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 Chained Up(2)
결국 언래블의 형님 자리 쟁탈전은 준이 형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데 부끄러움만 남은 그런….
나중에 다시 한번 따져보자며 악수하는 형님들 사이에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뭔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사이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들 사이에 낀 준이 형만 슬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저 자리에 없는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한편으로는 양쪽 팬들 모두 유쾌하게 즐기고 끝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채팅창의 메시지들은 대부분 깜짝 이벤트를 본 것 같아 재밌어하는 반응이었다.
밉보이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라디오가 끝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우리는 다시 셋리스트를 체크했다.
콘서트에 쓰일 곡들은 편곡에 들어갔고, 각자 개인 무대를 위한 연습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맞대고 무대의 구성을 꾸미는 일은 기분을 들뜨게 했다.
슬슬 콘서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준비하는 상황이 되자 기분이 무척 이상해졌다.
현실감이 부족해서 두근거리면서도 불안한 그런 기분.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우리 애들도 몇 번이나 서로에게 물어보고 맞춰가느라 혼이 쏙 빠졌다.
“준이 형 오려면 멀었나?”
“아마 곧 올 거 같은데.”
“한 번 정도 맞춰보면 올 듯?”
새벽 두 시.
이전 같으면 숙소에서 뒹굴거나 이미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이제는 세시, 네 시에 잠드는 것도 점점 익숙해지는 멤버들이 안쓰러웠다.
애들은 졸려서 꾸벅꾸벅 졸다가도 연습곡이 흘러나오면 비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가면 진지한 얼굴로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체크하고.
준이 형은 먼저 숙소에 가서 쉬라고 했지만, 멤버들은 어차피 늦을 거 연습하면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쫌만 더 힘냅시다!”
“화이팅!”
“그러자….”
기운차게 외치는 찬이와 세빈이.
그리고 체력이 달리는 나와 영빈 형의 작은 대답.
다시 연습실 가득 우리 노래가 흘러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 얼굴에는 땀에 흘렀다.
오늘도 이 정도면 알찬 하루를 보낸 듯했다.
* * *
디아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고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도망만 다니던 에드가 숙소에 복귀한 멤버들 앞에 섰다.
순식간에 얼어붙는, 싸늘하다 못해 아린 공기에 에드는 잔뜩 기죽어 보였다.
“제가 그동안 형들한테 실망만 안겨준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더듬더듬 이어가는 문장.
그 사이사이 숨 쉬는 순간마다 디아의 가슴에서는 다 억누르지 못한 통증이 흘러나왔다.
키우다시피 한 막내였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회사와 사람들로부터 막내를 지켜냈는데, 정작 그 막내는 멜트 멤버들을 외면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피 흘리며 지켜낸 동생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귀엽기만 했던 막내가 더는 멜트를 바라보지 않았다.
서운하다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에드는 알까?
“….”
디아, 사피, 루, 페리 모두 무정한 눈으로 에드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한껏 움츠러든 어깨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이내 털어냈다.
“진작에 사과하고 노력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너무 무서워서 도망칠 생각밖에 못 했어요.”
용케 더듬거리면서도 문장을 마무리 짓는 에드의 모습에 사피는 깊은 한숨을 토했다.
늘 에드를 감싸고 돌던 사피는 이번 일에 가장 상심이 컸다.
외동인 사피는 에드를 친동생처럼 여겼으니 오죽할까.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해?”
루는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그 옆에 서서 말하는 에드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억지로 분위기 맞추려고 애쓸 필요 없어. 그냥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내. 회사에 따로 말할 생각 없으니까.”
“그게….”
“지헌아, 그만해.”
“아, 왜!”
분노도 아니고 원망도 아닌 그저 사실을 열거하듯 말하는 루의 모습에 에드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디아는 리더였고 이들의 형이었기에 이런 분위기를 계속 두고 볼 수 없었다.
“둘 다 그만해.”
디아의 단호한 제지에 루는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입은 다물었다.
이들 중 가장 힘들고 지친 건 누가 뭐래도 디아였으니까.
디아는 에드를 방출시키자는 회사와 한참을 싸워야 했다.
에드가 괘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회사의 뜻대로 내보냈다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뻔했다.
회사는 에드에게 책임을 물을 테고, 소송도 생각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이후 방송 출연은 고사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애가 혼자 허우적대다 말라 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
아무리 미워도 그런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디아는 멜트를 지키고 싶었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자. 박화영, 앉아. 언제까지 서 있을 거야.”
이전처럼 다정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한 마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에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지환이 알려준 게 맞았다.
한 명씩 붙들고 사과하는 게 낫지 않냐는 에드에게 지환은 각개격파도 상황 봐가면서 하는 거라며 한 소리 했다.
모두에게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먼저라면서.
그 후에 조금씩 한 명, 한 명 다가가라고 했다.
겨우 말할 기회를 얻은 에드는 메모장에 써가며 연습했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냈다.
두서없이 말하면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할 것 같았던 에드는 편지를 쓰듯,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그마저도 자신이 없어 몇 번씩이나 지환에게 보내서 이런 말은 해도 되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기막혀하던 지환도 에드가 어떻게든 해보려는 모습이 가상했는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에드가 적었던 문장에서 오해할만한 표현을 제외하던 지환은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애당초 에드는 말투 자체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기에 그 부분부터 지적해야 했다.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과 싸가지 없이 말하는 건 다르니까.
에드는 열심히 가르침 받았던 걸 떠올리며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감정에 호소하는 건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것 같다고 지환이 지적했던 걸 잊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왜 바로 사과하지 않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등 최대한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바로 용서받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고.
그저 자신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한편, 멜트 멤버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게 자신들이 알던 그 ‘박화영’이 맞는지 얼떨떨했다.
