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40)화 (340/456)

340. Daydream(5)

* * *

- 율이 형, 회사로 와.

“알았어. 금방 갈게.”

세비는 평소랑 어딘가 다른 키스 목소리에 가영이 또 무언가 했겠다고 짐작했다.

오랜 지인을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즐겁게 지냈으니 이제 다시 일할 타이밍인가 보다.

“일하러 가냐.”

“어. 우리 막내 찡찡댄다.”

“미친, 김윤혁한테 찡찡댄다고 하는 미친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왜, 우리 윤혁이도 가끔 귀엽다?”

제법 진지한 얼굴이 된 세비.

친구는 그런 세비의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내 친구들은 죄다 미친놈뿐인가.

일에 미치든가 돈에 미치든가 사랑에 미치든가.

그래도 범죄는 안 저지르는 인간들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던 세비는 다음에 또 보자며 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굴기는 했지만, 세비 눈에는 키스도 아직 어린 애 같았다.

틱틱거리고 날카롭긴 해도 키스만큼 자기 사람을 확실하게 챙기는 이도 드물다.

“진짜 귀여운데.”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려도 그 얼굴이 어디 갈 리 없었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탈까 했던 세비는 주변의 힐끔거리는 시선에 한숨을 삼키며 택시를 잡았다.

세비의 은밀한 취미 중 하나가 한가로운 시간대에 대중교통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고,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의 흐름을 보는 걸 좋아했다.

일상의 행복이 주는 안정감을 사랑하는 세비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소중했다.

연예인이 되면서 가장 아쉬운 게 이런 것들이었다.

얼굴이 알려진 이상 편히 밖에 다니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세비가 깨닫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었으니.

세비는 연예인이 되기 전에도 주변의 시선을 많이 받은 얼굴이라는 것.

매끄러운 피부와 작은 얼굴도 신기했지만, 그 안의 이목구비가 무척 시원시원했다.

단정한 일자 눈썹과 그 아래 깊은 눈은 무척이나 사연 깊어 보이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실상 본인은 아무 생각 없었지만.

정작 세비는 가영이나 키스와 다녀서 그들 때문에 시선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당사자들이 들으면 미쳤냐고 하겠지만, 딱히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성격들이 아니다 보니 오해는 늘 깊었다.

게다가 자세가 늘 꼿꼿했고 단정했기에 다정해 보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무대 위에서는 단정하기보다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를 풀풀 풍겨댔지만.

가영이 세비에게 같이 밴드 하자고 졸라댔던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본인만 몰랐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한 세비를 반긴 건 키스였다.

“가영인?”

“형 올 때까지 좀 잔대. 계속 못 잤잖아.”

“곡 들어봤어?”

그동안 작업한다고 고생한 걸 알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차라리 좀 자고 일어나는 게 컨디션 회복에도 좋을 테니까.

겉옷을 벗어 가지런히 옷걸이에 거는 모습에 키스는 제발 한가영이 세비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숙소가 그나마 사람 사는 집 꼴을 할 수 있는 건, 주기적으로 청소해주시는 분과 세비 덕분이었다.

키스는 자기 물건 정도야 정리할 수 있지만, 한가영의 뒤치다꺼린 무리니까.

“어. 형은 아직이지?”

“응. 들어보자.”

평소보다 조금 더 들떠 보이는 키스 모습이 이상했지만, 그만큼 곡이 잘 빠졌나보다 했다.

그리고 곡을 들은 세비는 키스가 그랬던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들이 가이드 녹음했어? 왜?”

“가사 괜찮지?”

“어. 안 써진다고 징징대더니 잘했네. 이거 우리 곡 맞아? 애들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데?”

가이드 녹음은 보통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기 위해 하는 터라 이렇게 정성스럽게 녹음하지 않는다.

세비는 지환과 힘찬이 녹음한 곡이 새삼스러워 다시 한번 키스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 가득한 의문을 읽은 키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가사 환이가 썼대. 가사 받은 가영 형이 한번 불러보라고 했더니 찬이랑 둘이 그렇게 해왔다고 하더라.”

“이거 애들 줘야 하는 거 아냐? 너무 잘 어울리는데.”

