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하늘을 넘어(5)
새까만 어둠 속에서 깜박하고 빛이 반짝였다.
빛이 반짝인 곳은 스크린.
밤하늘을 바라보면 반짝이던 그 별들처럼, 스크린이 반짝거리다 천천히 화면이 떠올랐다.
반짝이던 불빛들은 그대로 하늘의 별이 되었고, 그 아래 새까만 하늘과 바다 사이에 외롭게 등대가 서 있었다.
제멋대로 자란 덤불이 등대 주변에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었고, 페인트칠이 벗겨져 녹슨 자리가 듬성듬성 보였다.
점점 등대 가까이 다가간 카메라에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는 멤버들이 있었다.
하준과 영빈은 동생들이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경환과 힘찬은 옆에 있는 들풀을 뜯어 서로에게 던지기도 하며 투덕거리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지환이 바닥에 주저앉아 세빈에게 바다를 가리키며 무어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에게 기대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자연이 그려낸 한 폭의 명화에 녹아들어 행복하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별처럼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망망대해를 밝히는 등대처럼 서로에게 흔들리지 않는 빛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하지만 이어진 장면은 그들이 순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무너진 잔해가 널려있는 배경에서 멤버들은 서로의 입을 막으며 잔해 사이, 작은 틈에 숨어 있었다.
그 잔해 밖에는 하얀 로브를 입은 이들이 다른 이들을 부리고 있었다.
그들의 지시를 받은 회색 옷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밧줄로 묶어 끌고 갔고.
다시 바뀐 장면은 어둡고 먼지 가득할 것 같은 낡은 창고.
희미한 촛불에 의지한 멤버들은 힘찬이 내민 낡은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의 글자를 지환의 길고 마른 손으로 더듬는다.
서로를 바라보던 멤버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낡은 종이에 적힌 글자는
[더는 빼앗기지 않겠다.
그들에게 나를 빼앗기지 않겠다.
나는 내 발로 당당히 서리라.
함께 하고자 하는 이는 모여라.
우리는 우리 발로 서겠다.]
그제야 솜뭉치들은 콘서트장 여기저기 붙어있던 종이들을 떠올렸다.
낡은 듯 처리되어있던 종이에는 방금 보인 종이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지명수배지처럼 보이는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 안에 있던 언래블 멤버들의 사진.
VCR은 조금 전, 무대만으로는 다 알 수 없었던, 이번 콘서트의 콘셉트와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윽고 화면에는 커다란 앨범이 떠올랐다.
앨범을 채운 빼곡한 사진들.
그 사진 안에는 훈련복을 입은 언래블 멤버들과 다른 이들의 모습이 있었다.
훈련을 끝내고 정식 제복을 받은 사진.
콘서트 사진과 달리 달리 조악하고 얼기설기 만들어진 제복.
이후 보이는 사진에서는 멤버들이 속한 저항군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빈이 같이 훈련받던 이의 시신을 붙들고 오열하는 사진도 있었고, 구출한 이를 부축하는 사진도 있었다.
저항군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체계가 잡혀가는 듯했다.
조악했던 제복이 더 튼튼해졌고, 점차 지금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상황을 알리는 사진이 점차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마지막 사진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피가 묻은 붕대를 감은 제복 차림의 언래블.
그들의 어깨와 가슴에는 그동안 이겨낸 시련을 증명하듯 견장과 훈장이 달려있었다.
정면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언래블의 모습에 객석 여기저기에서 비명 같은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바쁘게 의상을 갈아입던 언래블의 귀에도 들렸다.
커다란 함성에 움찔하던 멤버들은 오프닝 때보다는 금방 자신을 다잡았다.
저 함성에 호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더 크게 소리 지를 수 있도록 무대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신명 나게 놀아주면 된다.
언래블을 단장시켜주던 서포트 팀의 손이 더 빨라졌고, 새로운 의상으로 갈아입은 언래블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심장을 토할 것 같던 긴장이 가신 뒤에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짜릿함이 남았다.
* * *
VCR 이후 이어진 곡은 전부 이번 콘서트를 위해 편집된 곡들이었다.
