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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32)화 (332/456)

332. 세계가 불타버린 밤, 우린(2)

하준은 얼마 전, 막내들이 찾아와 자신을 붙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섣부르게 당사자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하준과 영빈이 그랬던 것처럼, 동생들도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중이었으니까.

주먹질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감정싸움인 것도 참 지환이답다고 생각했다.

그 작은 머리통 안에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생각이 담겨있는지.

하준은 힘찬이 주저하며 털어놓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세빈이 그 큰 눈 가득 걱정을 담고 말하는 것도 빠짐없이 잘 들었다.

그 후 하준이 찾은 건 영빈이었다.

하준이 보기에 지환은 영빈과 조금 닮아있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잘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은 영빈은 하준에게 차분하게 제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감정을 눌러 담는 법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토해내라고 하면 탈이 날 수밖에 없다면서.

늘 지환이 우리 눈치를 보고 우리를 보호하려 드는 걸 모두가 알지 않냐고 했다.

사람을 잃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면 화내는 것조차 할 수 없을 거라고.

어쩌면 지금 지환이가 착한 아이 증후군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지환은 생활의 전반을 멤버들에게 맞추고 있었다.

스케줄도 대부분 팀장님과 멤버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했다.

본인이 무언가 하고 싶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늘 멤버들에게는 뭐가 하고 싶은지,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면서.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주변에서 지환의 의사를 물으면서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준아, 우리는 그냥 다리를 놓아주는 정도만 하는 게 어떨까 싶어.”

“중재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던 영빈은 이번 일에 개입을 최소한으로 하자는 말을 꺼냈다.

동생들의 싸움을 그냥 치기 어린 싸움으로 치부하기엔 걱정스러웠다.

몸에 난 상처보다 마음에 난 상처가 아무는 게 훨씬 고통스러웠으니까.

조금 맹하게도 보이는 어리둥절한 친구의 어리숙한 얼굴에 영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중재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까지만 하자고. 이건 우리가 이래라저래라할 일은 아니잖아.”

우리가 싸웠을 때 어땠는지를 떠올려보라던 영빈의 말에 하준은 괜히 민망해졌다.

치기 어린 시절, 영빈과 치고받고 싸우던 무수한 일이 떠오른 탓.

“우리끼리 싸웠을 때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괜히 더 짜증 났잖아.”

“그건 맞지. 휴, 일단 지환이랑 한번 이야기해볼게.”

“그래, 너라면 적당히 잘할 테니까.”

자신 없어 하는 하준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준 영빈.

하준도 동생들 대할 때면 늘 자신 없어 하는 자신을 영빈만의 방식으로 응원해준다는 걸 알았다.

그건 언제나 그렇듯 괜한 민망함을 동반한 고마움을 불러일으켰다.

“고맙다.”

“별말씀을.”

투덜거림을 가장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는 하준의 모습은 꽤 볼만했다.

이걸 찍어서 동생들 보여주면 진짜 좋아할 텐데.

영빈은 하준이 알면 펄쩍 뛰며 멱살을 잡을만한 생각을 하며 짧게 웃었다.

* * *

지환과 힘찬의 다툼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듯했다.

영빈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하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환을 찾았다.

영빈이 은근히 성격이 나쁘다는 건 하준만 알았다.

동생들 앞에서는 끝없이 풀어져 헐렁하게 굴지만, 영빈은 꽤 용의주도한 성격이다.

괜히 빌미를 주면 몇 년이고 잊지 않고 놀리고 괴롭히는 놈인데.

좀처럼 줄지 않는 한숨을 내쉬며 걷는 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복도를 울렸다.

그렇게 홀로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지환을 찾아간 하준.

때마침 작업실을 나오던 지환을 마주했지만, 비틀거리는 모습에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괜찮냐고 물었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이 동생 놈은 아프다고 말하면 죽는 줄 아는 놈이라는 걸 잠시 간과한 것.

어김없이 괜찮다며 창백한 얼굴로 웃는 게 영락없이 환자였다.