에드는 여태까지는 한 번도 이렇게 차분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일단 알았어. 그런데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내일 또 이야기하자.”
“네…. 저 들어가 볼게요. 잘 자요, 형들.”
얌전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에드.
그리고 에드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페리는 루를 붙들고 흔들었다.
“쟤, 화영이 맞아? 껍데기만 박화영 아냐?”
“야, 이거 놓고 말해!”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봐.”
방에 있는 에드에게 들릴까 봐 목소리 낮춰 속닥거리던 멜트 멤버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물론 이런 대화 한 번으로 그동안 쌓인 앙금이 풀릴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에드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인 만큼 지금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나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고 넘어가고 싶은데. 쟤가 저러는게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고 싶어.”
“너무 평소랑 달라. 차라리 울면서 매달리면 이해할 텐데 박화영 안 같아.”
“자꾸 누가 생각난다 했는데, 화영이 말하는 거 환이 같지 않아?”
낯설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멤버들은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사피의 한마디에 굳었다.
“카피한 건지 아니면 배운 건지 모르겠네.”
“일단 지켜보자.”
사과 한 번으로 에드를 용서하기엔 이들이 느꼈던 배신감은 가볍지 않았다.
일단 쉬고 다시 이야기하자는 디아의 말에 각자 방으로 흩어지는 멤버들.
그리고 홀로 거실에 남은 디아는 고민하다 지환에게 연락했다.
얼마 전, 에드가 외출했던 게 지환과 만나기 위해서였던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포기하다시피 했던 마음에 미약한 희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 * *
어둑한 체육관 안의 농구코트 위.
편안한 차림을 한 언래블 멤버들이 각자 편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있었다.
자기들끼리 무어라 투덕거리며 장난치던 멤버들 옆으로 농구공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먼저 호기심을 보이는 건 힘찬이었다.
힘찬은 검은색 로고가 새겨진 하얀색 헤어 밴드를 하고 있었고, 집업 안에는 화려한 그림이 프린팅된 티를 입고 있었다.
몸을 빙글 돌려 농구공으로 양팔을 뻗는 사이, 얌전히 그걸 두고 보지 않는 경환이 잽싸게 먼저 공을 잡았다.
품이 넉넉한 연한 분홍색 후드티를 입은 경환이 씩 웃자, 힘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농구공 쟁탈전.
금방 다른 멤버들까지 달려들어 코트 위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즐거운 듯 뛰어다니는 멤버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공을 잡은 멤버를 클로즈업해서 잡았다.
하준은 하얀 바탕에 짙은 카키색과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반팔 아노락을 입고 레이업 슛을 시도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하준을 가드 하던 영빈이 바스켓을 맞고 튀어나온 공을 리바인드했고.
영빈은 앙퀴라 특유의 로고가 등에 큼직하게 들어간 네이비색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같은 색의 트레이닝 팬츠로 애슬레저룩을 뽐내는 몸이 무척 길쭉하고 탄력 있어 보였다.
영빈은 지환에게 공을 넘겼고, 가뿐한 몸짓으로 공을 받아낸 지환.
지환은 새하얀 트레이닝 집업을 목까지 잠그고 있었다.
그는 세빈에게 공을 던진 직후, 소매를 걷어 자연스럽게 손목 보호대를 노출했다.
넘겨받은 세빈은 노란색 맨투맨티에 검정 배기핏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있었다.
짙은 회색 후드 집업을 편하게 걸쳤는데, 의상 곳곳이 레터링 프린트로 심심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품에 공을 안고 있던 세빈은 이내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카메라를 향해 공을 던졌다.
화면을 가득 채울 것처럼 날아온 농구공은 펑 하고 터지며 그 안에서 앙퀴라 로고가 떠올랐다.
* * *
“그날 우리가 이렇게 찍었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광고 홍보 사진이 뿌려지고 기사가 올라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첫 번째 광고 영상이 공개됐다.
그날 열심히 농구코트를 뛰어다니긴 했었다.
역동적인 모션을 취해달라는 감독님의 요청이 있었기에 다들 최대한 큰 몸짓과 활기찬 표정을 유지했다.
덕분에 한 번 찍을 때마다 땀 범벅이 되었지만.
“우리가 봤던 영상이랑 좀 다르지?”
“세빈이 너 언제 카메라로 공 던졌어?”
“저 카메라로 던진 적 없는데요….”
다 같이 모여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노출된 광고를 확인한 우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워낙 여러 번 찍어서 올라온 완성본이 낯설었다.
“이게 바로 편집의 위대함인가보다….”
“그래도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뛰어다닌 보람이 있네.”
“맞아, 우리 되게 신나 보이게 잘 나왔네!”
우리는 모르는 영상 편집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이리저리 뜯어봤다.
이게 첫 번째 영상이고 이게 공개되면서부터 이벤트를 시작한다고 했었지.
“이왕이면 잘됐으면 좋겠다.”
“솜뭉치들 지갑이 가벼워지는 건 좀 걱정되지만 그래도….”
막내들은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팬들이 부담스러울까 봐 걱정되는 마음이 싸우는 중인 듯했다.
그런 막내들이 귀여워서 구경하고 있던 나는 상황을 정리하는 준이 형의 외침에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찬아, 연습 가자.”
“으응?”
“빨리 와.”
내 부름에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던 찬이는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났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다, 인마.”
“잡아먹진 않지. 그냥 말려 죽일 뿐.”
“어허, 오해가 심하신데?”
찬이도 칭찬하면 할수록 더 잘하는 타입이라 그저 열심히 칭찬했던 것뿐인 나는 억울해졌다.
“그래서 솜뭉치들한테 멋진 모습 안 보일 거야?”
“간다, 가!”
좋아, 오늘도 열심히 찬이를 쥐어짜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