그 때문에 A&R팀 분들뿐만 아니라 준이 형과 경환 형, 나까지 불려가서 먼지처럼 곱게 갈려야 했고.
틈틈이 VCR과 콘서트에 사용될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세트장을 야무지게 써먹는 감독님의 열정에 우리까지 불타올랐고, 남은 건 늘 물기 한 톨 남지 않은 오징어들.
늘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우리 애들이 그렇게까지 안쓰럽고 못생겨 보일 수가 없었다.
오늘 콘서트에서 땀 한 방울까지 다 털어내자고 약속한 만큼 나도 멤버들도 체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죽을 것 같아도 자고 일어나면 또 내일 무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며.
그런 우리를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던 팀장님은 조용히 우진 형에게 무언가 지시했다.
언 듯 보인 입술이 ‘홍삼’이라고 말한 것 같았지만 더는 지켜보지 않았다.
아니, 볼 정신도 없었다.
좌우 진영의 대립처럼 점점 무대는 더 격렬해졌다.
개인 무대도 전체 콘서트 콘셉트를 해치지 않는 무대로 꾸며졌다.
나와 찬이가 듀엣 무대를 꾸밀 거라는 말이 새로운 자극이 된 건지, 하준 형과 경환 형도 같이 무대를 꾸몄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신곡으로 돌격대 같은 무대를 만들어버렸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단둘이 무대에 올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어울리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기 몸을 불살라 태우는 듯 강렬하고 거친 목소리를 내는 경환 형.
그 사이 사이를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비아냥대듯 랩 하는 준이 형.
뒤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우리까지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랩을 따라 하고 있었다.
그동안 형들 무대를 지켜보는 사이 저절로 가사를 다 외어버린 것.
두 형님이 불도저처럼 무대를 한바탕 밀고 난 후, 그 자리를 달랜 건 영빈 형의 독무대였다.
데뷔 앨범의 ‘점멸’.
경환 형이 작곡한 노래였다.
어두운 곳을 헤매지 않도록, 깜박거리며 여기에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위안을 담은 곡.
우리는 그 곡을 무척 아꼈다.
더 많은 사람이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영빈 형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폐허 영상이 흘러나오는 무대 한가운데서 노래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다퉈야만 하는 세상을 슬퍼하며 우리는 잘 해낼 거라고 다독이듯이.
단체 무대 사이사이, 이야기를 진행하듯 넣어둔 개인 무대는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멤버들 모두와 같이 서도 큰 무대에 혼자, 혹은 둘이서 채워야 하는 무게감.
오죽하면 내게 쥐어짜지며 제발 그만하라고 투정 부리던 찬이가 같이 하자고 해줘서 고맙다고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래놓고 세빈이가 홀로 무대를 서는 걸 보더니, 다음에는 혼자서도 해보고 싶다고 했지만.
세빈이는 무대는 위령무를 보는 것 같았다.
한복과 비슷한 느낌의 의상은 두 겹의 얇은 천을 겹쳐 입은 방식이었다.
제일 안쪽 의상은 검은색, 그 위에 하얀색 겉옷을, 그리고 다시 안쪽이 비치는 깊은 바다 같은 색의 겉옷을.
야무지게 손에 쥔 하얀 천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우아하게 뻗는 손을 따라 하얀 천이 나붓거리는 모습은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무수한 함성으로 우리를 응원하던 솜뭉치들까지 세빈이 무대에서는 말을 잊은 듯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힘주어 허공으로 손을 뻗칠 때는 강렬했고, 하얀 천을 바닥에 끌 듯 무대를 박차고 뛰어나갈 때는 안타까웠다.
평소 폴짝거리며 장난치던 얼굴은 어디 가고 슬픔을 한 자락 베어 문 얼굴은 한없이 진중했다.
그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홀로 무대를 휩쓸던 세빈의 주변에 많은 댄서분이 몰려들어 함께 춤출 때였다.
새까만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세빈이만 홀로 반짝거렸다.
처음에는 나보다 작고 겁먹은 눈을 깜박거리던 아기였는데.
이제는 나보다 키도, 덩치도 커버린 막내 모습이 이상하게 뭉클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멤버들이 보고 놀릴까 봐 재빨리 닦았지만, 포잉은 그 모습을 보더니 또 한숨을 쉬었다.
