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낙하(1)
어두운 무대 위, 핀 조명 하나가 유일한 빛을 흩뿌렸다.
그 아래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한 사람, 가영이었다.
마이크를 움켜쥔 그의 좌우에는 키스와 세비가 잔상처럼 흐릿한 빛에 실루엣만 보여주었다.
좁지 않은 무대, 그리고 그 뒤에 어둠에 숨어있는 몇 명의 사람들.
여느 때처럼 세비가 베이스 바디를 툭툭 두들기는 소리, 줄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연주가 시작되었다.
키스의 긴 손가락이 신시사이저 위를 오가며 색이 풍성해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드럼이 등장했다.
- 가여운 날 위해,
온 우주가 눈물 흘리던 그 날.
한숨 같은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아무것도 모르던 넌 웃었어.
저 빛무리가, 드디어
우리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새벽의 새 앨범은 언래블의 활동 마지막 주부터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컴백 무대를 볼 수 있었던 언래블은 저마다 다양한 감정을 안고 노래에 빠져들었다.
늘 헐렁하고 이상한 짓만 하던 형님들의 본업하는 모습.
눈을 빛내며 무대를 바라보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SCTV에서 새벽의 컴백 첫 무대를 기획한 뮤직밸류의 박세날 PD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UDTC에서 컴백 무대를 노리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박세날은 가영과 직접 통화해서 담판을 지었다.
원래는 다음 주 컴백으로 말이 오가던 새벽을 꼬신 미끼는 언래블이었다.
언래블의 ‘EL DORADO’ 마지막 음악 방송이 SCTV니 일정을 맞추면 합동 인터뷰에도 좋지 않냐고.
새벽 타이틀의 가사를 언래블 멤버가 썼다는 것도 흥밋거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원래 새벽은 비즈니스에서 종잡을 수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의 엉뚱한 행동이 늘 좋은 결과로 돌아왔다.
뭘 해도 되는 그룹이라는 게 업계의 평.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싶어 방송을 내보내야 할지 새로 찍어야 할지 고민될 때조차도 일단 내보내는 게 맞았다.
방송 신이 돕는 게 아니냐는 농담이 오갈 정도.
- 연녹색 잎사귀 사이로 떨어지던 빛.
- 홀로 눈감아야 했던 순간에도 선명하고.
- 별이 되어 함께 할게.
우리가 영원할 수 있도록.
키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쓸쓸함을 머금고 노래했고, 세비의 미성이 그 애틋함을 다독였다.
방송가만큼 미신에 민감한 사람들도 없었다.
촬영 전, 고사를 지내는 건 당연했고 예민한 사람들은 꼭 미리 부적을 받아오기도 했다.
녹음할 때나 촬영할 때 귀신이 나오면 흥행한다는 미신은 거의 정설처럼 내려오는 게 이쪽이었다.
그러니 저들은 더 똘끼 충만한 짓을 해도 다들 수긍하고 넘어갔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잘 팔리는 그룹이었으니까.
‘아무튼 쟤네는 좀 신기해.’
새벽이야 몇 년의 활동 내내 한결같이 제정신 아닌 놈들 같았으니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언래블은 이제 1년 된 신인인데 별별 일이 다 있었다.
최근 방송가를 시끄럽게 한 대부분 사건은 그들과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당장 박세날 자신만 해도 프로그램 하나 새로 시작했다가 크게 일을 치렀다.
다행히 잘 수습되었고, 그 사건이 이슈가 되어 시청률을 잘 뽑아먹었다.
다만, 당시 부상 때문에 언래블의 활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기에 자신이 치를 수 있는 대가를 치렀다.
처음 무대부터 이들이 어느 정도 잘될 거라는 감이 왔기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냥 신인이었으면 적당히 뭉개고 넘어가도 그들로서는 별말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넘어가는 개념 부족한 PD 놈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그래도 박세날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잘했다며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영욱 PD 사건은 다른 방송국에서도 꽤 크게 화자 된 일이었으니까.
누구는 그가 어설펐다고 혀를 차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쓸데없이 PD 위신 깎아 먹는다고 욕하기도 했다.
“확실히 잘해.”
아이돌 그룹처럼 화려한 퍼포먼스가 있는 게 아니었지만, 새벽은 역시 새벽이었다.
