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60)화 (360/456)

360. 하늘을 넘어(4)

마지막 뮤직비디오가 재생되던 순간, 그 길고 긴 통로를 지나는 순간.

들뜸과 긴장감으로 점철된 멤버들의 얼굴과 다치지 말라는 팀장님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

여태까지 함께 고생해준 회사 분들과 서포트 팀 사람들.

모두가 우리만큼이나 긴장해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밖에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없다는 게 억울할 만큼 고마운 사람들.

우리만큼이나 못 자고 뛰어다니며 고생해주신 분들이 붉어진 눈으로 잘하고 오라고 손을 흔들어주셨다.

다치지 마.

조심해서 해.

잘할 거야.

멋있다!

빠르게 이동하는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따뜻한 목소리들 덕분에 긴장감을 억누를 수 있었다.

- 와아아!

- 언래블! 언래블!

이미 진즉부터 들려오던 솜뭉치들의 환호성은 우리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갔다.

또렷하게 들려오는 그 환호와 응원하는 소리.

- 민하준! 김영빈! 백경환! 공지환! 최힘찬! 강세빈!

전주를 따라 외치는 멤버들의 이름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나도 저렇게 멤버들의 이름을 외쳤던 순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졌다.

불과 1년 전의 일인데.

과거의 기억 위로 지금 이 순간이 또렷하게 되새겨지고 있었다.

현장 소리가 우리 몸을 쥐고 뒤흔드는 건지, 지나치게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흔들리는 건지.

느리게 재생되는 영상처럼 나를 스쳐 지나간 많은 소리와 감정들.

아찔한 기분이었다.

너무 둥둥 떠서 발 디딜 곳 없이 허공에서 날고 있는 이상한 부유감.

아득해지는 그때, 내 손을 꼭 잡는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우리 세빈이.

늘 나를 향해 맹목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우리 막내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제야 무게를 갖고 단단한 지상에 발을 디딘 나는 세빈이 손을 마주 잡으며 웃을 수 있었다.

“래블이들.”

“네!”

“에압!”

“라져.”

“대답 좀 통일해, 이것들아.”

또렷한 준이 형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현실감이 차올랐다.

그래, 이건 꿈이 아니라 내 현실.

내가 일궈온 내 삶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고생해서 만들어온 내 자리.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였지만, 하나같이 준이 형의 부름에 크게 답했다.

“다치지 말고, 조심해서 멋진 무대 만들고 오자.”

“무대를 부수자!”

“워어!”

“진짜 조심해야 한다니까?”

준이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버리고는 씩씩하게 외치는 경환 형과 찬이를 바라봤다.

그런 동생들을 바라보는 영빈 형도 평소보다 훨씬 들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 무대 부수고, 솜뭉치 심장도 부수자.”

“오! 준이 형이 허락했어! 전쟁이다!”

“뭘 다 부순대, 자꾸!”

준이 형의 기분 좋은 허락에 낄낄거리며 흥겹게 춤추는 찬이와 세빈이의 일침.

모두가 무겁게 몸을 짓누르던 긴장감을 그렇게 하나둘 툭툭 바닥으로 떨쳐냈다.

“언래블, 올라갈게요!”

다가온 스태프분의 외침에 서포트 팀 누님들이 다가와 마이크와 복장을 매만져주셨다.

“We‘re?”

준이 형이 씩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며 물었고, 그 위로 멤버들의 손이 포개졌다.

팀장님과 우진 형, 서포트 팀분들까지 모두.

“We‘re Unravel!”

* * *

탱탱볼이 제멋대로 튀어 나가는 듯했던 ‘Confusion’이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듯한 전쟁터로 바뀌었다.

흑과 백의 전쟁, 그 한가운데 있는 언래블은 절제되고 단호한 동작으로 몰아세우는 백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

전쟁의 선두는 하준과 경환이었지만, 금방 그 옆으로 힘찬과 세빈이 붙었다.

제복을 입은 멤버들은 물러섬 없이 백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런 그들 바로 뒤에는 영빈과 지환이 있었다.

둘은 왼손에 동그란 구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그 지팡이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거렸다.

보컬들의 목소리가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하준과 경환이 몸을 낮췄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옆에 있던 막내들이 형들의 등을 짚고 허공을 날았다.

