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Chained Up(3)
힘찬은 지친 얼굴로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듀엣곡을 연습하느라 지환에게 인정사정없이 쥐어짜이다 보니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이리저리 마음대로 바닥을 구르며 나름의 휴식 시간을 즐기던 힘찬은 오늘 연습을 복기했다.
그러다 문득, 연습 시간의 지환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으으…. 떠오르지 마라, 안된다!”
차라리 연습할 때도 평소처럼 단호하고 투덜거렸으면 뺀질거리기라도 할 텐데.
하준 형에게 배운 건지, 같이 연습할 때의 지환은 무척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들부들하게 웃으며 다시 해보자고, 더 잘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여기 반 박자만 빠르게 해보자.’
‘우리 찬이 잘하네, 그런데 여기서는 감정을 조금만 더 넣어볼까?’
‘조금 전에는 호소하는 것처럼 불러줄 수 있어?’
‘발음 뭉개지면 안 돼. 다시 할 수 있지?’
이런 식으로 계속 부추기곤 했고, 정신을 차려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차라리 평소 하던 대로 하라고 반항을 해봤지만, 힘찬의 말을 잘 들어주면 공지환이 아니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단둘이 부르는 곡은 처음이라 좀처럼 긴장이 가시지 않아 힘들었는데.
역시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사실 지환의 조언대로 바꿔나가면서 노래하기 점점 편해졌고, 녹음해서 들어도 결과가 훨씬 나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꼼짝 못 하고 붙들려 다니는 것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힘찬에게는 그것보다 콘서트 날까지 생존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체력에 자신 있는 편이었던 힘찬이지만, 날이 갈수록 그 자신감이 쪼그라들 정도로 힘에 부쳤다.
그나마 지환과의 연습은 듀엣곡의 연습이라 그나마 하루의 총연습 시간에 비하면 짧았다.
하지만 영빈 형이 도와준다는 말에 덥석 시작했던 연습은 더 길었고, 더 다양한 방식의 연습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 형님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최근에는 하준 형까지 시간 있냐고 물어왔다.
형한테 끌려가면 지환이랑 연습할 때보다 더 혹독한 꼴을 모면하지 못할 거라는 낌새가 느껴졌다.
슬금슬금 도망치려던 자신의 어깨를 붙들던 하준 형의 얼굴이 어찌나 무섭던지.
늘 노래에 자신이 없었던 자신에게 갑자기 이런 시선이 꽂히는 게 낯설었다.
가끔, 영빈 형이나 지환이 노래 부르는 걸 보면서 부러워했었다.
목을 어떻게 하면 저렇게 쓸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힘찬은 본인이 가수라는 걸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던 것도 맞고.
하지만 최근에는 너무 과했다.
그렇게 시달리다 잠깐 그 무서운 사람들을 피해 숨어든 작은 연습실.
특히나 서늘한 바닥이 이렇게 안락할 수 없었다.
이 연습실은 힘찬이나 세빈이 개인 연습할 때면 사용하는 곳이라 다른 멤버들은 잘 오지 않았다.
연습생 시절에는 다들 한 번씩 여기를 거쳐 갔는데.
“휴….”
마왕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의 한숨인지, 지친 마음을 대변하는 한숨인지.
힘찬은 차가운 연습실 바닥을 매만지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처음 이 공간을 발견했던 연습생 때의 추억.
가끔, 홀로 이곳에서 연습하던 멤버들의 뒷모습.
세빈이와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안무를 만들던 날.
생각보다 더 많은 추억이 이 장소에 숨겨져 있었다.
늘 더 잘하고 싶었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그이기에 지금의 힘듦은 투정이라는 것도 알았다.
사실 싫다기보다는 부끄러운 쪽이니까.
힘찬은 자신과 세빈이 자격지심 느끼지 않도록 멤버들이 늘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같이 겉으로 표현하는 걸 어색해하는 사람들이라 문제지만.
숙소 거실에서처럼 연습실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힘찬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정도 쉬었으면 충분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쪼개가며 연습하고 있을 멤버들을 생각하면 더 뭉그적거리는 건 사치였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이리저리 허리를 움직여 뻐근했던 몸을 풀고 나니 조금 더 개운해졌다.
“어라, 찬아. 혼자 뭐해?”