왜! 뭐! 그럴 수도 있지!
왜 박력 넘치는 무대가 아니라 애달픈 춤을 추려고 하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세빈이는 회의 때 쓰는 노트를 꺼내어 콘셉트 회의 때 떠올렸던 내용을 보여주었다.
동료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콘셉트 사진을 위해 공부하던 중에 떠올랐다고.
다툼이 있으면 그 안에는 꼭 슬픔이 있을 것 같아서 위로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왕이면 한국적인 색을 넣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고.
그 의견은 실장님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지금의 무대가 되었다.
멤버들 모두가 데뷔 준비하던 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가 자처해서 갈렸던 덕분일까.
[홀로 걸어야만 했던 이 길 위에서]
객석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애절하게 외치는 영빈 형은 높이를 잊은 것처럼 보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영빈 형은 처음에는 생각보다 높은 구조물에 불안해했다.
그런 형을 고려해서 파트를 조금 바꿔 나와 세빈이가 부르는 것도 고려했지만, 결국 형이 하게 되었고.
첫 등장에 올라섰던 구조물이 둘로 갈라져 영빈 형과 내가 각각 서 있었다.
나와 영빈 형을 핀 조명이 비추고 있었고, 메인 무대에서 춤추는 멤버들은 깜박이는 듯한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조명 덕분에 스톱 모션처럼 보이는 멤버들의 안무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아떨어지고 있었고.
[내게 허락해줘,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세빈이 목소리가 흔들림 없이 넓은 공간을 퍼져나갔다.
그런 세빈을 가운데 둔 다른 멤버들은 미리 정해둔 위치로 실수 없이 이동했다.
[오늘은 꼭 네게 말할게.
우리는 앞으로도 이 길 위에 함께라고]
원곡은 잔잔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분위기의 곡이었지만, 지금 ‘서성이다가’는 달콤함 대신 간절함이 주를 이뤘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 전쟁이 끝나는 날에도 우리는 계속 함께 걸어 나갈 거라고.
우리를 재단하고 억압하는 반대 진영과의 전쟁은 서서히 끝나갔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은 찬이와 내 듀엣곡이었다.
[숨죽인 체 한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어]
먼저 내가 최대한 힘을 빼고, 읊조리듯 노래했고 찬이가 곧바로 다음 구절을 받았다.
[내가 널 놓칠 리 없잖아,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봐]
나는 메인 무대에서, 찬이는 돌출 무대에서.
우리는 각 무대의 가장 끝에서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지칠대로 지쳐 누군가를 원망하듯 내가 노래하면, 찬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 어서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재촉.
늘 나 자신의 우울함에 짓눌려 빠져나오지 못했던 나.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손을 잡아준 전생의 누나와 언래블.
이번 생조차 제대로 세상을 보지 못한 나를 받쳐주고 붙들어준 멤버들.
그중에서도 늘 전심전력으로 내게 들이 받아준 찬이.
이 노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찬이를 위해 만든 곡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이돌 언래블의 환으로써 솜뭉치들에게 뻗는 손이었다.
전생의 내게 언래블이 그랬듯, 나도 또 다른 솜뭉치들에게 세상과의 다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냥 곁에 있어 주겠다고.
굳이 뭘 안 해도 좋다고.
그저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걸 잊지만 말아 달라고.
찬이가 여태까지와 달리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에 솜뭉치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 보였다.
귀여워, 우리 솜뭉치들.
그렇게 우리 무대까지 끝나고 마무리는 ‘Samsara’였다.
[찬란하게 빛나던 당신과
빛무리를 삼킨 내가 만나,
거칠 것 없이 달릴 수 있었고]
미리 헐겁게 묶었던 붕대를 잡아당겨 풀어버렸고, 무대 위로 던졌다.
[이것 봐요,
쉬지 않고 달린 덕에 도착했어요]
돌출 무대에 모인 우린 솜뭉치들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이젠 내가 손잡아줄게.
함께 가요, 당신이 알려준 세상으로]
무수한 상처가 남았지만 우리는 승리했다고.
그렇게 우리가 준비한 첫 콘서트의 무대도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