중재고 뭐고 일단은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우진 형을 찾았다.

하지만 핸드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지는 하준을 붙든 지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아파서 그런 거라고.

병원 갈 일은 아니라고 했다.

오늘 이게 몇 번째 한숨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지환을 부축해 휴게실로 향했다.

말하는 목소리에 담긴 익숙함으로 보아 자신이 왜 아픈지 지환은 아는 듯했다.

“어디가 안 좋은 거야.”

“그냥 스트레스받으면 이래요.”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마냥 핼쑥한 얼굴로 웃는 게 무척 못마땅해졌다.

늘 이렇게 웃으면서 무마하는 건 더 이상 두고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지환아.”

“네, 형.”

엄한 목소리로 지환을 바라보자 내심 찔렸는지 능청을 떨던 지환이 하준의 눈치를 봤다.

“숨기지 않기로 형이랑 약속했냐, 안 했냐.”

“…했어요.”

하준은 자신이 강하게 나가면 지환은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늘 자신을 숨기다가도 신뢰 관계를 꺼내면 당황해서 다 털어놓는 허술한 동생.

신뢰를 잃는 것을, 사람에게 버림받는 걸 무서워하는 내 동생.

다들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환은 아직 갈 길이 먼 듯했다.

주저하던 지환은 결국 하준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스트레스에 좀 약하다고.

신경 쓰는 일이 생기면 자주 체하고 두통이나 어지럼증이 심해진다고 했다.

병원에도 갔었지만, 의사들이 스트레스 때문이니 약 먹고 편히 쉬라고 했다고 했다.

불치병이라는 건가.

하준은 속으로 혀를 차며 풀이 죽은 가여운 어깨를 바라봤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단단한 듯 굴던 동생.

하지만 멤버들도, 친한 사람들도 모두 지환이 설탕 조각 같다는 걸 알았다.

무척 달콤해 보이고 반짝반짝 빛나서 단단한 유리알 같은 아이.

반면 물에 닿으면 덧없이 녹아 없어질 것 같이 약한 우리 동생.

새까맣게 염색한 조그만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하준은 천천히 그 머리를 헝클었다.

힐끔거리며 눈치 보는 게 영락없이 사고치고 엄마한테 걸린 어린애 같았다.

혼내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지환은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형은 너희 다툼에 개입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대로 지켜보는 건 힘들어. 더군다나 네가 아프잖아.”

“싸운 건 아닌데….”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듯 싸우지 않았다고 조그맣게 항변하는 지환.

하준은 픽 웃더니 얌전히 쓰다듬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차라리 싸워. 얼굴에 주먹질만 하지 말고. 다른 데는 옷으로 가리면 되니까.”

“네?”

하준의 말에 잔뜩 놀란 지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부딪히고 싸우고 서로 멱살도 좀 잡아보고. 그래도 괜찮아. 어떻게 사람이 좋게만 지내.”

하준은 지환이 안타까웠다.

멤버들은 늘 진심을 다해 지환에게 부딪히고 있는데 지환은 자꾸만 도망치고 있었다.

하준은 지환을 달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면 안 되냐며 살살 꼬셨다.

지환이 유독 자신을 많이 의지하고 따른다는 걸 하준도 알았다.

속에 쌓인 말을 직접 하기 힘들어 하면,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된다.

하준은 영빈과의 첫 만남, 첫 싸움 등 여러 가지를 풀어놓았다.

너희가 그렇게 견고하다고 믿는 맏형들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어떻게 다투게 된 건지는 이미 막내들에게 상황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 입장에서의 상황이었다.

하준의 꼬임에 넘어온 지환은 어둑한 눈으로 조금씩 그날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안 서운해? 나 같으면 서운할 것 같은데. 빈이가 그렇게 굴었으면 난 주먹부터 나갔을걸?”

“…조금요.”

다정하고 익숙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꽁꽁 싸매고 있던 빗장이 풀린 걸까?