“실장님, 안녕하세요! 잠깐 쉬었어요.”
갑자기 연습실에 고개를 빼꼼 내민 사람은 정윤 실장님이었다.
평소 이쪽으로 잘 다니지 않는 분인데 무슨 일이지?
“잘 쉬어주는 건 중요하지. 내가 방해했네.”
“아니에요! 이제 일어날 생각이었어요.”
처음에는 표정이 없는 높으신 분이라 마냥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실장님이 옆에 있으면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지키는 게 어른의 일이라고 하던 실장님 모습이 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실장님이 처음이었으니까.
괜히 그때 마음이 생각나서 심장이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음? 뭐 기분 좋은 일 있니?”
“그냥요. 실장님이랑 있으니까 좋아서요.”
“얼씨구? 요 녀석, 말은 잘하지.”
툴툴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실장님도 정작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좋은 기억이 차곡차곡 잘 쌓이고 있다는 생각에 지쳤던 몸에 다시 활력이 돌았다.
“찬아.”
“넵!”
“언제든 좋으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편하게 해. 실장님이 아무리 바빠도 너희한테는 시간 낼 수 있어.”
진지한 눈으로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하는 실장님 모습에 갑자기 보드랍고 탱탱한 계란찜이 생각났다.
어릴 때 아파서 밥을 잘 못 넘길 때면 엄마가 해줬던 그 계란찜.
“네. 꼭 말씀드릴게요. 실장님도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듣는 건 잘하거든요.”
“그래. 실장님도 꼭 이야기할게.”
오늘따라 실장님은 웃음이 헤펐다.
좋은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실장님에게 좋은 일이 되어드린 걸까.
어느 쪽이든 실장님도 자신과 멤버들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이 연습실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연습생 때는 주로 남몰래 숨어야 할 때 찾던 곳이었고, 형들이 여기서 혼자 우는 걸 지켜봐야 했던 날도 있었다.
힘찬에게 그동안 이곳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을 털어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작은 연습실을 나와 실장님과 나란히 걷는 이 길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손톱만큼은 자란 것 같았다.
* * *
“뿌듯하다.”
“왜 형이 뿌듯해해요….”
하겸 형은 내 볼을 콕콕 찌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여기 내 지분도 쫌 있잖아.”
“제 볼이에요. 지분 주장하지 마세요….”
“내 지분도.”
“내 살이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둬요….”
오른쪽에는 하겸 형이, 왼쪽에는 새벽 형들.
말만 들어도 지치는 이 조합이 내 양쪽에서 뺨을 주물럭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숨만 쉬어도 누구보다 지칠 자신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날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했지만, 안타깝게도 맞은 편에는 디아 형이 부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요, 왜 부러워해요.
형은 에드 뺨이나 잡아당겨요!
“디아야, 부럽지? 너도 환이 볼 만지고 싶지?”
“네. 저도 만져볼래요.”
“넌 아직 안 된다. 더 수련하고 돌아와라.”
“와, 치사하다. 진짜.”
그냥 형이고 뭐고 다 버리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처음 내가 예상한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Origin’ 촬영 당시 불미스러운 일 때문인지 UDTC 방송에서는 우리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당시 하필이면 기사도 난 데다, JC 엔터까지 엮인 상황이라 평소처럼 뭉개고 배 째라고 하지 못한 것.
회사는 회사대로 방송국에 아직 주영욱 PD가 남아있다는 게 찝찝하다며 그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눈치를 보느라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
그러던 와중 새벽 형들이 UDTC 예능에 출연하게 됐다.
평소 안 해봤던 것들을 하나씩 해보는 그런 연출의 프로그램이었다.
그중 가영 형이 해보고 싶다고 했던 게 아이돌 댄스 교습.
춤을 알려줄 사람으로 나를 골랐다는 말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평소 춤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들인데 갑자기 이게 무슨 수작이지….
우리 노래 안무를 조금 알려주면 된다는 말에 차라리 찬이나 세빈이가 나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건만.
안타깝게도 내 주장은 묵살되었다.
왜 꼭 이럴 때는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걸까….
심지어 촬영도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회사 연습실에서 한다고 했다.
어쨌든 하기로 했기에 형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안무를 골랐고 드디어 오늘이 녹화 당일이었다.
그런데 등장한 건 새벽 형들만이 아니었다.
