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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34)화 (334/456)

334. 세계가 불타버린 밤, 우린(4)

하준은 처음보다 한결 나아진 지환의 얼굴을 확인했기에 남몰래 안도했다.

창백한 건 아직 남아있었지만, 며칠 동안 죽을상을 하고 있던 거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일할 때는 귀신같이 표정을 잘 갈무리했지만, 회사나 숙소에서는 지환은 생각보다 티가 많이 났다.

그걸 당사자만 몰랐을 뿐.

닫힌 방문 너머로 찬이가 소리 지르는 게 들렸을 때는 모두가 엉덩이를 들썩이기도 했다.

더 심하게 싸우면 어쩌나, 진짜로 서로 감정이 상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저 동갑내기 둘에게는 그들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모두가 머리로는 알았다.

그랬기에 하준과 영빈은 경환과 세빈을 손목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지켜봐 줘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로 하지 않았냐고.

다행히 고함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고 더는 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환이 형 괜찮을까요?”

“그냥, 환이는 겁이 많고 걱정이 많은 것뿐이야.”

“쟤는 늘 혼자 다 하려고 하는 게 문제지.”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불안해하던 세빈은 맏형들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불안해하던 자신을 다독여주었던 형인데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었다.

울적해하는 세빈을 눈치챈 경환은 슬며시 막내 품에 쿠션을 찔러넣어 줬다.

지환은 아직도 자신이 이 팀에서 어떤 포지션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 때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다가오더니 자기 일은 꽁꽁 숨기다니.

경환은 그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힘찬과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에 한발 물러났다.

성격이라는 게 한순간에 바뀔 수 없기에 지환은 또 비슷한 고민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아니, 아마 또 자기 안으로 숨어들려고 할 것이라는 걸 이 자리에 모두가 알았다.

‘순순히 그렇게 둘 줄 알아?’

경환은 삐뚜름하게 웃으며 방문을 바라봤다.

그는 언래블 멤버 중 누구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간신히 찾아낸 자신의 자리였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경환뿐만 아니라 모든 멤버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들은 각자의 고난을 딛고 손에 쥔 언래블과 서로를 절대로 놓을 생각이 없었다.

“쟤네 저러고 나면 배고플 텐데.”

“환이는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저녁 뭐 먹어?”

각자의 속사정을 모르지만, 이번 일은 잘 해결될 거라 믿었기에 그 이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치킨?”

“안돼. 얼마 전에 피자 먹었잖아.”

“그건 벌써 일주일도 더 전에 소화되고 없는데….”

은근한 목소리로 치킨을 말했던 경환은 하준의 단호한 반대에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하준은 지환이 아니었기에 그 모습에 속지 않았고,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먹자고 했다.

“화해한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으면 좋을 텐데….”

경환의 눈빛을 받은 세빈이 영빈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방긋 웃어준 영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준에게 다가갔다.

“싸우고 화해할 때마다 맛있는 거 먹으면 체중 유지가 되겠어?”

“내일 눕방 할 건데, 뱃살 보이면 솜뭉치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어.”

“뱃살 없거든요!”

하준의 타박에 세빈이 발끈했지만, 용케 작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아직 둘이 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 거실에 있던 이들은 목소리를 낮췄다.

동생들의 거센 반대를 잘 무시한 하준은 지환이 만들어두었던 반찬을 가늠했다.

각자 집에서 보내온 반찬과 있는 반찬만 해도 양이 꽤 됐다.

“상하기 전에 이거 다 먹어야지.”

“밥 있어? 확인해봐.”

두 맏형이 부산스럽게 주방을 오가자 결국 이기지 못한 경환과 세빈은 툴툴거리며 아직 열리지 않는 방문을 바라봤다.

지환은 몰랐겠지만, 멤버들은 생각보다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 * *

“딴짓하지 말고 다들 일찍 자.”

“니에~.”

“어휴, 저걸 그냥.”

“다들 잘 자요.”

속이 후련해진 건지 찬이는 히죽거리며 일찍 자라는 하준 형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런 찬이를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준이 형.

우리 막내는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셨는지 뽀얀 얼굴로 잘 자라고 인사했다.

나 때문에 저 조그만 게 걱정했구나 싶어서 미안해졌다.

‘너는 언제쯤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는 거임?’

‘? 난 언제나 객관적인데?’

‘하….’

