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33)화 (333/456)

333. 세계가 불타버린 밤, 우린(3)

하준 형은 한 번도 끊지 않고 두서없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너무 횡설수설해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전생과 현생 내내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감정을 토해 내버렸으니….

간신히 심호흡하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다독이고 나니 털어놓은 무수한 말들과 생각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휴게실에 있는 것보다 숙소에서 편히 쉬는 게 나을 것 같다며 준이 형은 기어코 나를 우진 형에게 넘겼다.

소중히 대해주는 건 무척 고마웠지만, 오늘치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남았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는 행동 모두가 그 이유 하나로 정당화될 수는 없을 텐데.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됐을까.

힘겨운 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포잉마저 곁에 없는 지금이 그나마 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늘 잘 웃고 장난치는 걸 좋아했던 찬이라 몰랐던 걸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찬이 고민을 알 수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던 내가 잘못했던 걸까.

이명과 함께 어지럼증과 두통이 심해졌다.

멤버들이 내 건강에 예민하게 군다는 건 알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만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점차 홀로 다니는 내 활동 반경에 제한을 두는 듯한 행동이 답답했다.

어서 빨리 더 많이 얼굴을 들이밀어서 더 많은 인지도를 쌓아야 한다는 생각.

여태까지 중에 가장 좋은 반응을 보이는 앨범이라, 멤버들뿐만 아니라도 나도 욕심났다.

세빈이가 불안한 얼굴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찬이가 자기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더 많은 예능에 함께 출연하고 싶었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체력이 버텨줄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민감한 문제도 웃으면서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가장 옆에 있는 막내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건 몰랐다.

나를 향한 시선이 멤버들에게도 상처일 수 있다는 걸 간과했다.

세빈이가 예능 활동을 피하는 걸 보고 어르고 달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찬이가 점점 과격한 리액션을 보일 때 타박하기만 했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일 년도 안 된 시간 사이에 나는 벌써 애들을 내 안에 고정관념 안에 가두고 있었다.

내가 너무 무지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해서 숨이 자꾸만 가슴에 걸리는 기분.

준이 형과 대화하며 조금 괜찮아졌던 속이 다시 뒤집히기 시작했다.

헛구역질이 일어 생수병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힘이 빠져버렸다.

더 이상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싶지 않아졌다.

모든 게 짜증 나고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

그냥 끝도 없이 그냥 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고 싶다는 생각에 이불을 구겼다.

하지만, 그런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깊은 늪 같던 방 안에 갑자기 빛이 쏟아졌다.

“괜찮아?”

“아, 네. 애들은요?”

“아니지, 환아. 괜찮지 않다고 해야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얼굴을 한 준이 형이 다가와 경환 형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들어 시선이 마주친 순간, 늘 힘을 내게 해줬던 연한 갈색 눈동자가 얼룩덜룩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네가 언래블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환아.”

“….”

준이 형은 우리라고 하지 않았다.

‘언래블’이라고 했다.

덜컹거리던 심장이 심연으로 툭 떨어진 듯했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되면 안 돼.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기로 약속했고.”

“네….”

슬퍼 보이는 그 얼굴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몇 번이나 우리는 너한테 이야기했어. 제발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달라고.”

나보다 더 아픈 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준이 형.

이불을 움켜잡은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놓을 수 없었다.

이 이불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놓으면 꾹꾹 눌러놓았던 온갖 것들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무서웠다.

준이 형의 깊은 한숨이 방안을 가득 채우던 그때, 형과 내 몸 위로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경환 형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힘겹게 달싹이던 입술은 무어라 단어를 만들지 못했다.

그저 ‘흐’ 하는 울음소리도 아니고 말도 아닌 숨만 뱉어냈다.

묵묵히 그런 나를 바라보던 준이 형과 경환 형.

머리를 들고 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 고개를 툭 떨궜다.

몇 번이나 멤버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어놓고 그러지 못했다.

애들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말자고, 이미 충분히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라고 해놓고.

“지환아.”

“경환아.”

경환 형이 나직이 나를 불렀고, 준이 형은 그런 경환 형을 만류하듯 불렀다.