연주와 목소리로 무대를 압도하고 있었으니.
다른 가수뿐만 아니라 방송국 스태프들, 감독들도 집중한 게 한눈에 보였다.
그들의 컴백 첫 무대를 물었으니 이번에도 한 건 했다.
“만수야… 아, 만수 보냈지. 예진아!”
“네!”
“좀 있다 인터뷰 잘 챙겨라.”
박세날 PD는 직접 키운 김만수를 졸업시켰던 걸 깜박했다.
고개를 흔들어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린 후 직접 예진을 불러다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언래블에 다른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사건 사고가 그들에게 붙어 다니니 아주 조금 불안해진 것.
부디 별일 없이 잘 흘러가길 빌었다.
* * *
“이번 가사를 특별한 인연을 가진 분이 써주셨다고 들었는데요, 조금만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가영이 씩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미약한 불안을 담아 그런 가영을 바라보던 세비.
그리고 이미 포기한 듯한 키스의 체념 어린 얼굴이 카메라에 선명히 잡혔다.
이런 모습조차 이들의 일상이라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저희 병아리가 썼습니다!”
“아…. 병아리요?”
원 질문지에는 가영의 답이 정상적으로 적혀있었다.
언래블의 ‘환’군이 썼다고 분명한 글자로 적혀있었지만, 가영이 가영했다.
이미 그런 새벽이 익숙한 카메라맨과 스태프들과 달리 인터뷰어인 아이돌 지수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진은 차마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키스, 쟤 마이크 뺏어.”
“아, 맞잖아!”
저런 새벽 멤버들의 모습이 컨셉이 아니라 본모습이라는 걸 아는 방송국 스태프들과 언래블만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냥 원래 제정신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지수에게는 버거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녀도 아주 초보는 아닌 터라 금방 상황을 수습하고 말을 이어갔다.
“네, 새벽 선배님들이 무척 아끼는 분들이죠. 애칭까지 있을 정도라니, 부럽네요.”
“죄송합니다. 저희 리더가 늘 말썽이라.”
세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불만스러운 듯 키스를 툭툭 치던 가영과 짜증을 꾹꾹 눌러 담는 듯한 키스 모습까지.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한쪽에서 등장을 기다리던 지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상황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이번 타이틀곡 가사는 언래블의 환이라는 친구가 써줬습니다. 무척 고마운 일이죠.”
근사한 얼굴이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다른 사람들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저희가 모셨습니다! 마침 오늘이 이번 앨범 마지막 활동인 언래블입니다!”
옹기종기 구석에 모여서 인터뷰를 구경하던 언래블에서 제일 작고 하얀 멤버가 쏙하고 빠져나왔다.
“안녕하세요, 언래블 환입니다.”
“우리 작사가님 오셨어요?”
“선배님, 제발….”
“우리 사이에 선배님은 무슨. 평소처럼 형이라고 해.”
부드럽게 인사하던 지환은 지나치게 활기찬 가영의 멘트에 곤란한 듯 웃더니 세비에게 눈짓했다.
일부러 친분을 과시해 주는 건 좋지만, 가영은 늘 그게 과했다.
“곡은 썼는데 도무지 가사가 안 나왔어요. 그때 키스가 그러더라고요. 차라리 제3의 인물한테 맡겨보자고.”
“저희가 밴드 음악을 하지만 장르의 한계를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여러모로 후배들에게 자극받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세비의 중재 덕분에 인터뷰는 적당히 매끄럽게 잘 진행되었다.
어차피 자잘한 부분은 잘라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예진은 이 정도면 잘 마무리됐다고 안도했다.
이걸로 예진은 자신의 몫을 끝마친 것 같았다.
* * *
“도입부 가사가 무척 인상적인데요, ‘가여운 날 위해, 온 우주가 눈물 흘리던 그 날’이라고 표현하신 거요. 가사를 떠올린 계기가 있을까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미리 정리해둔 대답을 천천히 읊었다.
“선배님이 보내주신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곁에 누군가 있는데도 내가 온전히 안고 가야 하는 그런 외로움들이요.”
그런 나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이 무척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 무시할 수 있었다.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게 어떤 게 있을까 고민했는데 마침 유성이 떠올랐어요. 그렇게 쓰게 됐습니다.”