지환은 하준의 맞장구에 설핏 웃기도 하면서 조금씩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 * *

재준은 애가 탔다.

얼마 전,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그날 재준이 그 말에 반응한 것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그 때문에 분량이 대폭 깎였다.

자신만 잘린 게 아니라 리더 형의 분량까지.

촬영장에 같이 있던 매니저는 길길이 날뛰며 재준을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하지만 그보다 재준을 괴롭게 했던 건 자신에게 실망한 듯한 형의 눈빛이었다.

늘 침착해 보였던 새까만 눈 안에는 애써 억눌러놓은 분노가 한가득했다.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쥔 리더 형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감당할 자신 없으면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라고.

꼭 당사자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다행히 편집되어 방송으로는 재준의 얼굴이 나가지 않을 테니 알려지진 않을 것.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알았을 거라며,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냐며 재준을 탓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재준의 속에서는 반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냥 다들 하는 뒷얘기였는데.

자신은 운이 없어서 걸린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동갑인데, 게다가 같은 학교 같은 반인데 누구는 잘나가고 자기는 인지도 없는 행사만 전전하고.

그마저도 몇 개 되지 않아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도 불러만 주면 달려가야 했다.

광고는커녕 음악방송 무대조차 몇 번 서보지 못했다.

늘 그저 그런, 평이 좋지 않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병풍처럼 웃다 와야 했다.

회사는 늘 우리가 실력이 부족해서 불러주는 곳이 없다고 했다.

자신들의 영업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문제니 더 연습하라고.

형들이 잠도 못 자고 팀 이름을 알려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재준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디에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지만, 죄책감과 무력감이 재준을 좀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첫 지명 프로에서 문제를 만들다니.

울고 싶었지만, 우는 것조차 사치일 수 있다는 걸 재준은 처음 알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주할 자신이 없어 단둘이 있을 때 사과라도 하려고 틈을 봤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세빈과 단둘이 마주한 순간, 냉담한 얼굴을 본 재준은 바짝 얼어버렸다.

늘 온순하게 웃던 커다란 눈에는 자신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왜?”

“아니, 그러니까….”

눈앞의 세빈은 자신이 알던 세빈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늘 부끄러워하고 쑥스러워하던 봄날 꽃바람 같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할 말 없으면 가볼게.”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난 재준은 세빈의 손목을 붙들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세빈아, 내가 잘못했어!”

“뭐가?”

절박하게 외치던 재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세빈은 비웃음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지극히 담담한 얼굴로 재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듯 되물었다.

“내가….”

“재준아.”

더듬더듬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던 재준을 단호히 막은 건 세빈이었다.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손짓으로 단호하게 재준의 손을 떼어낸 세빈.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재준에게 말했다.

“등 떠밀려서 사과하려는 거면 하지 마. 어차피 다시 언급할 생각 없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하지도 않을 테니까.”

“….”

재준은 늘 우유부단하게만 보였던 세빈이 보인 냉담한 반응에 입을 꾹 다물었다.

실제로도 재준은 뒷말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그저 상황을 무마시키고 싶었다.

게다가 리더 형이 사과하라고 했으니까.

얕은 생각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으로 재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네가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나랑 친구가 되고 싶은 거라면 그때 미안하다고 해줘.”

“그때는 사과받아줄 거야?”

냉담한 눈으로 재준을 바라보던 세빈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의외의 말을 남겼다.

“아니? 그때 널 보고 결정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사뿐한 걸음걸이로 재준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세빈의 태도는 재준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지가 뭔데 비싸게 구냐는 치기 어린 반발심.

잘못된 행위를 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느낀 부끄러움.

쟤는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등.

재준이 알기로는 언래블 멤버들 중에 가정사가 복잡하지 않은 멤버는 드물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연예란이 시끄러웠으니까.

괜히 욱하는 기분에 화가 나는 것도 같았지만, 창피해서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세빈은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했었다는 게 이상하게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오늘 일은 솔직하게 형들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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