밥 먹는 사이 숙소로 복귀한 포잉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시도 속이 편할 날이 없다며 혀를 차는 걸 보아 자리에 없었는데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듯했다.

툴툴거리는 포잉을 달랜 나는 일찍 자겠다며 경환 형에게 인사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설핏 형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들킨 것 같기도 했다.

포잉과 이야기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아까 형이 남긴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잊어버린 척, 피곤한 척했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둔하기만 하던 경환 형은 어떻게 된 건지 눈치챈 듯했다.

‘네가 매우 티 난다는 걸 너만 모르는 거 같은데.’

‘내가? 우리 애들이 너무 눈치 빠른 거야….’

여태 속내를 들키지 않고 잘 살아왔기에 내가 티 난다기보다 우리 애들이 눈치 빠른 거로 생각했다.

혀를 차던 포잉은 평소처럼 등 돌리고 눕는 게 아니라 날 바라보며 엎드렸다.

마치 내가 포잉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있잖아, 포잉.’

‘말하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던 게 무색하게 포잉은 담담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이런 질문 자체가 포잉이 여태 내게 보여준 애정과 신뢰를 해치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다.

그게 제 일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나를 위해 화내고 날 위로해준 포잉이었는데.

‘내가 포잉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혀가 길다, 계약자야. 궁금한 걸 물어.’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보더니, 팔뚝을 찰싹하게 내리쳤다.

역시 포잉에게는 정공법이 최선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천천히 하나씩 질문을 골랐다.

‘포잉은 내가 언제 죽는지 알고 있어?’

‘모름.’

‘진짜?’

‘수명은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님. 우리는 각자 담당하는 영역을 절대로 침범하지 않음.’

한 치 망설임 없이 쏟아지는 대답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적어도 포잉은 정해진 날을 두고 날을 세어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니까.

처음 포잉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날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짜증 내고 하악질 하던 작고 작은 내 요정님.

설명조차 귀찮아했지만, 의외로 질문하는 건 또 꼬박꼬박 대꾸해주었다.

처음에는 지켜보기만 하면서 내게 필요한 말 위주로만 대답했었다.

질문하면 답해줄 뿐, 먼저 말을 걸거나 다정하게 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루, 하루 함께 지내는 날이 늘면서 점점 더 친밀해졌다.

이제는 날 바라보는 눈동자에 온기가 가득했고, 온전한 내 편이 되어주었다.

찬이보다 먼저 내 편이 되어준 게 포잉이었으니, 포잉이 내게는 첫 번째 친구일지도.

멤버들에게 적응하고 나를 욱여넣던 힘든 날들에는 포잉도 같이 힘들어했다.

날 위해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내가 놓치는 일 없도록 주변을 확인해주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정말 내가 믿는 포잉의 모습이 전부인지, 아니면 그조차 일 때문이었는지.

‘내가 언래블에게 꽃길을 깔아주고 싶다고 했잖아.’

‘….’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응시하는 우주를 닮은 눈동자.

‘난 솔직히 내가 정확히 무슨 소원을 빈 건지 잘 모르겠어. 그리고 소원이 언제 끝나는 건지도.’

‘또?’

아무렇지 않게 계속해보라는 듯 대꾸하는 포잉의 태도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생겼다.

포잉은 어떻게 되어도 내 곁에 있겠구나 하는 그런 근거 없는 믿음.

손을 뻗어 포잉의 털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렇게 쓰다듬을 때면, 포잉은 늘 기분 좋다는 듯 낮게 골골거리며 내 손에 머리를 부벼왔다.

지금처럼.

‘좀 무서웠거든. 죽는 날이 정해져 있는 건지, 언제까지 그 소원이라는 게 유지되는 건지.’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자 전부 토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소원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또 어떻게 되는 건지, 그때도 그냥 나는 나인지 전부터 쭉 묻고 싶었어.’

정리되지 않은 의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모두 포잉에게 털어놓았다.

터트리고 나니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만큼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이 고기를 쳐들었다.

얌전히 내 쓰다듬을 받던 포잉이 앞발을 들어, 내 손을 잡았다.

잠깐 멈추라는 뜻 같아 쓰다듬을 멈추고 작은 몸 위에 손을 얹어두었다.

손을 타고 느껴지는 뜨끈뜨끈한 포잉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정말로 걱정이 많은 종족이야.’

무심히 이어진 포잉의 중얼거림.