겨우 준비한 대답을 마치자 그때부터 가영 형이 신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겨우 인터뷰를 다 끝내자 이번엔 형들 손에 질질 끌려 차로 납치되듯 태워졌다.
“저는 도대체 왜 달고 다니시는 거예요….”
기다렸다는 듯 차는 출발했고, 가영 형과 키스 형이 내 양쪽에 앉았다.
흡사 도망치지 못하게 경찰에게 끌려가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너도 이렇게 겸사겸사 얼굴도 좀 더 비추고 능력 있는 걸 알려야지. 그래야 개인적인 작업도 들어오고. 어?”
가영 형은 작사비로 너도 돈 좀 땡겨야 하지 않겠냐며 그래야 좋은 장비도 사고하는 거라며 싱글벙글했다.
사실 새벽 형들이 우리를 챙기느라 나를 끼고 다니는 건 알고 있었다.
인터뷰 때 나와 함께 인터뷰하고 싶다고 주장한 덕분에 우리 회사에도 연락이 꽤 많이 왔으니까.
처음에는 무척 고마워서 감동하기도 했다.
아직 관심이 많이 고픈 우리는 뭐라도 더 할 수 있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처음에 비하면 꽤 많은 스케줄이 들어왔지만, 그래도 늘 부족했다.
나도 멤버들도 욕심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렇게 형들 사이에 낑겨서 끌려다니는 건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따로 이동하겠다고 했는데, 형들이 굳이 그러지 말라고 했다.
본인들이 픽업하러 오겠다고.
그때는 그저 형들의 배려가 고마웠는데 알고 보니 새카만 속내가 있었다.
“얘네랑만 다니면 너무 심심해. 윤혁이는 맨날 뚱하니 있고 세비는 나랑 안 놀아줘.”
내가 가영 형을 커버하는 제물이었던 것.
“키스 형….”
“환아, 콘서트 준비는 잘 돼 가?”
“이렇게 말을 돌리시겠다?”
옆에서는 끊임없이 가영 형이 나를 짤짤 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키스 형이 내게 이럴 수 있나 싶어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형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도 초대석 주나?”
“당연히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 좀 그 마음이 흔들려요. 팀장님한테 다 이를 거예요….”
원망을 듬뿍 담아 툴툴거리며 답했지만, 형들은 뭐가 재밌는지 시시덕거렸다.
이렇게 날 제물로 써먹다니.
이래서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나 보다 싶었다.
“컨셉은 뭐로 잡았어?”
“비밀이에요. 형들한테는 안 알려줄 거예요.”
“우리 병아리, 삐졌어요? 오구오구.”
“제발 그것 좀 하지 마요….”
흡사 유치원생 다루듯 놀려대는 형들 사이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암담함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그마저도 가영 형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내가 진짜 언젠가는 복수하고 말 거야….
그런 나를 구경하는 포잉의 시선이 어찌나 따가운지.
히죽거리는 저 얄미운 수염을 잡아당기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니 속으로만 상상했다.
“힘찬이한테는 말해봤어?”
“아…. 음. 얘기해봤는데 좀 부담스러워해요.”
키스 형의 질문에 어제 찬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최근 멤버들과 나눴던 대화, 그리고 찬이와의 다툼 등.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일들을 겪고 난 후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멤버들을 챙긴다고 잘못 생각했던 여태까지의 일들.
어긋날 게 두려워 무의식중에 멤버들의 진심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날들.
그리고 그런 날 놓지 않고 끝까지 붙잡아준 멤버들.
많은 것을 겪으며 새롭게 쓴 곡이 있었다.
그 곡을 쓰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게 힘찬이었고.
콘서트 때는 멤버들에게 개인 무대 시간이 주어지는 걸 알고 있었다.
각자 어떤 무대를 할지 구상하는 사이, 나는 그 곡을 찬이에게 함께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찬이는 난색을 보였다.
자신이 부르기에 곡이 너무 어렵다고.
곡을 쓰면서 키스 형에게 많이 물어봤던 터라 형도 알고 있었다.
“걔도 안 그런 척하면서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니까.”
열심히 잘 꼬셔보라며 웃는 가영 형의 얼굴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얄미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