프게 다가올 줄은….
“노래를 우리가 끌고 가야 하는데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맞아. 신나는 건 알겠는데 자기 박자 놓치지 말자.”
연습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우리는 오늘 실수를 되짚어보고 보완책을 상의했다.
팬들이 눈치채고도 넘어가 줬다고 해도 또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분명 처음에 돈 아깝지 않은 공연을 보여주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도 이렇게 아쉬운 부분이 자꾸 나왔다.
“여기가 좀 어려운 거 같아요. 제가 경환 형이랑 하준 형 사이로 빠져야 하잖아요. 간격 조금만 더 넓혀주면 안 돼요?”
“일단 기억할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빼야 하는 안무였다.
연습했던 것보다 무대에서 움직일 때 간격이 좁았던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건 박자를 맞추기 힘들었으니 형들 사이로 빠지는 게 그림 상으로도 가장 그럴듯했다.
그렇게 몇 가지 부분을 상의하면서 위치를 점검하고 안무를 맞춰보고 있는 우리에게 우진 형이 찾아왔다.
“얘들아, 이제 진짜 쉬어야 해.”
“넹!”
“네! 이제 저희도 다 맞춰봤어요.”
우진 형은 숙소로 우리를 옮겨주는 내내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컨디션 관리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했다.
열정 넘치는 우리가 자랑스럽고 좋은 건 별개로 그러다 몸을 망치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기에 우리 모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건 우리도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고.
씻고 방으로 들어가도 될 텐데 이놈의 인간들은 또 거실에 하나둘 자리 잡고 누웠다.
“나 속이 허한 거 같아….”
거실에 꿀이라도 발라둔 건가?
연습실에서 먹은 저녁은 이미 소화된 지 오래라며, 찬이는 인형을 품에 껴안고 꼼지락댔다.
“지금 먹으면 붓잖아. 안돼.”
“난 언제쯤 붓기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거지….”
“포기해. 넌 체질이잖아.”
침울해진 찬이 머리를 영빈 형이 쓰다듬어주었다.
위로인 건지 놀리는 건지.
아무래도 아까 영빈 형 운다고 놀렸던 걸 복수하는 것 같은데?
일찍 자서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각자 방이 아닌 거실에 다시 나란히 누운 우리.
나도, 멤버들도 오늘 콘서트와 내일 막콘을 떠올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두근거리는 만큼 내일이 기대되는, 복잡하고 행복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