“형, 난 지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

준이 형의 만류에 경환 형은 완곡하게 거부의 뜻을 내비쳤다.

준이 형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우리 형 늙겠네.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 사이에도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형은 네가 왜 우리를 믿지 않는지 그동안 계속 묻고 싶었어.”

경환 형은 ‘왜’를 물었다.

왜 너는 우리를 그렇게 움켜쥐려고 애쓰는지.

왜 너는 우리를 품에 다 안지 못해 안달하는지.

왜 그 우리에 너 자신은 자꾸 빼놓는지.

부정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언젠가는 멤버들이 묻지 않을까 했던 일.

아주 많이 나아져서 어느 정도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고 충실해졌지만, 그럼에도 끝내 다 버리지 못했던 욕심.

그저, 너희가 잘됐으면 했어.

전생에 내가 알았던 것처럼 힘든 신인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면 했어.

내가 너희를 더 빛나게 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건지 알고 싶었어.

나와 ‘지환’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면 그 후는 어떻게 되는 건지 두려웠어.

그 후에도 여전히 나는 언래블의 환인지, 아니면 방구석 폐인인 공지환인지.

내가 지금 죽을 둥 살 둥 너희와 노력해서 이루어낸 모든 것들이 그때도 내 것이 맞는지 알고 싶었어.

알고 있었다.

내 욕심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멤버들이 하나둘 자신의 몫을 찾아가고 더 많이 우리를 알려가서 너무 좋았다.

노래도 작곡도 연기도 즐거웠다.

아무것도 없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손안에 쥐니까 덜컥 겁이 났다.

지금 나는 전생보다 훨씬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었고, 이루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이 이루어낼 것이다.

하지만 점점 그렇게 욕심이 붙을수록 헷갈리기 시작했다.

포잉은 그저 내가 행복하게 목표한 삶을 끝내도록 함께 있어 준다고 했다.

언래블한테 꽃길 깔아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게 어디까지인 거야?

누군가 죽는 순간까지 함께 있어 준다는 사실은 안도감과 함께 두려움을 남겼다.

그래서 차마 포잉에게 그럼 나는 또 언제 죽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늘 나와 함께 해줄 거라는 그 말만 붙들고 따뜻한 포잉을 끌어안는 게 전부였다.

겨우 이번 삶에 적응하고 나니 내가 욕심쟁이가 되어있었다.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행복하면 끝인 걸까.

그러다 결국 멤버들에게 또 걱정을 끼쳤다.

늘 사랑하고 소중하다고 했던 멤버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역시 난 욕심을 내면 안 되는 걸까?

“환아. 우리는 너한테 화내고 있는 게 아냐.”

“너를 알려달라는 거야. 우리가 너랑 더 친해지고 싶으니까.”

두 형의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의 경환 형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저런 얼굴은 곡 쓸 때만 짓던 사람인데.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한 머리를 억지로 굴리던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방문은 열려있지만 다른 멤버들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누구야?”

“저요.”

준이 형의 질문에 찬이 목소리가 들렸다.

움찔하는 내 손등을 경환 형이 괜찮다는 듯 꽉 잡아주었다.

“지환아, 얘기 좀 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 찬이는 무슨 생각인지 읽어내기 어려웠다.

“형들, 저 환이랑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알았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나는 다급한 눈으로 준이 형을 바라봤지만, 형은 늘 우리를 바라보던 눈으로 웃었다.

“괜찮아. 형이 말했지? 나랑 빈이가 어땠는지.”

“나보다 쟤가 더 급하니까 양보할게. 나중에는 형이랑도 얘기해.”

어설픈 손길로 내 머리를 헝클어준 경환 형도 준이 형을 따라 방을 나갔다.

형들이 옆에 있던 동안 두통과 이명이 가라앉았다.

덕분에 조금은 더 괜찮은 얼굴로 찬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너 지금 얼굴 되게 웃긴 거 아냐?”

“….”

괜찮은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보다.

기운이 쭉 빠져 다시 시선을 이불로 돌렸다.

“나 진짜 너한테 서운하다.”