두 막내가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무대에서 불꽃이 춤췄다.

결국 백은 무대 아래로 도망가버렸고.

무사히 한 곡이 끝나고 바로 이어진 전주는 ‘I‘m OK’.

언래블의 데뷔곡이었다.

숨죽이고 무대를 지켜보던 솜뭉치들은 한 편의 영화 같은 무대 구성에 열렬한 환호성으로 응답했다.

응원봉을 쥔 손안에는 벌써 땀이 배어 나왔다.

쿵쿵대며 제멋대로 뛰는 심장 때문에 몸을 울리는 소리가 드럼 소리인지, 심장 소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제 한 곡이 끝났을 뿐인데.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팬은 다시 한번 언래블과 사랑에 빠졌다.

고작 일 년 사이 자신들의 아이돌은 무척이나 잘 자라주었고, 이 자리에서 그것을 증명했다.

벅찬 마음에 빠져있던 팬들에게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는 개개인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력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격렬한 무대를 보였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조물은 자취를 감추었고, 본무대의 대형 스크린에는 폐허로 보이는 풍경이 펼쳐졌다.

첫 곡보다 밝은 조명 아래 언래블 멤버들의 모습.

그들의 모습은 사진에서처럼 낡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직전 무대에서는 어두운 조명과 현란하게 바뀌는 여러 색의 조명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던 것.

쓸쓸함을 담아 부르는 ‘I‘m OK’는 마치 이 폐허를 만든 이들을 원망하는 듯 들려왔다.

[내가 가진 두려움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이라고]

[그렇게 알지도 못하면서 내게 손가락질해]

처음 앨범을 기획할 때, 모두가 가진 두려움을 담고 싶다고 했었다.

그 두려움을 이해하고 위로해주고 싶다고.

그때의 간절함이 여전히 멤버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듯, 그렇게 세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무 커다란 세상, 너무 커다란 의무.]

슬픔 가득한 얼굴로 폐허가 된 세상을 바라보는 하준.

그런 하준의 주변을 멤버들이 박자에 맞춰 한 걸음씩 내디디며 맴돌았다.

[그 안에 한없이 작은 나.

우리는 숨 쉬는 것도 버거운데 왜 당신만 그걸 모르죠?]

힘찬이 선두로 대형을 벗어나 돌출 무대 쪽으로 등을 돌렸고, 그 뒤를 영빈이 따랐다.

반대쪽 라인으로 세빈과 경환이 떠났고, 그들의 흩어짐은 모래바람에 휘날리는 꽃잎 같았다.

힘없이 흔들리는 꽃잎 같던 움직임이 점점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원래의 격렬한 안무가 아닌 절도 있는 대형의 움직임은 군무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연달아 세곡을 이어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준 언래블.

메인 무대의 거대한 스크린에 잡힌 언래블은 땀에 흠뻑 젖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 * *

숨이 모자랐다.

평소 연습하면서 단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더 긴장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 흥분한 탓인지.

한 곡만 끝나도 땀이 후드득 떨어지는 곡을 세곡이나 연달아 하고 나니 메이크업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어서 와요, 솜뭉치들!”

- 와아아아!

- 찬아, 사랑해!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찬이가 흥에 겨워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솜뭉치들이 환영해주었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준이 형.

왜 우리는 늘 인사부터 정석대로 시작하질 못할까?

“일단 인사부터 하자, 래블이들.”

“네엡!”

“모였어요!”

“일단 숨은 좀 쉬고….”

사방에 퍼져있던 우리는 쫄쫄쫄 준이 형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냥 걷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재밌는지 사방에서 솜뭉치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힘차게 외친 우리는 깊이 허리를 숙여 우리가 준비한 축제에 참여해준 팬들에게 인사했다.

쉽게 허리를 펼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환호성은 커다랬고, 겨우 고개를 들어 마주한 광경은 은하수였다.

우리가 손을 보탠 응원봉과 슬로건을 힘차게 흔들며 들뜬 눈을 한 얼굴들.

“언래블과 함께하는 첫 번째 축제, 첫 번째 콘서트, ‘The Revolution’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마이크를 양손으로 꼭 쥐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또박또박 외치는 세빈이.

원래는 준이 형이 외칠 멘트였지만, 준이 형이 세빈이에게 제안했다.