‘계약자야,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네가 제대로 소원을 이루기 전까지 함께 할 거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포잉은 작은 한숨과 함께 하나씩 내게 일러주었다.

‘네 안에 가장 간절했던 소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였음.’

‘어?’

‘제대로 살고 싶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등등.’

포잉의 말이 이어질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몰래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던 내용을 누군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른 지환의 소원은 성공하고 싶다였음.’

‘성공?’

‘아이돌로서의 성공,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에게 복수. 누나를 호강시켜주고 싶다는 마음 등.’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과 함께 눈가에 열이 올랐다.

원래 지환의 소원들을 듣자마자 내 안에 잠자던 그때의 마음들이 떠올라서.

조그만 그 등이 여전히 눈에 훤해서.

옆으로 누운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눈물이 헤픈 사람이 아니었는데.

포잉은 그런 내 모습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더니 눈물을 핥아주었다.

내 요정님은 여전히 위로가 서툰 요정님이었다.

‘그리고 둘이 공통으로 가졌던 키워드가 지금 너희 멤버들임. 그래서 네가 언래블에 집착하는 걸 수도 있고.’

‘우리 애들은 원래도 좋아했으니까 괜찮아.’

‘그래, 그건 일단 내 추측이니까.’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한 포잉은 그 뒤로도 하나씩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놓지 못하는 나를 이해해주었고,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는 것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강박증처럼 걱정을 놓지 못하는 내게 잘못된 게 아니라고 해주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겪으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맞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적응해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 포기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여러 케이스에 비하면 나는 잘 적응해가고 있는 편이라고.

‘내가 먼저 이런 말들을 늘어놓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하지만 계약자야, 네가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도 괜찮다.’

‘응….’

오늘은 여러모로 위로받고 배워가는 날인 듯했다.

준이 형에게, 찬이에게, 그리고 우리 멤버들과 포잉에게.

오늘 이렇게 확인받고 괜찮아졌지만, 언젠가 또다시 의심이 똬리를 틀고 불안이 자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멤버들과 포잉이 내게 보여준 모습을 생각한다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고마워, 포잉. 솔직히 물어보기 겁났어.’

‘원래 무지는 두려움을 동반하는 법. 그러니 모자란 계약자인 너는 언제든 질문하고 배워가도록.’

‘언제쯤 안 모자란 계약자가 되는 거야?’

포잉의 툴툴대는 말투에 웃음을 삼키며 촉촉한 콧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 것 같음? 잠이나 자셈.’

역시 내 요정님은 부끄러움을 너무 많이 탔다.

포잉을 한번 꼭 끌어안았다가 꼬리에 한 대 얻어맞았지만 괜찮았다.

포잉이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해주었으니까.

* * *

포잉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잠든 계약자를 내려다보았다.

‘쯧.’

약해빠진 주제에 겁까지 많아서 역시 손이 많이 가는 계약자였다.

그래도 속을 드러낼 생각을 한 건 기특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계약자가 자라고 있는 듯했다.

계약자가 덜 겁먹게 하려고 눈을 피해 적들의 뒤처리를 하느라 자리를 비웠더니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계약자야.’

포잉은 폭신한 앞발로 지환의 뺨을 토닥거렸다.

계속 항소하려던 망둥이를 조정해서 얌전히 감옥에 처박고, 그 아비를 흔들어 똑같이 쇠고랑을 차게 했다.

정신 이상 같은 헛소리 못 하도록 단속하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 후엔 최병섭 PD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가게 종용했다.

삶이 박살 난 그를 한계까지 등 떠밀기보단 새 삶을 살게 하도록 노력했다.

처음 얽혔던 때는 무지한 호의가 만든 사고였다는 점을 감안한 응징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 보면 좀 나아지겠지.

이경주 작가에게 피해당한 이들에겐 증거물을 긁어다 줬다.

그녀는 여전히 수사 중이었지만 아마 커리어는 박살 나서 복귀가 불가능하리라.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주영욱 PD였다.

아직 방송국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어지간히 독하다 싶어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공정한은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그의 자녀들이 공정한을 정신병동에 가둘 수 있었다.

‘10년으로는 부족하지. 더 좌절하고 반성해라.’

지환은 본 적 없는, 분노로 새파랗게 빛나는 포잉의 눈이 잔혹하게 반짝였다.

소원 요정은 결코 원수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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