세비는 둘의 듀엣곡이라고 해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환이가 왜 힘찬이까지 불러서 녹음한 줄 알아?”

“그러게. 왜 그랬대?”

의자에 기대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만든 세비 앞에 마주 앉은 키스는 자못 즐겁다는 듯 대꾸했다.

“우리가 부를 때 분위기 살리고 싶었대.”

“응?”

“환이가 우리 피처링해 봤잖아. 그러니까 가영 형 스타일을 아는 거지. 그래서 힘찬이를 가영 포지션에 넣고 자기가 피쳐링하던 그 느낌으로 살린 거야.”

“아, 그래서 분위기가 그렇게 편했나?”

보통 세비나 키스는 노래하는 파트가 많지 않았다.

둘은 어지간히 부를 실력은 됐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메인보컬을 맡을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둘 다 노래보다 연주, 그러니까 악기를 만지는 걸 더 좋아했고 가끔 곡을 쓰는 데 만족했다.

그래서 노래는 가영과 반다진 둘이 불렀고, 둘은 연주에만 매진했다.

“그건 그렇고 힘찬이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나 싶네.”

“여태까지보다 톤 살짝 낮은 게 더 나은 거 같지?”

가사도 곡과 잘 어울렸고, 두 꼬마 병아리의 노래도 훌륭했다.

새벽의 분위기와 감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설명에 둘 다 심장이 더 몽글몽글해졌다.

“진짜 걔네는 딱 병아리 같다니까.”

“내 말이. 어디서 그런 애들이 굴러들어온 건지.”

매일 매일 잘 자라고 있는 병아리들 생각에 둘 다 피식거리며 몇 번이고 가사를 음미했다.

가영이 매번 신박한 곡을 써오는 건 이제 그러려니 할 정도로 익숙했지만, 이건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아, 한가영 깨울까?”

“좀 더 둬. 어차피 일어나면 한참 또 못 잘 텐데.”

“그럼 커피나 한잔하자.”

모처럼 즐거운 기분으로 일할 수 있겠다 싶어 둘 다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쟤네 뭐 하는 거야?”

“놀고 있네요.”

영빈 형은 신나게 자기들끼리 방방 뛰고 있는 막내들을 바라보다 내게 물었다.

“그래, 진짜 놀고 자빠졌네.”

“풉.”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응, 역시 팩트는 무섭지.”

연습량에 미친 건지, 아니면 정말 콘서트를 하게 된다는 소식에 미친 건지 막내들이 미쳐버렸다.

우리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우진 형을 붙들고 떼를 썼다.

무슨 꿍꿍인지 당장 알려주지 않으면 탈주해서 고깃집으로 달려가겠다고.

말 같지 않은 협박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던 우진 형.

그런 형은 세빈이와 찬이가 몸에 매달리자 결국 항복을 외쳤다.

말해주지 않으면 경환 형까지 매달릴 거라는 말을 듣더니 질색했다.

우리 애들이 이제 제법 묵직해지긴 했지.

우진 형도 꽤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창때인 막내 라인 셋은 버겁다고.

형은 마지못한 얼굴로 팀장님이 곧 자세한 얘기를 해줄 거라며 말을 아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우리는 그동안의 눈치로 우진 형의 말을 듣자마자 ‘콘서트 맞구나!’를 외쳤고, 얼마 후 팀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나눌 거니까 생각해둔 게 있으면 정리해오라고.

그때부터 멤버들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생각하는 콘서트 주제가 뭘지 추측해보기도 하고, 어디서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고.

그 후 바로 제영 쌤의 지옥 훈련을 받았지만, 다들 아드레날린 과다 상태라 연습 시간에는 날아다녔다.

오죽하면 제영 쌤이 기뻐하며 어디서 산삼이라고 씹어먹고 왔냐고 했을까.

하지만 연습이 끝나자마자 맏형들과 나는 연습실 벽에 기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순간의 기쁨에 우리를 불살라버린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가끔은 저 체력이 진짜로 부럽기도 해요.”

끝나고 연습실 바닥으로 드러누웠었는데, 저 셋은 금방 회복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 니가 그린 기린 그림 같은 소리 집어치워!