오프닝을 막내가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처음에는 망설이던 세빈이도 이번에는 잘해보고 싶다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건지 마이크를 쥔 손이 살짝 떨렸다.

벌써 솜뭉치들이 얼마나 흐뭇하게 웃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자, 그러면 손님들에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간 내가 운을 띄우며 준이 형을 바라보자, 어느새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던 준이 형이 마이크를 올렸다.

“언래블에서 사고뭉치들의 형을 맡은 리더, 하준입니다.”

“사고뭉치라니!”

“어허, 형이 오해가 심하네.”

“오늘은 꼭 너희의 본모습을 다 보여주고 말 거다.”

역시나 하준 형의 한마디에 반발하고 나선 막내 라인.

“메인보컬 히스입니다. 고마워요, 솜뭉치들.”

막내 라인의 반발을 누르고 빠르게 인사한 영빈 형.

“곡 쓰고 랩 하는 씨아이입니다. 저 막내 라인 아닙니다!”

“그걸 누가 믿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게 된 경환 형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물론 그 의견은 순식간에 반대에 부딪혀 사라졌지만.

“안녕하세요, 언래블의 밥 담당 겸 리드 보컬을 맡은 환입니다.”

“귀여움과 춤을 맡은 찬이에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형들의 모습에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큰 한숨을 내뱉은 세빈이.

“다재다능한 막내를 꿈꾸는 세빈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사람들이랑 살아요….”

막내의 너스레에 솜뭉치들은 커다란 웃음과 환호성으로 답했다.

“자자, 오늘까지 하찮은 모습 보일 겁니까? 우리 오늘은 멋진 거 하기로 했잖아요.”

“맞아요. 래블이들 잠깐 조용히 있자.”

나와 준이 형이 상황을 정리하자 그사이 눈치껏 다들 생수를 들이켜고, 땀을 닦았다.

분 단위로 빼곡하게 채워진 순서를 생각하면 어서 진행해야 했다.

간단하게 준비한 오프닝 멘트를 주고받으며 멤버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걱정하고 긴장했던 것들에 비하면 다들 멀쩡해 보였다.

이미 부정적인 마음은 다 떨쳐버리고 무대에 한껏 몰입한 멤버들.

“여러분, 얼마나 신나요?”

- 엄청!!

- 이만큼!

“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신난 만큼 우리 소리 질러 볼까요?”

“어디가 제일 신났는지 볼 거예요!”

이어서 멘트를 받은 영빈 형과 찬이가 솜뭉치들의 흥을 돋우는 사이 준이 형과 나도 목을 축였다.

무대를 구경하는 처지일 때는 생수를 어떻게 저렇게 벌컥벌컥 마시나 했는데.

이제는 안다.

죽지 않으려면 쏟아낸 수분을 열심히 보충해줘야 했다.

“자, 그러면 이 열기가 식기 전에 다음 곡 달려볼까요?”

“누가 제일 잘 노는지 제가 볼 거예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이 공간을 뒤흔들 것 같은 외침으로 답해주는 사람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내 편이라는 게 도저히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눈앞에 눈부신 사람들이 있고, 내 옆에는 우리 애들이, 그리고 허공에는 우리 포잉이 있었다.

‘다치지 말고.’

2층의 객석을 바라보는 척, 포잉과 시선을 맞췄다.

평소보다 더 들떠 보이는 포잉의 꼬리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꼿꼿이 선 수염 하며 얼굴엔 근심·걱정이 가득한데, 꼬리는 너무 신났으니까.

‘응. 지켜봐 줘.’

요정님의 응원을 받은 나는 더 힘차게 솜뭉치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힘들게 모인 만큼 진짜 집에 갈 힘만 남기고 마음껏 뛰어놀아요!”

- 네에!

- 지환아!!

- 와아아아!

다양한 외침에 화답하듯 한껏 환하게 웃어주었고, 곧이어 이 공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껏 멋있는 척 다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급하게 뛰었다.

“빨리!”

“이쪽으로!”

VCR이 환복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빠르게 의상을 갈아입어야 했다.

“지환아! 그거 아냐, 이거야!”

“앗, 네!”

제복을 벗어 던지고 다음 의상을 집던 나는 목덜미에 표시된 이름을 못 보고 세빈이 의상을 잡았다.

어쩐지 커 보이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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