“미안해….”

“그러는 게 서운하고 짜증 난다고!”

찬이는 준이 형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홀로 분을 삭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 그따구로 했는데 왜 화를 안 내냐? 나한테 이 멍멍이 새끼야! 하면서 욕도 하고 하라고.”

“…화 안 났어.”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너한테 막 뭐라 해도?”

찬이는 다그치듯 다다다 말을 쏟아냈고 그 기세에 눌린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냥?”

되묻는 찬이 눈에는 열기까지 느껴졌다.

기필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겠다는 집념.

우리 찬이는 무척 고집이 셌다.

그렇게 악착같이 연습하고 노력해서 그만큼 멋진 춤을 출 수 있었고, 이렇게 언래블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 기백에 밀린 나는 결국 꾸깃꾸깃 접혀있던 마음을 펼쳤다.

“…좀 서운했어. 내가 너무 오지랖 부리긴 했는데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잖나 싶어서.”

서서 나를 바라보던 찬이는 그제야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말해. 너도 알잖아, 나 못돼처먹어서 꼭지 돌면 막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거.”

“야, 그렇게까지….”

넌 그런 애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찬이는 내 말을 잘랐다.

“지금은 그냥 내 말 들어. 난 실수도 많이 하고 사람 눈치 볼 줄은 알아도 그게 뭔지 잘 모른단 말야.”

정제되지 않은 최힘찬의 감정과 생각들이 툭툭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홀린 듯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무의식중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켰다.

- 미련한 새끼

- 창피해 죽겠네, 이렇게 해야 알아듣냐?

- 넌 진짜 친구만 아니었으면 한 대 쳤어

- 미안해

- 조금만 솔직해지자, 우리

- 좀 이기적이면 안 되냐?

- 친구잖아.

두서없이 후두둑 쏟아지는 찬이 속에 숨어있는 마음과 날 위해 열심히 말하는 목소리.

두 가지가 깊은 늪 같았던 방 안에 가득 차 반짝거렸다.

“고민을 다 우리랑 나누라는 말은 아닌데, 우리한테는 다 말하라고 하면서 너만 숨기니까 짜증 나. 빡친다고.”

“얼씨구.”

“준이 형한텐 말하지 마.”

조금씩 말이 거칠어지던 찬이는 준이 형한테 말하지 말라며 얼굴 붉혔다.

속마음을 보여주는 글자들이 반짝이는 희미한 빛 덕분에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 말 그렇게 하지 마. 나 진짜 서운했어.”

“미안해.”

“나도 내 맘대로 휘두르려고 해서 미안해.”

“내가 못 미더운 거 아는데 가끔은 그냥 나 좀 믿어줘.”

“응. 믿을게.”

그렇게 한참 동안 나와 찬이는 그동안 서로에게 짜증 났던 것, 고마웠던 것들을 하나씩 주고받았다.

말하다 보니 이게 무슨 고해성사인가 싶기도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에게 전력으로 부딪히는 친구가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줘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마웠다.

내 안에 고여있던 음울한 고민을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야 할 지도 약간은 알 것 같았다.

평생에 처음으로 느껴본 친구와의 다툼과 화해.

언래블은 이렇게 새로운 한 가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분위기가 몽글몽글해지자 더는 견디지 못한 찬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좀 음침하게 해놓지 말고!”

그러자 방문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끝났냐?”

“네.”

경환 형이 묻고, 찬이가 대답하자 방문이 벌컥 열리고 세빈이가 쪼르르 다가왔다.

“형, 최힘찬이 욕한 거 아니지?”

“야 벌써 이렇게 배신때리냐?”

울상이 된 세빈이를 안고 토닥였더니, 그 모습에 찬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싸우냐.”

“안 싸워요!”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이것들아.”

경환 형이 피식거리며 찬이를 툭툭 건드렸지만, 세빈이가 냉큼 답했다.

방 입구에 기대 방안을 살피던 영빈 형은 피식 웃더니 우리를 불렀고.

짧은 전쟁이 끝나자 평소처럼 부드러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이제는 포잉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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