“너네야말로 집어치워!”

- 집어치워!

한껏 신난 찬이는 경환 형이 예전에 만들었던 곡을 틀어놓고 부르고 있었다.

경환 형은 당장 끄라고 쫓아가고, 낄낄대며 춤추는 찬이.

세빈이가 넘겨받은 핸드폰에서는 계속 경환 형의 곡이 흘러나왔다.

결국 경환 형은 졌다는 듯 손을 양손을 위로 들었고, 어느새 다음 곡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리듬을 타며 둠칫둠칫 어깨를 들썩이는 막내와 흥에 겨운지 경환 형을 곧잘 따라 부르는 찬이.

“찬이 목소리 저게 더 낫지 않아요?”

“그러게. 저렇게 낮은 톤이 되네.”

평소 찬이는 중음 정도의 키였다.

노래 부를 때는 살짝 올려 불렀고.

평소에 랩을 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방금 경환 형을 흉내 낸다고 톤을 낮춰 부르는 게 역시 잘 어울린다 싶었다.

귀가 쫑긋 설 정도로 매끄럽고 허스키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준이 형과 영빈 형은 눈이 두 배쯤 커졌다.

정작 같이 붙어서 놀고 있는 경환 형이나 세빈이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얼마 전에 가영 형을 조금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때 확실히 느꼈거든요. 쟤 생각보다 저음이 잘 어울려요.”

“그래? 한번 시켜봐야겠는데.”

팀 내에서 시원하게 내지르는 고음은 메인 보컬답게 영빈 형이 전담했다.

나는 여기저기 다 쓰이는 목소리였고, 세빈이는 목소리가 맑은 편이었다.

반면 찬이는 독특한 울림이 있어서 잘만 쓰면 우리 노래에 더 다양한 색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의 일 덕분이었고.

가영 형은 보통 메시지를 보내거나 직접 찾아오는 편이지, 전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 자체를 귀찮다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가끔 무슨 일이 있을 때나 보러 온다고 통보할 때 전화하곤 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해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대뜸 도와달라고.

목소리가 애처롭기까지 해서 걱정이 무럭무럭 덩치를 키웠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도울 수 있는 건 돕겠다고 했더니 가사 좀 써봐달라고.

아, 정말 형만 아니었으면 욕했다.

앞에 있었으면 찬이 차듯이 걷어 차버렸을 거고.

맥이 탁 풀려서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했더니 내 감성대로 가사를 써달라고 했다.

곡은 나왔는데 가사가 안 써진다면서 평소답지 않게 한참을 칭얼거렸다.

귀엽지도 않은 인간이 칭얼거리는 건 정말 취향이 아니었지만, 작업하다 막히면 얼마나 답답한지 알기에 마지못해 수락했다.

형은 키스 형이나 세비 형에게는 그렇게 온순하면서 자기만 홀대한다고 또 한참을 투덜거렸다.

진짜 몰라서 저러는 걸까?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서운하다고 하니 또 열심히 달래드렸다.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그건 그거고, 일을 도와달라고 했기에 일단은 최대한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보내준 파일을 열었을 때는 사실 두근거리기도 했다.

가영 형이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형이 만들고 부르는 노래들은 무척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귓가에 스며드는 멜로디는 어김없이 내 기대를 뛰어넘는 좋은 곡이었다.

당장이라도 가사가 있다면 따라부르고 싶을 만큼 귀에 착착 감기는.

덕분에 가사를 쓰는 건 즐거웠고, 실제로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작곡도 작사도 이래서 즐거웠다.

머릿속에 상상만 하던 세계를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게 전생에서는 상상도 안 해봤던 일이니까.

심지어 공부할 수 있고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무척 만족스러운 작업이었고, 형의 요구로 가이드 녹음까지 마쳤을 때는 아쉽기까지 했다.

언제쯤 나는 이렇게 곡을 쓸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찬이 목소리에 더 다양한 색이 있다는 걸 멤버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뭐, 이렇게 난장판 속에서 알려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하준 형의 눈이 번쩍거리는 걸 보니, 조만간 찬이는 준이 형의 작업실로 끌려갈 것 같았다.

나만 아니면 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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