새벽 형들에 하겸 형과 디아 형까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당황한 얼굴로 PD님을 바라봤지만, 내가 마주한 건 환하게 웃는 PD님 얼굴이었다.
정처 없이 헤매던 내 시선이 멤버들과 우진 형을 스쳤지만, 하나같이 내 시선을 외면했다.
나 빼고 다 알고 있었구나!
알고 보니 단순히 안무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친분 있는 사람을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내용이라고 했다.
하겸 형이랑 새벽 형들 안 친한 거 내가 다 아는데?
“원래는 서로 인사만 하는 사이였는데 언래블 덕분에 하겸 씨랑도 친해졌어요.”
“이번에 라디오에서 한 건 하셨죠? 저도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해보니까 꽤 잘 통하더라고요. 저희가 연차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해서.”
선한 얼굴로 다정다감한 멘트를 이어가는 가영 형이 무척 낯설었다.
뭐야, 이 사람 누구야….
특별 MC를 맡은 디아 형은 혼이 쏙 빠진 나를 두고도 매끄럽게 진행을 이어갔다.
가볍게 근황 이야기와 앨범 이야기를 나눈 뒤로는 조금 더 내밀하고 편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형님들 근황과 내 볼살이 도대체 무슨 연관인지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다….
“환 군이 몸이 좀 약하잖아요. 그래서 진짜 열심히 먹였어요. 저희 애들도 그렇고 새벽도 그렇고. 그렇죠?”
“틈나면 소고기 사 들고 쫓아가죠. 얘는 입도 짧아서 많이 못 먹더라고요.”
“저 정도면 평균이에요. 그리고 사와도 결국 조리하는 건 제 몫이잖아요!”
심지어 이 토크에는 대본도 안 주셨다.
처음 대본을 안 주시길래 뭐지? 했더니 나는 그냥 질문에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고.
연습이 주를 이룰 테니 대본은 없어도 될 거라던 작가님은 지금 저쪽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가사 받았을 때 다들 어떤 느낌이었어요? 평소에 환 군은 마냥 어린 동생 느낌인데 일할 때는 또 확 다르죠?”
“아예 다른 사람이죠. 눈빛부터 바뀌니까요. 집요하긴 또 얼마나 집요한지.”
“다른 멤버들도 맞다고 고개 막 끄덕이네요. 아이고, 얘들아, 진정해.”
넉살 좋게 하하 호호하면서 대화 나누는 디아 형과 세비 형.
그나마 이 조합은 비즈니스 느낌도 나고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선이었다.
그렇게 연습실에 의자 몇 개 놔두고 이어지던 토크가 끝난 뒤, 본격적인 안무 연습에 들어갔다.
“늘 연습 전에는 이렇게 몸 풀어요?”
“네. 아무래도 안무가 조금 과격한 편이라.”
왜인지 모르겠는데 새벽 형들뿐만 아니라 하겸 형과 디아 형도 같이 몸을 풀고 있었다.
“제가 형들한테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에이, 오늘은 그냥 맘 편히 알려주면 된다니까. 봐봐, 우리의 초롱초롱한 눈을.”
집중할 준비 됐다며 고개를 들이미는 형들 모습에 질색하며 몸을 뒤로 빼자, 그마저도 재밌는지 낄낄대고 있었다.
이 조합이 그동안 TV에서 볼 수 없던 조합이긴 했다.
골든아워와 멜트는 같은 소속사다 보니 같이 출연한 적이 꽤 됐지만, 새벽은 방송 자체를 잘 안 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마주칠 일이 잘 없었다.
끽해야 시상식이나 연말 무대 때 잠깐 만나는 정도이려나.
그랬던 형님들이 이번 앨범에는 유난히 TV에 얼굴을 많이 비추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했다.
다진 형님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전에 다시 얼굴도장 찍는 걸까?
잠시 떠오른 잡생각을 떨쳐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춤에는 자신 없지만, 그래도 우리 안무를 가르쳐주는 건데 실수해서는 면이 안 선다.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복수도 한 숟가락 넣어봐야지.
형들을 굴릴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뭐야, 왜 그렇게 불길하게 웃어.”
“환아, 살살하자.”
“잘 부탁드립니다.”
가영 형과 하겸 형의 말을 흘려들으며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